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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둥산 Mar 27. 2023

11. 죽음과 탄생의 교차점

젊은 암환자의 임신・출산기 1

나는 32살의 나이로 난소암 1기를 진단받았다.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수술과 항암을 견뎌내고 1년이 지난 22년 5월. 갑자기 아버지가 사고사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더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한 달 만에 임신을 진단받았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다. 부모님을 여의자마자 내가 부모가 되어야 한다니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한쪽 난소밖에 없는 몸으로 임신에 성공했으니 기적 같은 일인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생각하면 슬픈 마음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손주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려드리지 못하는 사실에 가슴이 미어졌다. 

그 슬픔을 가슴속에 묻은 채, 우리 부부에게 찾아와 준 아이를 맞이할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어버이날이 마지막일 줄 몰랐다

암을 진단받았을 때는 살면서 이보다 더한 일이 생길까 의심했다. 내 의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 보다 더한 일이 일어났다.


친정아버지와 마지막 식사를 한 날은 5월의 어버이날이었다. 대학생 때부터 동생과 나는 각자 집을 나와 자취 생활을 했다 보니, 가족이 모이는 날에는 보통 모여서 외식을 했다. 


여느 때처럼 식사와 커피를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평생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 일을 쉬어 본 적이 없는 아버지가 이제는 많이 놀러 다니시기를 바란다는 얘기를 나누면서 작지만 용돈도 챙겨드렸다. 


작년 한 차례 암 치료로 걱정을 많이 끼쳐드렸지만, 다행히 정기적인 추적 검사에서 좋은 결과만 듣고 지내던 때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이야기도 나눴던 기억이다.


그렇게 평범한 어버이날을 함께 보내고 일주일 후, 아버지는 심 정지로 생을 마감하셨다. 


평화롭게 남편과 주말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던 때, 경찰서의 전화를 받았다. 지금 아버지한테 사고가 난 것 같으니 얼른 아버지댁으로 가보라는 말을 했다. 믿기지가 않아 순간 사기 전화인가 의심이 되었다. 하지만 사기가 아니었다. 


혼비백산한 나와 남편이 아버지 집으로 달려갔다. 도착해 보니 소방차, 구급차, 경찰차가 골목에 죄다 차를 대고 있었다. 구급대원분은 CPR을 20분째 하고 있지만 아버지의 호흡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했다. 


대학병원으로 향하는 응급차 안에서 엄청난 공포감을 느꼈다. 이게 아버지와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공포감이었다. 응급실에서도 30분가량 처치를 해주셨지만 의사 선생님은 아버지를 보내드려야 할 것 같다고 하셨다.


아버지 나이 예순다섯, 이렇게 영원히 이별하기에는 너무 이른 때었다. 



1년 만에 암환자에서 임산부가 되다

아버지를 당신 고향 땅에 묻어드리고 슬픔에 잠겨 지낸 지 한 달 여가 지난 6월이었다.


임신을 알게 되기 약 2주 전에 암 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3개월마다 혈액검사를 하는데 최근 검사에서 *CA-125 수치가 갑자기 치솟았다는 것이다. 정밀검사를 위해 CT촬영을 하러 오라고 했다. 설마 했던 암 재발이 찾아온 것은 아닌지 겁이 났다. 아버지를 여읜 지 얼마 되지도 못했는데 또 시련이 찾아올 수 있을까. 아닐 거라고 되뇌어봤지만 검사해 보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CA-125: 혈액검사로 알 수 있는 종양 표지자의 하나로 난소암, 자궁내막암 등에 반응하는 수치다.


CT검사를 일주일 정도 앞둔 주말에 갑자기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몸살 기운과 함께 속이 미슥거렸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남편과 함께 코로나 자가키트 검사를 해봤지만 음성이었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몸이 허해져서 몸살이 왔다보다 하고 있었다.


걱정이 되었던 남편이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찾아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내게 조심스레 물어봤다.

 “설마 임신은 아니겠지?”


CA-125 수치를 자극하는 요인은 보통 난소암 계통인데 임신을 했을 때에도 이 수치가 올라간다는 글을 봤다고 했다. 


 “에이.. 설마”

하지만 월경이 늦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가테스트는 해봄 직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국에서 처음으로 임신 테스트기를 샀다. 놀랍게도 선명한 두줄이 떴다. 남편의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나는 어떤 표정도 지을 수가 없었다. 엄청나게 놀랐기 때문이었다.


암 수술을 하던 당시, 임신 출산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가임력 보존을 위해 우측 난소만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었다. 수술이 끝난 후 항암은 6번을 받았다. 항암을 하면 난소 기능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당시 주치의는 항암에 들어가기 전, 수정란을 냉동해 두기를 권유하셨다. 그래서 난임 센터를 다니며 준비를 마쳐둔 상태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임신은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아이를 가지고 싶다면 시험관을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줄곧 생각해 왔다.


걱정스러운 마음을 가득 앉고, 우리는 곧바로 산부인과를 예약해 초음파를 확인했다. 아기집이 보였고 6주가량 되었다고 했다. 예정일은 23년 2월 초.


아가의 심장소리를 듣는 순간 그때서야 믿어졌다. 두 뺨에 뜨거운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임신을 했다는 기쁨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주신 기적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버지, 손주 생겼어요.’ 

돌아 가신지 불과 한 달 만에 알게 된 이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없다는 서러움이 몰려왔다. 



이제 '암 경험자'로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암센터 주치의 선생님은 임신 시도의 시점을 2년 후로 보자고 하셨던지라 마음 한편에 걱정이 있었다. 혹여 재발하면 산모와 아기가 모두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창 추적검사를 받던 시기에 찾아온 선물 같은 아이가 부디 건강하게만 태어나길 간절히 바랐다.


임산부일 경우 CT촬영은 태아에게 안 좋은 작용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검사는 MRI로 변경되었다. 

죄인이 된 기분으로 쭈뼛쭈뼛 외래진료 테이블에 앉아 주치의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임밍아웃을 했다.


“선생님… 제가 임신을 해버렸지 뭐예요”

“어허~ 그래? 잘했어! 초음파 한번 봅시다.”


아직 임신하면 안 된다고 혼이 날 줄 알았는데 일초의 기다림도 없이 시원하게 칭찬(?)을 해주셨다.


나는 초음파 실에 누워 있었던 터라 바깥 상황을 모르고 있었는데, 남편이 해준 얘기에 의하면 주치의 선생님이 한참 이리저리 컴퓨터 화면을 번갈아 가며 기록과 초음파를 심각한 표정으로 들여다보시더란다. 


좋지 못한 결과가 나올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검사 결과 다행히도 이상소견은 없었다.  


“어 들리네 들려. 심장이 뛰네!” 

“잘 키워봐요.”

활짝 웃으며 축하의 말씀을 해주셨다. 식은땀을 흘리던 남편은 그제야 긴장이 사르르 녹았다고 했다. 


그날 이후, 암 센터로의 정기검진 일정은 잠정적으로 중단되었고 열 달 동안 산부인과로 정기검진을 다녔다. 병원 대기실에서 매번 생각했다. 인생은 정말 한 치 앞을 모르겠다고.


암 치료를 하던 나날들은 온통 불안과 걱정 속에서 살았다. 임신을 하고서는 뱃속에서 아이가 건강할지 걱정이 되었다. 끊임없는 걱정 속에 사는 것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역시 시간은 약이다. 힘겹지만 버티다 보니 불안과 걱정들에게서 어느 순간 무뎌져갔다. 내가 생명을 잉태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해진 게 아닐까 하는 믿음을 가지기로 했다. 


암을 진단받고 살아가는 사람들 중, 5년 이상 생존해 있는 사람을 '암 경험자' 혹은 '암 생존자'라고 한다. 과거에 암을 치료받고 5년 동안 재발이 없다면 '완치'로 본다고 한다. 5년 중에 2년 여를 잘 살아가고 있으니 암 경험자가 되기까지 반절이나 왔다.


언젠가 우리 아가에게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해 주고 싶다. 

"엄마는 젊었을 때 무서운 병을 잠시 겪었고 그 덕분에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았어. 그래서 우리 아가를 건강하게 낳아 기를 수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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