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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연 May 15. 2023

모든 이에게 통하는 명제는 없다. 그래서 물으러 간다

 

 모든 이에게 통하는 명제는 없다.


 우리의 인생은 프렉탈 이론과 같다.  불규칙적으로 보이지만 규칙적이고, 복잡하지만 일정한 패턴이 있으며, 이러한 패턴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부분이 전체가 되기도 하고, 전체가 부분이 되기도 하며, 전체와 부분이 일치하기도 한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 그래서 우주의 법칙은 인과의 법칙이다. 한 개인의 부분 부분을 관찰하다 보면 그 사람 운명의 큰 틀이 보이기도 하고, 큰 틀을 보면 작은 것이 보이기도 한다.


 인생에서 그냥 일어난 일은 없다. 어떤 식으로든 다 연결된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 의지의 한계점에서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남보다 더 많이 더 열심히 노력해도 이상하게 보상이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고, 그보다 덜한 노력에도 쉽게 성과를 이루는 사람도 있다. 인간의 의지로 통제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나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있음을 알아차릴 때 내 운이, 내 운명이 ‘억수로’ 궁금해진다.

알 수 없는 그 뭔가는 종교도 내려놓게 만든다. 그래서 물으러 간다. 그럼에도 해결되지 않은 답답함이 시간이 지날수록 쌓인다.      


 왜 그럴까. 그것은 원인을 모르기 때문이다. 결과만 있고 원인을 모르니 답답해서 찾아다니는 것이다. 캄캄한 밤에 길을 걷다가 넘어진 사람이 있다고 치자. 왜 넘어졌냐고 물으면 ‘밤이라서 그렇다’가 원인이다. 밤이라는 환경적 요인이 있으므로 넘어져 다쳐도 그렇게 억울하지도 괴롭지도 않다. 원인을 알고 나면 더 이상 궁금하지도 답답하지도 않다. 밤이라는 명확한 원인이 있고,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밤에 밖으로 나가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그것은 개인의 의지이다. 환경이란 내 의지에 따라 뭔가를 이루려고 할 때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이다. 고로 환경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조건이고 외출의 여부는 개인의 의지에 달려있다.    


 왜 정답인 것 같은 조언들이 개별적으로 적용하면 맞지 않는 걸까. 그것은 사람마다 기질이 다르고 운이 다르기 때문이다. 운이란 꽃이 피는 때이고 그러한 조건이 잘 갖추어진 환경이 되었을 때라야 온다.



 어느 봄날 국화는 환호하는 장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신세 한탄을 하며 멀거니 바라만 보고 있었. '조만간 나도 꽃이 피겠지'라는 희망을 품고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날 너무 답답한 나머지 운명학자를 찾아갔.


 “저도 꽃이 피긴 피나요?”

 “당연히 피지요. 명색이 꽃인데."


 "언제 피나요?"

 "조금만 기다려 봐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지금은 장미가 부럽겠지만 무작정 기다리라는 것은 아네요. 물과 영양분을 적당히 섭취하고, 햇빛도 즐기고, 바람도 쐬면서 내실을 가꾸는 것이 어떨까요? 그러면 누구보다 훌륭한 꽃을 피울 수 있을 거예요."



 누구나 다 때가 있다.


 때 즉 운은 결국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자연의 어떤 큰 흐름을 말한다. 국화는 개나리나 장미가 잘 나갈 때 좌절한다. 답답해서 점(占)이라도 보고 싶어 진다. 봄과 여름의 지난한 세월이 지나고 남들이 별 볼일 없을 때 주변을 감탄케 한다. 대기만성형이다. 국화에게 봄과 여름은 꽃피울 환경이 아니었던 것이다. 국화도 봄에 꽃을 피우고 싶지만 때가 아니었다. 운이 아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우리에게는 아는 만큼만 볼 수 있는 능력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래전 우주의 존재를 모르고 지구가 전부인 줄 알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물으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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