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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숙 Aug 29. 2021

강직한 뿌리의 담담한 성장이기에

2021 EBS 국제다큐영화제 <쿠바댄서> 리뷰

발레는 나의 고향이다.
발레만 할 수 있다면 자유롭다.


15세의 발레 무용수 알렉시스는 쿠바국립발레학교의 유망주이다. 어린 시절부터 몸을 가다듬고 춤을 추는 것을 호흡하듯 해온 그에게는 두 가지 뿌리가 있다. 쿠바인이라는 것과 무용수라는 것. 이 두 가지를 주축으로 그는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무용수로서 매일매일 성장하고 있다. 한편 9살에 마이애미로 떠난 누나를 위해 가족 전체가 북미로 이동하게 되면서 그는 위기를 맞는다. 함께 춤을 추던 첫사랑과 친구들, 선생님과 가족을 고향에 두고 떠나 온 미국은 낯선 땅, 모든 것이 도전인 세계이다. <쿠바 댄서(Cuban Dancer)>는 그 길로에서 겪는 갈등과 기쁨, 사랑을 담은 성장 다큐멘터리이다. 이 글에서는 그의 삶을 춤과 예술, 성장 서사, 가족과 뿌리 세 가지를 바탕으로 살펴볼 것이다.


쿠바 사람들은 창조적이야.
예술가는 잃을 게 없어.
나는 이 길에 놓였고 여기가 내가 갈 길이다.

1. 춤과 예술

나는 춤을 좋아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몸을 좋아한다. 몸으로 하는 표현이, 원초적이면서 그래서 더 해석하기 어려운 모양새와 질감이 좋다. 움직임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한 기교를, 나체를, 굴곡을 사랑한다. 쓰다듬고 만지고 흔들고 움직이는 모든 행위가 아름답다. 이처럼 이미 인간의 몸이 하나의 완결성 있는 예술작품이기 때문에 이를 더 우아하게 가다듬어 음악과 리듬, 서사와 함께 선사하는 발레는 궁극의 예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와 시사 관련 다큐멘터리를 주로 찍던 감독 살리나스가 쿠바의 발레 무용수 소년을 카메라에 담고자 결심한 것도 춤이 표현하는 에너지와 삶에 매료되어서였다. 그는 그의 언어 중 하나인 영화언어(cinama language)를 춤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했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는 영화적 요소가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라는 장르적 정체성이 춤이라는 콘텐츠를 잠식하지 않기 위함이다. 그의 영화 언어는 알렉시스의 춤과 예술, 성장을 더 수려하게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

여자친구와 호흡을 맞추는 알렉시스

그렇기에 쿠바 댄서의 하이라이트는 춤의 장면이다. 주인공이 직접 말을 하거나 내레이션이 삽입되는 장면도 있지만 단연 눈과 귀를 사로잡는 것은 그가 혼자서, 때로는 친구들과 함께 춤을 출 때이다. 실제로 이 장면을 본다면 카메라와 무용수가 하나로 녹아들어 함께 춤을 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답고 역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후에 이어진 감독 인터뷰에 의하면 이때 사용된 안무들은 쿠바 발레학교 선생이었던 라우라 도밍고가 디렉팅 한 것이라고 한다. 신뢰와 애정으로 이루어진 사제관계와 쿠바인들 특유의 끈끈한 유대감이 동시에 묻어 나오는 장면이다.

외에도 주를 이루는 것은 발레 학교에서 알렉시스가 고군분투하는 장면이다. 더 날렵하고 우아한 동작을 수행하기 위해서 몸을 제련하고, 뛰어오르며, 온 힘을 다해 경직을 유지하는 장면은 숙련된 연주가가 악기를 수리하고 닦고, 정비하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발레 ‘학교’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 어쩌면 이들은 몸을 통해 생각하고 말하고 공부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표현은 점프로, 어떤 표현은 허리를 돌려서, 팔을 이용해서, 다리를 이용해서 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글을 쓸 때 단어를 고르듯 무용수는 무대 위에서 몸의 부위와 근육, 눈빛을 고른다. 몸에 대한 공부를 넘어서 몸으로 공부를 하는 것이다.


2. 성장 서사

촬영 초반에 카메라가 낯설었던 알렉시스는 ‘내가 연기를 해야 하나요?’라고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감독 살리나스는 그럴 때마다 ‘아니야. 연기를 하면 안 돼. 그냥 네 스스로가 되어야 해.’라고 답했다. 그렇게 3개월 정도가 지나자 알렉시스는 앞에 카메라가 있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러워졌고, 그렇게 5년의 촬영을 지속할 수 있었다고 한다.

<쿠바 댄서>에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소년의 드라마틱한 성장 서사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의 성장에는 우리나라 청소년 성장 소설에서 종종 등장하는 삶을 위협하는 역경이나 타락과 비행, 괴짜스러움은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술과 가족을 사랑하는 착하고 평범한 소년의 담담한 성장 이야기가 날것의 영상으로 보여질 뿐이다. 그렇기에 연기와 각본은 개인의 정합성 있는 성장에 오히려 잡음이 된다.

실제 장면에서도 가장 친한 일본인 친구와 대회에 나간 알렉시스가 상위 20에 들지 못했을 때 그들의 반응은 놀랄 만치 현실적이고 단순하다.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말없이 침대에 누워 멍 때리는 것. 불필요한 기름기를 뺀 다큐멘터리에서 성공은 과한 희망을 부추기지 않고 실패는 불필요한 슬픔을 요구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실패와 성공이 격자무니처럼 얽혀 있는 삶에 익숙한 우리들은 하나의 성공과 하나의 실패가 인생을 크게 좌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익히 알고 있지 않나.

알렉시스의 삶을 보면 하루하루가 불확실성의 연속이라는 점, 그럼에도 이따금씩 박혀 있는 건포도 같은 행복에 웃게 된다는 점, 불안함으로 가득한 삶일지라도 종말에는 자신의 삶을 끌어안고 사랑할 수 있다는 점이 위안으로 다가온다. 이처럼 성장에는 서사와 드라마가 필요하지 않다. 지금까지 봐왔던 K-성장 드라마들에 묘한 반감과 이질감을 느꼈던 것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개인의 성장은 결코 평범할 수 없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평범한 성장 서사가 더 필요하다. 누군가가 말했듯 모두의 삶이 다큐멘터리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고통을 겪고 비로소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나는 힘든 순간들에 힘을 얻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일어나건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3. 뿌리

강인함이 보이는가?
쿠바 사람은 전사와 같다.
투쟁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알렉시스는 스스로를 쿠바댄서라고 지칭한다. 쿠바인이라는 정체성은 예술인이라는 정체성과 맞먹을 정도로 그를 정의하고 있는 큰 부분이기에 미국에서도 쿠바인의 혈을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가족이 있다. 작품 내 등장하는 쿠바인의 가족에 대한 의미는 실로 대단하다. 미국으로 떠난 딸과 가까워지고자 생활의 터를 버리고 완전한 무연고지로 떠나고자 하는 가족의 모습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알렉시스 가족이 이동한 것은 정치적 문제도, 경제적 문제도 아닌 오직 가족의 재결합을 위해서였다. 결합된 가족을 위해서 국경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 뿌리를 찾기 위해서 뿌리의 근원지를 버릴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어느 곳에서든 흔들리지 않고 그 뿌리를 다시금 내릴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것이 알렉시스가 그토록 지키고자 하는 쿠바인의 정체성일까. 단순한 애국심으로 표현하기에 이들에게 뿌리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듯하다.

개인에게 강인한 뿌리가 있다면 시간과 공간은 그 바깥의 것에 불과하다. 쿠바 댄서로서 춤을 출 수만 있다면 어느 곳에서든, 어느 환경에서든 뿌리를 내리고 뻗어나갈 수 있는 알렉시스의 모습은 실존주의적이기도 하다. 실존의 행위로 마음을 다스리고 실존의 행위로 삶을 영위해 나간다는 것, 쿠바인들의 강인한 전사 다움의 근원이 이들 실존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미래에 대한 비관이 일종의 쿨함처럼 자리 잡고, 시니컬함과 조소가 트렌드로 소비되는 지금 담담한 알렉시스의 성장 서사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해 보인다. 현재의 우리는 성장이라는 단어를 지나치게 기름지고 얼룩진 그릇 안에서 굴리고 있지는 않나. 꿈과 희망이 촌스럽지 않고, 가족과 뿌리에 대한 사랑이 찌질하지 않던 시대가 가끔은 그립다. 지금 20대인 나는 결코 경험해보지도 못했을 시대에 대한 향수가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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