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에 길고양이가 살았었다. 나는 그 아이를 얼룩이라 불렀고 남편인 듯한 아이가 가끔 찾아오니 그 아이는 덜룩이다. 예상치도 못한 만남이니 설레고 행복하다. 예쁜 여학생이 버스 옆자리에 앉는 행운 같은 거라고나 할까. 얼룩이 부부를 위해 밥과 물을 주었으나 얼룩이는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 마당에 내려갈 때마다 도망친다. 서운했지만 아주 서운한 건 아니다. 얼룩이는 도망가지만 멀리 도망가진 않는다.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곤 내가 밥과 물을 채워 넣는 것을 보고 있으니 내게 고마운 마음도 생겼으리라. 여학생이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고개를 돌려 나를 한 번 쳐다봐준 셈이다. 얼룩이와 덜룩이는 새끼 다섯 마리를 낳았으나 얼마 되지 않아 얼룩이가 죽었고, 새끼 두 마리가 죽었고, 나는 또 한 번 죽음의 두려움과 이별의 슬픔을 겪어야 했다. 아무리 길 고양이의 숙명이라지만 마음이 많이 무거웠다. 이럴 거면 차라리 나타나지 말 것을 왜 내게 즐거움을 선물하고는 죽음과 이별로 복수한단 말인가.
한 달쯤 전인가. 마당에 내려가니 부스럭하며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마당에 놓아둔 작은 종이 박스 속에서 검은색과 흰색이 섞인 고양이가 튀어나왔는데 그 뒤에는 작고 귀여운 새끼 고양이 세 마리가 있었다. 또 우리 집 마당에서 새끼를 낳은 건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출산 한 뒤 이곳으로 데려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불현듯 얼룩이가 낳은 새끼 들 중 하나란 생각이 들었다. 새끼가 살아남아 어른이 되었고 다시 새끼를 낳게 되자 자신이 태어난 집으로 찾아온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룩이 죽음 이후 잊혔던 밥그릇, 물그릇을 잘 닦아 사료와 물을 채워주었다. 그런데 다음 날 보니 고양이들이 없다. 아마도 내가 나타나 엄마 고양이는 이곳이 안전하지 않다고 여겼나 보다. 서운했지만 어쩌겠나. 새끼들을 보호하려는 엄마의 선택인데. 난 너희를 해치지 않아. 밥도 주고 깨끗한 물도 주고 너희들이 잘 지내기를 바라는 거란다. 내 마음이 전해지지 않는다.
밤새 아기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 일찍 나가보니 새끼 한 마리가 주차장과 옆 집 사이에서 계속 울고 있다. 엄마를 찾는 울음이겠지. 왜 엄마와 떨어졌을까. 새끼가 그렇게 울어대는데 엄마 고양이는 나타나질 않는다. 야생에서는 어미가 생존 가능성이 약한 새끼를 버리는 일이 있지만, 새끼는 겨우 세 마리고 울고 있는 새끼가 살 수 없을 정도로 약하거나 다친 것도 아닌데 왜 어미는 밤새 울고 있는 새끼를 데려가지 않는 건지. 또 마음이 아프다.
마당에 어미가 새끼들을 데리고 다시 나타났다. 그런데 새끼가 두 마리다. 밤새 울어대던 그 아이는 결국 엄마와도 형제들과도 같이 하지 못했다. 어디선가 두려워하고 외로워하면서 슬프게 죽었을 것이다. 자연의 섭리도 짐승의 마음도 알 수가 없다. 우리 집 마당은 아이들이 지내기에 최적의 장소다. 화단이 있고 계단이 있고 낙엽이 가득하니 놀이터로 적당하다. 내가 밥과 물을 주니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다른 고양이들이나 혹은 위험한 짐승들도 없다. 새끼 두 마리가 엄마와 함께 장난치고 노는 모습을 보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지. 불안한 행복.
잡초와 낙엽을 치우느라 마당을 청소하다 그랬는지 쯔쯔가무시 병에 걸려 일주일 입원을 했다. 전화도 면회도 없던 아내가 전화를 했다. 여보, 새끼 한 마리가 죽은 거 같아. 화단 구석에 있는데 난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당신이 와서 좀 봐. 그리고 끊었다. 몸은 좀 어떠냐는 말 한마디도 없었다. 서운했지만 어쩌겠나. 아내에게 난 그런 존재인 것을.
퇴원하자마자 마당에 나가보니 새끼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길 고양이의 숙명이다. 치명적인 바이러스 같은 것에 감염되었을까. 새끼가 세 마리였는데 이젠 한 마리만 남았다. 내 마음이 이렇게 무거울진대 엄마 고양이의 마음은 어떨까. 짐승은 사람보다 마음이 깊다. 사람이면 울고 불고 난리를 쳤겠지만, 짐승은 죽음과 이별에 의연하다. 마음속 깊은 돌덩이가 된 이별과 죽음의 슬픔을 묵묵히 버텨낼 뿐이다. 새끼는 엄마한테서 떨어지질 않는다. 같이 장난치고 놀던 형제들이 다 사라진 것을 새끼 고양이는 어떻게 감내할까. 마지막 새끼 고양이가 건강히 잘 자라야 하니 불안하다.
엄마와 새끼는 마당 창고 안에서 지낸다. 밥과 물을 주려 내려가면 새끼는 도망가고 엄마는 날 쳐다보면서 하악질을 한다. 이 놈아 밥 주는 거야. 너희들 밥 주는 사람이라고. 이 아이들이 언제쯤 날 알아줄까. 나한테 인상 쓰고 대들지만 사실은 내가 너희들을 지켜주는 좋은 사람이란 걸 알고 있다는 걸 안다고 이놈아.
불길하다. 어제부터 고양이들이 보이질 않는다. 밥도 줄지 않는다. 그럼 무슨 문제가 생긴 거다. 얼룩이가 죽을 때도 그랬다. 반복되는 슬픔인가 가슴 졸이던 중, 엄마 고양이가 다시 나타났다. 그런데 새끼가 보이질 않는다. 늘 엄마를 따라다니던 아이인데 왜 엄마만 온 건지. 다시 불안하다. 어디선가 마지막 남은 새끼가 죽은 거다. 고래 힘줄보다 질긴 생명들이 많건만 왜 내가 만난 생명들은 이리 쉽게 죽는 건가.
마당에 검고 흰 놈이 보인다. 또 어미 혼자다. 새끼는 정말 죽었구나. 마음이 포기되고 무겁다. 그런데, 갑자기 마당이 활발해졌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내려다보니 새끼 고양이가 무슨 벌레를 가지고 노는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난리법석이다. 얼마나 반가운지. 얼마나 안심인지. 새끼가 노는 모습을 한참이나 쳐다본다. 반갑다. 감사하다. 행복하다. 다행이다. 그리고 웃음이 나온다. 불안한 웃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