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미안해, 아들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나는 옳고, 아들은 틀린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금 그 얘기가 아니잖아요. 그만 좀 말하라고요. 귀에서 피날 지경이라고요.”
그날, 아들은 마침내 말했고
나는, 그제야 들었다.
그 목소리는 날카롭고도 간절했다.
무엇을 해달라는 것도, 고쳐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아이는, 그 순간만큼은
‘말을 멈춰 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나는 얼어붙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 섰다.
손에 들고 있던 이삿짐 상자는 바닥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시선은 아들의 얼굴에 박힌 채 떨어지지 않았다.
“계속 엄마는 내가 못하는 것만 지적하고 있잖아.
나도, 할 만큼 노력했다고.
그래도 안 되는 걸 어떡하라고요.
나보고 뭘 더 어쩌라는 거예요.”
그건 말이 아니라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몇 년, 어쩌면 십수 년 동안 차곡차곡 가라앉은 응어리가
틈을 찾아 터진 순간이었다.
침묵 속에서 부풀어 오른 감정이 결국은 파열음을 냈다.
말의 형태를 한 진심이, 그날을 선택한 것이다.
그날은 이삿날이었다.
집 안은 어지럽게 풀린 상자들과 베란다에 쌓인 짐들로 정신없었다.
내 머릿속도 이리저리 엉킨 전선줄처럼 혼란스러웠다.
정리를 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남편은 금요일 밤늦게야 도착했다. 우리는 17년 차 주말 부부다.
이삿짐이 제자리를 찾을 때마다, 감정도 조금씩 바뀐다.
나는 마음이 급했다.
빨리 정리를 마치고 싶었고, 빨리 일상을 회복하고 싶었다.
그 마음이 초조하게, 그리고 무심하게 흘러나왔다.
그날 아침, 남편이 딸아이를 행사장에 데려다주러 나갔다.
그 사이 나는 자고 있는 아들을 깨웠다.
“집이 이렇게 어수선한데 잠이 오니? 짐 정리 좀 빨리 하자.”
나는 그 말 한마디가 아들의 인내심 끝자락을 건드릴 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으면서 외면했는지도 모른다.
한계가 가까웠다는 걸 눈치채고도,
여느 때처럼 그냥 말했을 뿐이었다.
내가 얼마나 자주, 얼마나 무심히 말을 던지고 있었는지.
조언인지 잔소리인지조차 구분하지 않고,
그저 습관처럼 내뱉었던 말들.
그 말들이 날마다 박힌 돌멩이처럼
그 아이의 마음에 쌓였다는 걸,
나는 정말 몰랐다. 혹은 알면서도 외면했다.
‘괜찮겠지’, ‘참겠지’, ‘이번만’이라며
말하는 나보다 듣는 아이의 감정을 덜 생각했다.
아들은 어릴 때부터 조용하고 착한 아이였다.
누나에게 양보할 줄 알고, 웃음이 많은 아이.
‘해피 보이’라는 별명이 딱 맞는 아이.
나는 그 순함을 복이라 여겼다.
편한 아이였고, 말없이 따라주는 아이였고,
그래서 더 많은 것을 쉽게 요구하게 된 존재였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딸애보다는 아들에게
나는 더 자주 말을 건넸고,
더 많은 기대를 걸었고,
더 무겁게 요구했다.
고등학교 시절,
성적이 오르지 않자 나는 점점 조급 해졌다.
함께 인강을 듣고, 연습문제를 풀고,
교과서를 복습하며 요점을 정리했다.
나는 그걸 ‘같이 공부하는 시간’이라 믿었지만,
실은 내가 혼자 애쓰고 있었고,
아이는 조용히 그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성적은 눈에 띄게 오르지 않았다.
나는 답답했다.
가고 싶은 대학에서
갈 수 있는 대학으로 계획이 바뀌었다.
그리고 아이는 더 깊은 침묵 속으로 들어갔다.
그 침묵을 나는 ‘순응’이라고 착각했다.
별말 없는 아이에게
나는 더 많은 말로 다가갔고,
그 말들이 결국 관계의 벽을 높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감정의 문을 하나씩 닫아가던 과정이었다.
아이는 집에서 먼 대학에 합격했다.
의외로 전액 장학금을 받았고,
총장 명의의 입학증서를 대표로 받아왔다.
나는 놀랐고, 어쩐지 멍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였다.
내가 미처 믿지 않았던 가능성이
현실이 되어 내 앞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1학년을 마칠 즈음 편입을 준비하겠다는 말에도
나는 조심스럽게 의심을 담아 말했다.
“지금도 괜찮지 않니?
괜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잖아.”
하지만 아이는 말없이 준비했다.
내가 원했던 ‘인 서울’ 기회를 버리고
그가 선택한 지방 국립대로 갔다.
그곳에서도 다시 편입 장학금을 받았다.
나는 여전히 아들의 부족한 면을 먼저 보았다.
이미 충분히 해내고 있었는데도,
나는 친척이나 지인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속물스러운 결과를 원했다.
더 높이, 더 잘하기를 바랐다.
내가 옳다고 믿는 삶의 기준을
그 아이 위에 덧씌우려 했다.
그러니, 그날의 폭발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내가 뭘 해도, 부족한 것만 본다고요.”
그 말은 내 안 어딘가를 깊숙이 찔렀다.
나는 무너졌고,
처음으로 ‘진짜 사과’를 했다.
긴 설명도, 핑계도 없이.
말 그대로의 미안함을 담아.
“엄마가 너를, 내 기준으로 자꾸 재려 했던 것 같아.
진심으로 미안하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없었지만,
그 눈빛엔 오래 묶여 있던 매듭이 한 가닥쯤 풀려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마음속 다짐을 했다.
아들의 인생은 그 아이의 것.
나는 조언이 아닌 응원을 하기로 했다.
기대가 아닌 믿음으로,
교정이 아닌 지지로.
가끔은 생각한다.
그 말이, 그 절규가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나의 잣대 안에
아들을 가두고 있었을 것이다.
“귀에서 피날 지경”이라는 그 날카로운 말.
그것이 나를 깨우고, 나를 무너뜨리고,
나를 다시 엄마로 돌아오게 했다.
이제야 알겠다.
엄마는 늘 옳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옳음 대신 아이 곁에 남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