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저녁을 먹으며 큰딸이 낮에 은행에서 만났던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딸아이는 대학 졸업 후 다른 공부를 하기 위해 파트타임으로 학업과 일을 병행하면서 원하는 일까지
찾느라 바쁜와중에도 늘 Job market에 촉각이 곤두서있다.
은행이나 어디서든 줄 서있는 사람들이 지루함을 잊기 위해 이런저런 스몰톡을 하는 거야 늘 있는 일이지만,
딸아이와 이야기했던 아주 친절한 중년여성은 몇 마디의 대화로 단번에 딸아이의 어려운 처지를 읽어냈던 것 같다. 열심히 살고 있는 딸아이를 자기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며 명함도 주고 서로의 연락처까지 나누고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약간의 기대감까지 보이며, 우리에게 털어놓았다.
남편과 나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낯선 사람들에 대해서 근거 없는 경계심이
아직 장착되어있지 않은 그리고 아직 아름다운 사회에 살고 있는 딸아이에게 우리가 느끼는 불안감을 표현하는 게 맞을지 아닐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 그냥 '낯선 사람들과 연락처를 주고받는 건 좀 신중하게 생각해라...' 정도로만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런데 며칠 후 딸아이는 그 친절했던 여인의 실체를 알게 됐고 허탈한 마음을 우리에게 전했다.
그날 받은 명함의 회사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미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다단계' 회사의 명함
이었고 이 허탈한 이야기를 친구들과 나누다 보니 똑같은 경험을 했던 지인들이 한둘이 아니었단다.
요즘 경기가 안 좋아져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이 다단계사업이 생각보다 더 확장이 많이 되어서 그런 건지
미국도 이 사람들이 곳곳에서 활동을 하며 길거리캐스팅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전통적이고 저변확대가 많이 되어있는 길거리 캐스팅은 ‘도를 아십니까’ 아닐까?
이 ‘도쟁이’ 들이 한동안 사회문제가 되고 매스컴에서도 이문제를 많이 다루었기 때문에 지금은 다 없어진 줄 알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에 살고 있을 때 나는 이 ‘도쟁이’ 들의 단골 타깃이었다.
버스터미널이나 역 주변, 시장등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출몰하는 이들은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늘 용하게도 나를 선택해서 인상이 좋다는 덕담을 건네기도 하고, 내 맑은 ‘영’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하고
어수룩하게 길을 물어보며 말을 걸기도 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퇴근 후 종로에 있는 외국어학원을 다녔는데 종로통의 그 수많은 인파를 뚫고 내게 말을 건네는 그 ‘도쟁이’들을 거의 매일 보면서 나도 나름 그들을 구별하는 능력이 생겼다.
누군가 갸륵한 눈빛으로 내게 다가오면, 일단 무시하고 피했다
낯선 사람이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평온한 얼굴로 ‘저기 …’ 하면서 다가오면 또 피했다.
두 사람이 짝을 지어 미소 띤 얼굴로 나를 향해 직진해 다가오면 그것도 피했다.
그렇게 사람들 많은 곳에 가면 나도 자동으로 촉을 세워서 다니다 보니 그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잘 피해서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몇 해 전 오랜만의 한국방문 중에 친구와 종로 교보문고에서 약속이 있어서 전철역에서
나와 급하게 길을 걷고 있었다. 어느 남녀 커플이 자연스레 다가와서 ‘조계사’ 가는 길을 물었다.
아, 조계사는 내가 아는 곳이지만 오래전 기억이라 가물가물 했다.
대충 방향을 알려주고 나도 확실치 않으니 그쪽에 가서 다시 한번 물어보라 친절히 일러주었다.
그들은 내가 가르쳐준 길에는 관심이 없이 “ 어머, 여기 안 사시나 봐요. 어디 멀리서 오셨어요?”
하며 내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느낌이 쎄 하다… 순간 정신이 들며 … 그들이다! 감이 왔다.
이런저런 말을 붙이는 그들을 무시하고 돌아서 가던 길을 가는데 한숨이 나왔다.
아… 내가 또 걸리다니… 오랜만에 왔더니 감이 없어졌네… 자괴감 마저 들었다.
친구들을 만난 후 숙소가 있는 영등포역으로 가서 숙소 쪽으로 걷고 있는데 저 앞에서 얌전하게
차려입은 평온한 얼굴의 여자가 미소를 지으며 또 말을 건다 ‘저기… 잠깐만…’ 오늘만 두 번째다.
뭐가 문제일까? 이쯤 되면 내가 문제가 있는 거 같았다.
눈 한번 굴리고 여자를 지나치면서 길가에 있는 윈도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나?
길거리에 지나가는 다른 여자들을 보았다, 표정이 참 야무지다.
숙소에 돌아와서 친구들과 통화하면서 낮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니 친구들이 막 웃는다.
친구들 말이, 길 걸을 때 입을 좀 앙 다물고 눈에도 힘을 좀 주고 걸으란다.
입 벌리고 풀린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도 말고… 다가오는 사람들에게는 눈으로 레이저도 좀 쏘고…
길을 걸을 때마저도 만만해 보이지 않게 긴장해서 걸어야 했나 보다.
동네에 자주 나가는 산책코스가 몇 군데 있다.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주택가를 한 바퀴 돌기도 하고, 좀 멀리 작은 호수가 있는 곳까지 연결돼 있는 Walking trail을 걷기도 하고 가끔은 마켓을 가거나 커피를 사기 위해 큰길 쪽으로 나가 걷기도 했지만 큰길 쪽에서
몇 번 안 좋은 일을 당한 후 이제 그쪽으로는 되도록이면 혼자 걷지는 않는다.
찻길 바로 옆에 있는 인도를 걷는데 차가 가는 방향으로 걷다 보니 차 운전자들은 내 뒷모습만 보이고 나도
나를 지나치는 차들의 뒷부분만 보게 된다.
어느 날 길을 걷고 있는데 지나가는 차 안에서 틴에이져로 보이는 몇 명이 내게 고함을 치며 지나갔다.
순간 너무 놀랬지만 차는 순식간에 지나가버려서 어찌해 볼 도리도 없이 당하고 말았다.
그 후 그런 일이 몇 번 더 있었고, 심지어 모터사이클을 타고 지나가면서도 ‘악’ 하다못해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도 내게 소리를 지르고 도망을 갔다.
동네 탓을 하기에는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범죄율도 낮고 학군도 평균이상을 유지하고 있고
한밤중에도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비교적 안전한 동네이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다른
지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아무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또 내가 문제인가?
나는 뒷모습마저도 만만한가?
한 번은 운전을 하다가 신호에 걸려서 길에 서있는데 옆에 큰 버스가 나란히 섰다.
버스 창밖으로 삐죽삐죽 고개를 내민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또 내게 한 마디씩 던진다.
마지막으로 내가 들은 말은 ‘I love you’ 운전하다 연하에게 고백받아보기는 또 처음이다.
운전하는 내 모습도 만만한가?
우리 애들은 어릴 때 자기들 깨우러 오는 내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무서웠다고 했는데…
큰딸아이의 다단계 길거리 캐스팅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내 옛날이야기가 생각나서 아이에게
‘도쟁이’ 이야기를 해주며 엄마도 네 나이 때 늘 길거리 캐스팅을 당했는데 너마저…… 하니
사실 그전에도 비슷하게 길거리에서 영업하는 사람들이 자주 말을 걸었다고 고백을 했다.
누구 탓을 할까, 남편도 주유소에서 기름 넣다가 만난 사람에게 이태리산 ‘고급’ 재킷을 큰돈 주고
사 온 적이 있다. 뭐에 씌었는지 이태리산이라고 하며 보여준 재킷단추에 ‘Italy’라고 쓰여있는
글자가 너무 믿음이 가서 ATM까지 가서 캐시를 뽑아 그 재킷을 두벌이나 사 왔다.
그 이야기는 너무 창피해서 아이들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큰딸의 고백을 듣고 털어놓았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
이 만만한 피는 물려받지 않았으면 했는데 내 뜻대로 되면 인생이 아니지…
아이들을 보면 이 세상에서 상처받지 말고 말랑말랑한 인생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과 상처를 딛고
훈장 같은 굳은살을 달고 살았으면 하는 두 가지 마음이 늘 공존한다.
만만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가끔 좀 벅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