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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담화 May 12. 2022

22년 동안 닫혀있던 양조장 문을 열어봤습니다

판교마을 동일주조장 방문기 

"숙화님, 저희 다음 주에 판교마을 취재 같이 가요."

"좋아요. 복귀 시간은 언제예요?"

"음 아마 10시에 만나서 출발하면... 퇴근 시간대 맞춰서 돌아오지 않을까요?"

"엥? 판굔데 그렇게 오래 걸려요?"

- 서울 사는 포토그래퍼와의 대화 - 



'판교'라고 하면 대부분 경기도 성남시 판교를 떠올릴 거예요. 하지만 이번에 다녀온 곳은 충남 서천군 판교면입니다. 서울에서 2시간 반 차를 타고 가면 야트막한 건물과 탁 트인 하늘이 한눈에 들어오는 시골 마을에 도착하게 됩니다. 


마을을 조금 걸어봤습니다. 입장료 500원, 영화 상영은 하루 3회, 직접 그린듯한 영화 포스터로 도배된 옛날 극장이 반겨줍니다. 바로 옆에는 차력, 쌍절봉, 기공맛사지... 영문 모를 스포츠 이름이 대문에 적혀있네요. 건물 하나가 1960-70년대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놓칠세라 온 힘 다해 끌어안고 있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어요. 

'와, 여기는 찐이다...'



판교 극장을 지나 양조장까지 걸어가는 길,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마을은 도보로 금방 돌아볼 정도로 아담하거든요. 마을 규모에 비해 양조장이 꽤나 큽니다. 커다란 양조장 대문을 맞닥뜨릴 때까지 제 머릿속에 맴돈 생각은 단 하나였어요.

'와, 여기는 진짜 찐이다...'



판교마을에 위치한 동일주조장은 1932년에 문을 열어 3대째 운영되다 2000년 12월, 경영난으로 문을 닫은 양조장입니다. 22년 동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이곳에는 어느덧 먼지가 보얗게 내리 앉았습니다. 그 어떤 곳보다 원형 그대로 보존이 잘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원래는 문이 닫혀 있던 공간이었는데 운이 좋았습니다. 양조장 소유주 분으로부터 방문 시간 동안 양조장을 돌아볼 수 있도록 개방해주신다는 허락을 받았어요. 현장에 고스란히 놓인 양조 물건들을 보며 그 시절의 술 빚던 모습을 한 번 짐작해보고자 합니다. 이 양조장에서 어떤 동선으로 술이 빚어졌는지 말이에요. 




각 시설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 독자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도면을 제작하였습니다. 자, 우리는 이제 이 숫자 순서대로 장소를 살펴볼 예정입니다. 




1. 정미소 | 쌀 도정하기

누룩과 술을 빚을 원료, 쌀부터 시작합시다. 정미소는 쌀 껍질을 벗겨내는 제조소입니다. 밀주를 단속하던 시절에는 밀막걸리를 제조해 판매했지만, 통일벼가 보급되며 쌀 수급이 원활해지자 쌀 막걸리를 제조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활한 쌀 수급을 위해 양조장과 정미소를 함께 운영했다고 해요. 공급받은 쌀로부터 술 빚는 것을 시작하지 않고, 그 이전의 쌀 도정 과정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정미소 내부


더욱이, 양조장의 오른쪽 벽면을 터서 두 건물 사이의 동선을 줄였습니다. 도정한 쌀을 바로 양조장 안으로 들여올 수 있게 만들었어요.  

(왼쪽) 정미소 (오른쪽) 양조장에서 바라본 정미소




2-1. 입국실 | 입국(흩임누룩) 만드는 공간

도정을 마친 쌀은 고두밥이 되거나 입국(쌀, 보리, 밀가루를 찐 후 순수 배양한 곰팡이 균을 접종 - 배양한 누룩)으로 제조됩니다. 입국실에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차곡차곡 잘 쌓인 입국 상자였습니다. 지금은 기계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옛날에는 종국이 잘 번식하도록 보쌈 - 뒤집기 - 입상- 갈아쌓기 등의 중간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이 과정은 2-3시간에 한 번씩 반복해야 했는데, 전부 사람의 손길을 필요로 했어요. 



2-2. 숙직실 | 교대로 잠을 자는 공간

입국을 만드는 손길은 밤에도 지속되었습니다. 기술자나 보조 기술자가 양조장에 남아 정기적으로 국실을 관리했기 때문에 입국실 옆에 숙직실을 뒀습니다. 이 과정을 소홀히 하면 국이 제대로 뜨지 않아 술맛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양조장을 지킨 사람이 술맛을 위해 정성을 기울였다는 것이 엿보이는 공간이죠.



3. 우물 | 물 끌어오기

입국실에서 바깥으로 쭈욱 나가면 우물이 보입니다. 물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커버를 살짝 걷어서 들여다보니 바닥에 찰랑일 정도로 고여 있더라고요. 조금 의아합니다. 오래된 양조장이긴 하지만, 2000년까지 운영했다면 수도를 설치하여 편하게 물을 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럴 만큼의 여건도 충분히 되었을 것이고요. 

전물을 대는 역할을 하는 우물이 지닌 전통적 가치를 허투루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편리성을 위해 아예 없애버리기보다, 현대식 펌프와 호스를 연결하여 쓰임새를 계속 발전시켜 나갔어요.



4. 사입실 | 덧술 혹은 발효하는 공간

덧술하거나 숙성하는 공간으로 들어왔습니다. 다른 공간보다 어둡고 서늘합니다. 일정한 온도에서 술을 안정적으로 발효하기 위해 땅을 파서 항아리를 보관했어요. 더욱이, 장독대가 여기저기 나뒹굴어 있는데 크기도 상당하고 수도 꽤 많습니다. 항아리가 이렇게 많다는 것은 그만큼 술을 많이 생산했다는 의미겠지요.  



5. 병입실 | 술 걸러내고 담는 공간

발효를 마친 술은 지게미 거르는 공정을 거친 다음, 알코올 도수를 낮추기 위해 물을 추가하여 완성됩니다. 이후 소분하여 병 혹은 통에 담는 것을 끝으로 술 제조는 마무리됩니다.



6. 자전거 | 배달하기

발효를 마친 막걸리를 담았던 플라스틱 말통, 배달했던 자전거가 양조장 가운데를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잠깐 마을 이야기를 하자면, 판교 마을은 과거 충남에서 손꼽는 우시장이 열려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소문에 의하면 1000여 마리 소가 이곳에 묶여 있었고 하루 수백 마리의 소가 거래되었을 정도로 규모가 엄청났다고 해요.


장날이 다가올 즈음 직원들은 말통에 막걸리를 담아 여기저기 배달하기 바빴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을 막걸리를 생각하면 마음이 절로 흐뭇해집니다. 






3대가 대를 이어 운영하던 양조장은 2000년 12월, 문을 닫게 됩니다. 양조장의 규모, 정미소와 양조장을 함께 운영한 점으로 미루어 보건대, 동일주조장 대표는 이 지역 최고의 부호였을 것입니다. 더 지속되지 않았던 데에는 마을의 쇠락을 빼놓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70년대에 목공 정미 양곡 양조 산업과 함께 장터가 발전하며 번성기를 누리던 판교면은 철도시설공단 부지로 개발이 어려워졌고, 1980년대 대도시로의 집중 현상이 가속되며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70년대 당시 8,000명에 달했던 인구는 현재 2,000여 명으로 줄어들었고 이중 판교마을 인구는 200여 명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공간을 돌아보는 내내 지속적으로 들었던 생각은 "아, 이 양조장을 지켰던 분들은 정말 최선을 다해 양조장을 꾸렸구나."였습니다. 막걸리가 사람들에게 사랑받던 시절에는 모든 사람들이 동일주조장 술만 찾았을 테지요. 쌀 도정 - 입국 제조 - 술 양조 - 배달에 이르는 전 과정에 정성을 기울인 만큼 더욱 맛있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지금 이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어 남아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글프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조금 더 관심을 가졌다면 달라졌을까?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았더라면?' 이런 생각을 지울 수 없었어요. 더욱이, 운영이 어려워 폐업을 고민하고 있는 양조장이 많다고 합니다. 앞으로도 술담화는 오랜 세월을 간직하고 있는 작은 양조장을 찾아다니며. 그 공간에 깃든 가치를 많이 보고 배우고 알릴 생각입니다. 





끝으로-

그 흔한 카페 하나 없는 판교마을, 이곳에서 최근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옛날의 풍경을 오롯이 간직한 가치를 인정받아 2021년, 마을 전체가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어요. 덧붙여, 문화재생사업지로 선정되어 새단장을 앞두고 있다고 합니다. 극장은 복합문화공간, 사진관은 마을기록관, 촌닭집은 편집샵으로의 변신을 할 예정인데요.

마을을 스윽 둘러보는 것만 해도 우리에게 안겨질 울림은 남다를 것이라 생각합니다. 

방문해보세요, 그리고 느껴보세요. 

스탬프 투어도 가능합니다.




술담화가 사라져가는 양조장을 탐방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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