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나는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업무에 대한 아이디어도 술술 풀리고, 동료들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고, 출퇴근을 하는 중에도 특별히 도로 위의 '빌런'을 만나지 않고 꽉 막힌 도로에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건사고가 없는 평탄한 날들이 수일 동안 계속되는 날들 말이다. 그럴 때의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거슬리는 행동을 해도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물론 잠들기 직전에 잠시 불쾌했던 기억이 나긴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나의 하루가 영향을 받는 일은 드문 편이다.
이렇게 대체로 좋은 기분으로 지내다가도 외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로 인해, 갑자기 나의 심기가 틀어지려고 할 때가 있다. 갑자기 회사의 동료가 나에게 짜증을 낸다거나, 나에게 일을 떠민다던가, 회의 중에 공개적으로 화를 내면서 예민하게 군다거나 이런 상황들이 연이어 벌어지는 날들 말이다. 이런 하루를 보내고 나면, 나는 쉽사리 탈진하게 된다.
우리 회사는 협력업체 K와 일을 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K측과의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는 건 A였다. 업무 초기에는 A가 K와의 업무 진행과 관련해서 나에게 여러 가지 도움을 요청해서, 관련 업무를 여러 번 처리해줬다. 하지만, 결국 K와의 업무는 A의 담당이었다. K가 제공하는 결과물을 전달받아야 다른 업무들을 진행할 수가 있는데, 커뮤니케이션은 쉽지 않았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결과물에 대해서도 별로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문제는 오랜 시간 기다려서 그들이 전달해준 결과물을 열어보려고 해도, 파일이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아무리 해도 정상적으로 열어볼 수가 없었다. 프로젝트의 마감 기일이 정해져 있는데, 해당 문제로 인해서 시간이 자꾸만 흐르고 있었다.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으니 수정도 필요한 상황이고, K가 제공하는 파일이 있어야만 자신들의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B와 C가 얼마나 답답할지 이해가 갔다.
점심식사를 하고 왔는데, B가 나를 불렀다.
"팀장님, K랑 일 계속하는 거에요? A가 지금 저한테 K가 전달해준 파일을 열어보고, 문제가 있는 확인 해 달라고 하는데요. 문제가 있으면, 어떤 부분이 문제인지까지 확인해서 알려달라고 하는데, 이걸 내가 왜 해야 하는 거에요?"
"아, A가 그랬나요? 그런데, 그 파일을 쓸 사람이 당신이니까 확인해 보라고 한 거 같은데요."
B의 자리에서 모니터를 보니, 딱 봐도 문제가 있어 보였다.
"아니, 뭐 하나하나 뜯어보면 어떤 문제인지 알 수는 있을 거 같은데, 왜 나한테 하라고 했는지 모르겠는데?"
"우리는 프로그램이 없어서 파일을 열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어떤 문제인지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신밖에 없어서 그런 거 같아요. 일단, 문제 되는 화면을 캡처해주시고요. 지금 저한테 해당 내용 설명해 주세요. 제가 같이 정리해 드릴게요."
이런! 깊게 생각해 보지도 않고, 나는 문제 해결에 집중하다 보니 A가 B에게 시킨 일을 내가 한다고 말해 버린 것이다. 나는 B의 의견을 정리해서 K에 보낼 문서를 완성한 뒤에 예정되어 있던 회의에서 같이 논의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점심식사를 하러 가기 전에 A가 앞으로 프로젝트를 어떻게 진행할지 회의를 하자고 했었다. 우리는 다 함께 회의실에 모였다. 그런데, B가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다. 좀 기다려 보다가, 곧 들어오겠지 싶어서 일단 이야기를 시작했다. 잠시 후에 B가 다른 동료와 함께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게 보였다.
그 찰나에 B를 불러서 회의실에 들어오라고 했어야 했다. A가 K가 전달해준 파일은 변환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 더 이상 수정을 요청하는 건 어렵다 등의 이유를 이야기하면서, 이 내용을 전달할 수 없다며 화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짜증이 났다. K사의 업무에 대한 무책임함은 물론이고, A가 그동안 수개월에 걸쳐서 K를 옹호해 왔을 뿐 아니라, 이제는 동료인 나를 비난하는 듯한 태도까지도 말이다.
'아니, 오류에 대해서 파악해 달라고 B에게 시킨 거 아니었나?'
잠시 후에 사무실로 돌아오는 B를 보고, 나는 회의에 참여해 달라고 말했다. 이야기를 일단 마무리하고 회의를 끝낸 뒤, 나는 A에게 따로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그 파일을 확인하는 일이 내 일이었나요? 당신이 시킨 일인데, B가 나에게 짜증을 부려서 내가 대신해준 거예요. 내가 그 파일을 보고 의견을 낸 게 아니라, B가 이야기한 내용을 정리한 거예요. 근데, B는 정작 회의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당신은 이야기하는 내내 저의 상사이기보다는 K사의 대변인 같은데요."
A와 이야기를 나눈 뒤에, 다시 관련자들을 불러서 회의를 재개했다.
회사에서 이런 일을 겪고 나면, 내가 어쩌자고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려서 고난을 자처한 건가 싶어서 후회막급이다. 솔직히 회사뿐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정이 다 떨어진다. 난데없이 나에게 짜증을 부린 B도, 자신의 업무 성과에 대해 내가 지적하는 것처럼 느껴서 나한테 화를 냈을 A도 싫어진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내 업무 영역 외의 일까지 한 내가 잘못인데 말이다.
또 다른 회사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기획 일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디자이너들과 소통하게 된다. 나보다 경험이 적은 디자이너들이라면, 아무래도 프로젝트가 효율적으로 진행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의 업무를 많이 봐주고, 도와주게 된다. 문제는 내가 디자이너들과 잘 지내고, 디자이너들도 나를 의지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대표였던 H가 질투 비슷한 감정을 가진 것 같다. 나는 사람들을 일단은 믿어보려고 한다. 하지만, 소위 정치적이고 약삭빠른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다. 도가 지나칠 만큼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젊은 디자이너들의 모습에 질려 버렸다. 그럴 때 살짝 후회가 된다. 왜 나는 그냥 못 본 척 내 일만 하면 안 되는 건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사실 그건 과도한 책임감 때문이다.
회사의 성공, 상품/서비스의 성공, 팀의 성공, 개인의 성공. 이런 것들을 어떻게 칼같이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 회사는 협력을 기반으로 운영이 되기 때문에, 어느 한 파트의 실력이 떨어지거나 효율적으로 진행되지 않으면, 전체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동료 간에 서로 협조적으로 일을 하는 건 당연하다. 내 일을 정확하게 끝마치는 것은 기본이고, 서로의 일이 유기적으로 진행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경험과 열정이 저마다 다른 팀원들이 모인 경우, 특히 각각 서로 다른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경우에는, 누군가는 커뮤니케이션을 비롯해서 소위 잡일을 계속해야 한다. 그래서 내가 일을 하면서, 가장 싫어하는 게 바로 다른 사람의 일을 대신해주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팀장이기 때문에, 때로는 PM이나 기획자이기 때문에 그러한 역할까지 간혹 떠맡게 되는 것 같다.
MBTI 테스트가 완벽하진 않겠지만, 일하기 전후의 테스트 결과를 비교해 보면 신기할 때가 있다. 기본적으로 나의 성향은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게 아닌, 종이로 된 테스트를 진행할 경우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온라인으로 하는 '16 personalities 테스트'의 경우에는 간혹 결과가 다르게 나올 때가 있다. 결과를 살펴보면, 일터에서의 경험이 나의 타고난 성향까지도 일부 바꿔 놓았음을 인정하게 된다.
S(감각형)과 N(직관형), J(판단형)과 P(인식형)에 있어서는 크게 바뀜이 없다. 하지만, 에너지의 방향을 뜻하는 E(외향형)와 I(내향형), 의사결정의 기준을 의미하는 T(사고형)와 F(감정형)에 대한 결과는 종종 다르게 나오기 때문이다.
S는 미래에 대한 비전에 집중하는 N에 비하여, 좀 더 직접 경험한 사실을 믿는다. 그래서 ES의 성향은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본인이 앞장서서 실천하는 스타일이다. 업무 중에 문제를 마주하게 되면, 주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는 타입이기도 하다. IS의 경우에는 ES와 마찬가지로 책임감이 높은 편이지만, 관계 지향적인 특징이 있다. 주로 일 자체보다는 사람에 대한 책임감이 발휘된다고 한다. 즉, '내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사람들을 잘 챙기는 스타일이다. 주변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고, ES에 비해서 섬세하게 접근하려고 애쓴다.
J는 한번 결정한 사항에 대해서 되도록 변경하지 않고 끝까지 추구하는 성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다양한 해결책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려고 애쓰는 편이다. TJ와 FJ의 차이는 객관적으로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리려고 하는 노력과 좀 더 주변 상황을 고려하고, 사람들이 어떤 의견을 내놓는 지를 고려해서 의사결정을 내리려고 하는 노력의 차이를 의미한다.
이런 성향의 변화를 보면, 일터에서의 관계를 위한 부단한 나의 노력이 반영된 건가 싶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러한 변화가 별로 반갑지는 않을 때도 있다. 알고 보면, 단순히 나의 타고난 성향대로만 지낼 수 없는 게 직장생활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