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클래스e 최정규 <죄수의 딜레마를 넘어> '집단 간 경쟁의 효과'
집단 간의 경쟁을 통해서 협력이 진화할 수 있을까?
협력과 무임승차가 선택지로 주어진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죄수의 딜레마를 넘어 협력을 증진시킬 수 있을까?
진화론의 아버지라고도 할 수 있는 <종의 기원>의 저자 찰스 다윈은 <인간의 유래>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한 부족 내에서 고결한 도덕적 가치를 지닌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유리한 점이 별로 없을지 모르지만 고결한 도덕적 가치를 지닌 사람이 많은 집단은 그렇지 못한 집단에 비해 훨씬 유리하다.
집단에 대해 충성하려는 성향이 강하고, 용감하며, 타인에 대해 동정심을 갖고 있어서 항상 다른 사람을 도울 자세가 되어 있을 뿐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스스로를 희생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은 집단이 그렇지 않은 다른 집단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것 또한 자연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집단 내에서는 협력하고자 하는 사람이 무임승차하는 사람에 비해 불리하지만 집단 간의 관계로 눈을 높여 보면 협력하는 사람들이 많은 집단이 협력하는 사람들이 적은 집단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주장한 ‘집단 선택 가설’이다.
이를 더 논증적으로 알아보기 위해서 ‘죄수의 딜레마’를 개인의 차원(집단 내)과 집단의 차원(집단 간)에서 살펴보자.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설정이다. 경기자 1과 경기자 2가 있는 상황에서 상대방에게 도움을 주면 상대방에게 2만큼의 혜택이 가고, 본인에게는 1만큼의 손해가 간다. 그리고 무임승차를 하게 되면 손해와 이익이 없으므로 0이다. 그렇기에 상황을 나누어 본다면
1. 내가 협력을 선택했을 때
상대방이 협력으로 나오면 1의 이익: +1
(나는 1의 손해를 얻고, 상대방으로부터 2만큼의 이익을 얻으므로)
상대방이 무임승차로 나오면 1의 손해: -1
(나는 1의 손해를 얻고, 상대방으로부터 0만큼의 이익을 얻으므로)
=> 평균 0
2. 내가 무임승차를 선택했을 때
상대방이 협력으로 나오면 2의 이익: +2
(나는 0의 손해를 얻고, 상대방으로부터 2만큼의 이익을 얻으므로)
상대방이 무임승차로 나오면 0의 이익: 0
(나는 0의 손해를 얻고, 상대방으로부터 0만큼의 이익을 얻으므로)
=> 평균 1
따라서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든 협력하는 것보다 무임승차하는 것이 개인에게는 유리하다.
상대방이 협력으로 나올 때: 내가 협력하는 것 < 무임승차하는 것: +1 < +2
상대방이 무임승차로 나올 때: 내가 협력하는 것 < 무임승차하는 것: -1 < 0
결국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는 무임승차를 할 때 이익이 더 클 수밖에 없게 되고, 무임승차를 선택할 것이다.
한편 한 차원 높여서 집단 간의 관계를 본다면 협력하는 사람이 많은 집단이 성공할 수밖에 없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집단 차원에서 죄수의 딜레마를 살펴보자. p=각 집단에 협력하는 사람이 그 집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라고 하고, 집단 간 비교를 한다고 하자.
A집단: p=0.1
A집단에서는 0.1만큼의 사람이 협력을 하고, 0.9만큼의 사람이 무임승차를 하고 있다. 따라서
1) 내가 협력을 선택: 0.1*1 + 0.9*(-1) = -0.8 (기대보수)
2) 내가 무임승차를 선택: 0.1*2 + 0.9*0 = 0.2 (기대보수)
따라서 무임승차를 선택했을 때 1만큼 기대보수가 높다.
B집단: p=0.5
B집단에서는 0.5만큼의 사람이 협력을 하고, 0.5만큼의 사람이 무임승차를 하고 있다. 따라서
1) 내가 협력을 선택: 0.5*1 + 0.5*(-1) = 0 (기대보수)
2) 내가 무임승차를 선택: 0.5*2 + 0.5*0 = 1 (기대보수)
따라서 무임승차를 선택했을 때 1만큼 기대보수가 높다.
C집단: p=0.9
C집단에서는 0.9만큼의 사람이 협력을 하고, 0.1만큼의 사람이 무임승차를 하고 있다. 따라서
1) 내가 협력을 선택: 0.9*1 + 0.1*(-1) = 0.8 (기대보수)
2) 내가 무임승차를 선택: 0.9*2 + 0.1*0 = 1.8 (기대보수)
따라서 무임승차를 선택했을 때 1만큼 기대보수가 높다.
결국 이 또한 구성이 어떻든 언제나 그 집단 내에서는 협력하는 사람들보다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의 보수가 평균적으로 높은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집단 내부를 관찰한다면 집단 내에서 협력하는 사람들은 점차 감소하고,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이 점차 증가할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A, B, C집단 모두 어디를 잠깐 갔다 오면 점점 협력하는 사람들의 비중이 줄어 0이 될 것임을 알 수 있다. 집단 내에서 볼 때에는 그러하다.
한편 집단 간으로 살펴본다면 다른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 A의 집단 평균 보수는 0.1이고, B의 집단 평균 보수는 0.5이며 C의 집단 평균 보수는 0.9이다. A와 C만 비교한다면 거의 9배의 보수 차이이기 때문에 상당한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때 대공황, 자연재해 등 굉장히 극한의 상황에서 이 집단들이 전 지구에 분포해 있다고 생각을 한다면 어느 집단이 더 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미 C집단의 사람들이 더 많은 보수를 받고 있지만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도 협력자가 많은 집단이 살아남을 확률이 높을 것이다. 또한 A집단과 C집단이 맞붙어 전쟁이 발생한다면 무임승차자가 많은 A집단보다 협력자가 많은 C집단의 전투력이 높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다윈이 이야기한 것도 이와 맞닿아 있다. 개인 차원에서 본다면 무임승차를 하는 개인과 협력하는 개인 중 무임승차를 하는 쪽이 더 유리하지만, 집단 차원에서 본다면 무임승차하는 개인이 많은 집단과 협력하는 개인이 많은 집단이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다윈의 용어를 빌리자면 후자가 전자를 대체하게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곧 ‘집단선택가설’이다.
종합하자면 집단 내부에서 보면 협력하는 사람이 계속 줄어들고, 집단 간의 관계를 보면 무임승차자가 많은 집단이 협력자가 많은 집단에 의해 계속 대체되는 경향성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협력자가 늘어날지 줄어들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이 둘 사이의 속도를 비교할 수밖에 없다.
즉, 집단 내부에서 협력하는 사람 수가 줄어드는 속도와 집단 사이에서 협력하는 사람 수가 늘어나는 속도 중 어떤 게 더 빠르고 지배적인지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집단 간 경쟁의 빈도와 협력하는 사람들의 비중 사이의 상관관계를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르면 집단 간의 경쟁 빈도가 심해지면 경쟁이 커지면 커질수록 협력하는 사람의 비중이 커짐을 알 수 있다. 뒤집어 생각한다면 일정 수준의 협력 비중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만큼 집단 간의 경쟁이 심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한편 실제로 집단 간의 경쟁이 이토록 심하게 발생할 수 있을까? 과거 진화생물학자들에 의하면 이론상으로 그러한 경쟁이 발생할 가능성은 있지만 실제 세계에서 가능할지는 의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집단 간 경쟁을 통해서 협력자를 융성하고, 유지시키고, 도덕을 진화시키기 위해서는 그 빈도와 강도가 상당히 강해야 하는데 그 경쟁이라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증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최정규 교수는 이에 ‘제도의 평등’이라는 한 가지 변수를 더 제시한다. 가령 과거 부족들이 발전해온 과정을 보면 지배와 피지배,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분이 별로 없고 식량 공유 관습을 바탕으로 누구에게나 공평한 몫을 배분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 경우에는 무임승차자가 거의 없고 협력자가 많았다는 것이다. 앞서 집단 내에서는 협력하는 자와 무임승차하는 자 사이에 후자의 이익이 항상 더 높기 때문에 누구나 무임승차를 택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는데, 만일 집단 내에 평등주의적 관습이 강하게 작용한다면 집단 내 협력자와 무임승차자 사이의 보수 차이가 보완이 될 것이다. 이는 곧 집단 내부에서 협력자가 줄어드는 속도가 줄어들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집단 내 평등주의적 제도의 여부에 따라 그래프가 좌측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있다. 즉, 평등주의적 제도가 존재한다면, 일정 수준의 협력자 비율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실현 불가능할 정도의 집단 간 경쟁 없이도 협력자 비율을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에 관한 연구도 다수 존재한다.
제도의 존재 근거가 여기에 있다고 느낀다. 인간 종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 올 천재지변 등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자연선택과 진화의 힘을 거스를 수 없다. 개인의 역사보다 수천 년을 앞뒤로 뻗어 있는 자연의 부분 집합일 뿐인 인간은 그렇기에 더 잘 살아남는 방법을 궁리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집단을 이루고, 국가를 이루고, 법과 제도를 쌓아 올려 온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무임승차와 협력 사이에서 갈등하는 개인에게 평등주의적 제도가 도덕적 방파제로서 협력자들과 사회의 존속을 지탱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집단의 크기와 사회적 배경 등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 상황에서는 고려해야 할 상황이 더 많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더 나은 제도적 선택과 더 발전한 사회를 위해서 인간의 본성과 우리 안에 내재하는 진화의 역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 단편적이고 근시안적인 판단으로 사회와 제도를 그럴듯하게 휘두르고,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경제와 도덕의 줄다리기, 때로는 상호협력적 관계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있다고 최정규 교수는 이야기한다.
Man as he really is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자
도덕과 시민의 영역과 경제의 영역, 혹은 이 둘이 혼재해 있는 영역 내에서 최선의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 그다음에 내리는 판단에 대해서는 옳고 그름이 명확하지 않다. 이 무슨 어불성설이라고 느낄 수 있지만, 있는 그대로의 인간 자체가 불완전하고 복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더욱 함부로 논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유한한 인간 존재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전 세대가 죽음으로 쌓아 올린 역사를 면밀히 살피고 각 시대의 암호를 풀듯 더 나은 사회에 다다르기 위해 가능성을 성실히 높이는 것이다. 빈틈이 없는 정답을 찾는 것은 (과연 그것이 존재할지도 의문이지만) 가능할지라도 지치는 일이며 그 과정에서 너무나도 많은 선택과 기회를 어리석게 놓치게 된다. 경제에 있어서 국가와 개인의 역할을 규정하고, 도덕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이 수천 년의 역사를 갖고도 자명한 결론이 나지 않은 것도 여기에 있다. 강의 막바지에서 최정규 교수가 한 말을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죄수의 딜레마가 답이 없다고 생각하면 죄수의 딜레마가 원래 그런 겁니다. 공부는 하면 할수록 모르는 것이 많고 생각할 것이 더 많기 때문이지요. 답이 없어서 안 좋은 게 아니라, 답이 없기 때문에 그만큼 더 중요하고 관심이 더 많이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문제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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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사진 출처: http://youtu.be/rr6lsTgZKAQ (유튜브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