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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둘기 Jul 06. 2024

하루키에게 배운 대답

왜 뛰냐고 묻거든 웃지요

만약 내 묘비명 같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리고 그 문구를 내가 선택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렇게 써넣고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그리고 러너)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1949~20XX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최근에 기안84 님께서 풀코스 마라톤을 도전하는 보습이 방송에 나왔다. 몇 번을 쓰러지면서도 끝까지 도전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 방송을 보고 ‘달리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풀코스 마라톤에 도전하는 사람들도 엄청나게 늘었다고 한다. 한 사람이 주는 감동이 세상이 주는 영향력이 이렇게나 크다.


     

문득 나는 언제부터 달리기를 했나 생각해본다. 삶의 대부분, 나는 억지로 달렸다. 달리기라기보다는 뜀박질에 가까웠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내 의지로 달리고 있다. 뜀박질에서 달리기로 바뀌었던 그 순간. 그건 언제였을까?


     

아마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책을 읽었을 때 같다. 하루키는 인기 작가지만, 내 스타일을 아니었다. 그의 소설은 감각적이었지만, 나는 그 감각을 따라가지 못했다. 하지만 우연히 이 책을 읽고, 하루키도 달리기도 좋아지게 되었다. 

�228p.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내가 좋아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좋아서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작가에 대한 로망이 있다. 하루키는 그 로망을 철저히 파괴한다. 작가는 우아하게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한가하게 컴퓨터 앞에서 노니는 그런 직업이 아니다. 한 세계를 창조하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매일 작품 속 인물을 탐구하고, 애써 썼던 원고를 찢어버리기도 한다. 출판사와 약속한 마감일을 지켜야 하는 현실적인 어려움도 마주한다.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고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하루키의 비결은 무엇일까? 


�19p. 계속하는 것 – 리듬을 단절하지 않는 것, 정기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그것이 중요하다.     


�252p.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 고통을 통과해가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에서 자신이 살고 있다는 확실한 실감을, 적어도 그 한쪽 끝을, 우리는 그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취미로 달리기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하는 질문이 있다. 

“안 힘들어요? 도대체 힘들게 왜 뛰어요?”

답하기 어려운 킬러 문항이다. 분명 교육부가 킬러 문항 출제를 자제하라고 했을텐데... 사람들 참 말 안 듣는다. 대답은 해줘야겠고, 답은 모르겠고.. 나는 그저 웃어버린다. 

“허허허.. 그러게요..”     

나도 내가 힘들게 왜 뛰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이해가 안 될 땐 외워야 한다. 다음에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하루키가 쓴 모범답안을 달달 외워서 대답해줘야겠다. 


�35p. 적어도 달리고 있는 동안은 누구와도 얘기하지 않아도 괜찮고, 누구의 얘기도 듣지 않아도 된다.      


�128p. 같은 10년이라고 해도, 멍하게 사는 10년보다는 확실한 목적을 지니고 생동감 있게 사는 10년 쪽이, 당연한 일이지만 훨씬 바람직하고, 달리는 것은 확실히 그러한 목적을 도와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정말 멋진 대답이다. 완벽하게 외웠다. 혹시 어디 물어봐 줄 사람 없나….     



두 번째로 많이 받는 질문은 이렇다.

“뛰면서 무슨 생각 해요?”

이 질문은 정답이 너무 많아서 답하기가 어렵다. 사실 달리는 순간 내가 지구 밖으로 날아가는 것은 아니다. 뛰면서 하는 생각이 걸으면서 하는 생각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부정적인 생각은 많이 사라지고 긍정적인 생각이 조금 늘어날 뿐이다.      

내가 봐도 매력없는 대답이다. 좋은 점수를 받기 어렵다. 역시나 달리기 일타 강사 하루키의 모범답안을 달달 외워야겠다. 

�45p.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준비 완료. 이제 제발 누군가가 한 번만 저 질문을 다시 해줬으면 좋겠다. 꼭 이러면 까먹을 때쯤 물어보더라…. 



    

하루키는 좋은 작가이자 훌륭한 러너이다. 42.195km의 풀코스 마라톤뿐만 아니라 100km를

달리는 울트라 마라톤, 트라이애슬론까지 극한의 도전을 계속한다. 삶이 그렇듯이 달리기 기록은 좋을 때도 나쁠때도 있지만, 하루키는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또, 하루키로 인해서 달리기를 시작한 수많은 러너들도 전세계 여기저기서 오늘도 달리고 있다. 하루키의 소설만큼 하루키의 달리기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오늘도 하루키의 대답을 외운다. 누군가 다시 한 번만 물어봐주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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