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할배>의 나영석PD의 경우에는 새로운 기획이 중요하니 아이디어 회의를 자주 할 수밖에 없다. 나영석PD는 회의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기 위한 자리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래서 참가자들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카페나 식당 등에서 자연스럽게 사전 미팅을 진행하곤 한다. 딱딱한 회의실에서보다 그런 곳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데에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회의 내용에 자신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일부러 회의 테이블의 제일 구석자리에 앉는다고도 한다.
사실 인간은 환경에 지배를 받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이처럼 사소한 차이가 특별함을 만든다. 공간의 분위기나 레이아웃이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주는 사례는 너무나 많다. 높은 천장과 열린 공간의 사무실은 창의적인 사고를 하는 직종에 어울린다거나, 법원에서 재판장들이 앉는 판사석을 일부러 한 단 높게 만들어서 재판에 출석하는 사람들이 자연히 우러러보게 만드는 것으로 재판정의 권위를 느끼게 한다거나 하는 게 다 그런 이유에서 비롯한 것이다.
우리의 일터 역시, 일하는 시간 동안에 자주 제대로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는 것은 업무의 성과를 내기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몰입(flow)이란, 주변의 시간의 흐름과 별개로 특정한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업무에 있어서도 온전히 몰입하는 경험을 하는 게 가능하다. 몰입이 된 상태는 시간의 물리적인 흐름과 상관없이 물아일체의 경지로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더 높은 성과가 나곤 한다.
나는 업무 환경에 있어서 공간과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직원들이 업무적으로 몰입하기에 유리한 환경을 갖추도록 노력하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라고 믿는다.
최근 들어서 사무실 환경 역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많은 기업들이 라운지나 사내 카페 등을 만들어서, 가벼운 회의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한다. 층마다 수면실을 만들거나 안마의자를 배치하기도 하고, 전화통화를 위해서 방음이 잘 되는 1인실 폰부스를 만들어 놓기도 한다.
사무실의 레이아웃도 시대 별로 업무 스타일에 따라서 변경되어 왔는데, 요즘 많은 기업들이 사무실 환경 디자인을 위해서 '동굴과 캠프파이어', 이 두 가지를 고려한다고 한다. 이 '동굴과 캠프파이어' 컨셉이 가장 잘 표현된 사무실이 영화 <인턴>에 나오는 사무실이기도 하다. 많은 직원들이 오픈된 공간에서 자유롭게 개인적인 일을 한다. 공간의 가운데에 위치한 회의실 역시 사방이 투명한 유리벽면으로 되어 있어서, 어떤 멤버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있는지가 자연스럽게 공유가 된다. 물론, 비밀이 유지되어야 하는 사안을 논의할 때에는 버티컬 등으로 시선을 차단한다.
우리들은 자신만의 동굴에서 각자 집중해서 일을 처리한다. 동굴은 독립적으로 일할 수 있는 공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어차피 모든 업무는 개인차원에서 신중하게 접근해야할 필요가 있다. 때로는 혼자만의 깊은 사고를 통해 여럿이 무의미한 회의를 할 때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를 도출해내기도 한다.
한편, 캠프파이어란, 함께 모여서 공동체적인 활동을 하는 장소를 의미한다. 이런 곳은 조직원간의 소셜라이징, 즉 조직 구성원들이 자연스레 얼굴을 마주치고 부딪혀서 말 그대로 '우연에 의한 행운(serendipity)'를 가져오기를 기대한다. 같은 팀의 팀원들 뿐 아니라 다른 소속의 구성원들과도 자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전혀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가 도출될 수도 있고, 모르던 정보를 교환함으로써 서로의 업무에도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다.
앞서 공간이 조직원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사무실 공간이 보통 완벽하게 소음이나 시선이 차단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의 대화를 본의 아니게 들을 수 있고, 서로의 모니터를 우연히 쳐다볼 수 있다고 할 지라도 업무에 대한 대화는 그런 식으로 우연적인 만남으로 진행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전 상사 R은 본인이 전화통화를 하고 난 뒤에, 꼭 우리를 향하며 “들었지?”라고 확인을 하곤 했다.
'그렇지. 우리는 R이 전화통화를 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지. 아, 근데 우리는 대화 내용의 절반 가량 밖에는 듣지 못한 상황인데, 뭘 들었단 말인지 헷갈린다.'
그렇게 우리가 대화를 들었는지 확인하고 난 뒤에는 R은 이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 채로 관련한 일을 시키곤 했다. R은 우리가 본인의 대화를 안 들으면, 짜증스러운 말투로 '왜 전화 통화를 듣지 않았냐'고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직원들이 몰입하여 각자 주어진 일을 하고 있는데, 그게 왜 R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전화 통화는 상대방과 나누는 사적인 대화이다. 업무와 관련한 통화라고 해도, 그게 컨퍼런스콜이 아닌 이상은 둘만의 대화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둘이 하는 대화 중에서 한 사람의 대화 내용은 철저하게 가려진 상태에서, 대화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이 엿들은 절반의 내용을 바탕으로 일을 진행하길 바란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절반 이상의 의사 결정과 관련해서는 그저 상상력을 동원해서 일을 하라는 소리인 건가?
상사들만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 아니었다. 다른 조직에 있을 때였다. 새로 들어온 팀원 S가 R과 비슷한 행동을 해서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S는 누군가와 한참 전화 통화를 하고 난 뒤에, 나에게 물어봤다.
"팀장님, 혹시 들으셨겠지만.... "
순간 매우 당황했다. 나는 파티션으로 구분되어 있는 독립된 공간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들으려고 한다고 해도 사실 S의 통화 내용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의 대화를 듣는 게 그리 달갑지 않다.
"응, 나는 전화 내용은 못 들었는데. 내 자리로 와서 어떤 이야기인지 얘기해 줄래?”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의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공감대를 만드는 것부터 변화는 시작된다. 일터에서의 ‘적절한 독립성과 유희’라는 컨셉이라면, 모두가 만족스러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