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는 어디에
봄이 왔다. 늘 잔인한 계절이었다. 나는 아름다워지고 싶었다. 나도 사랑받기에 합당한 무언가 가치를 찾고 싶었다. 내 안의 거인은 내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해주지만, 무언가 부족한 것 같았다. 아니 정말 나는 부족했다.
여름이 다가온다. 호텔의 성수기, 이제 교육이 끝나고 그 "최대리"는 돌아갈 것이다. 그는 "안녕"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여름은 곧 끝날 테고, 여름이 끝나면 가을이 온다. 그리고 가을에는 다시 교육이 있겠지? 그리고 다시 만나게 되겠지?
나는 늘 같은 스케줄로 근무하니, 혹시 프런트 데스크로 전화를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무슨 말을 할까? 그의 전화 목소리는 어떠할까? 여름 내내 나는 전화를 기다렸다. 그리고 전화는 오지 않았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나를 생각하는 것은 그의 일이라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그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던 것이다.
호텔은 성수기에 예약을 10% 초과로 받아 둔다. 캔슬하거나 정해진 체크인 시간까지 도착하지 못하는 손님(no show)을 미리 고려해서, 객실 공실률을 낮추기 위해서 이다. 그러나, 그해 여름은 예약한 손님들이 모두 도착해서 프런트 데스크가 전쟁터였다. 방은 없고, 근처에 방을 구하러 계속 전화하고, 먼 길 온 지친 손님들에게 배가 부르도록 쌍욕을 먹고, 직원들 숙소마저 짐 빼고 치우고, 직원들에게도 욕먹고 그랬다. 어쩌면 다행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나마 그 "최대리"가 전화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견뎌 냈다.
성수기 마지막 날, 오늘 교대하고 나면 드디어 1주일 휴가이다. 그리고 이제 곧 가을이고, 곧 그 "최대리"를 만나겠지? 9시 교대인데, 10시가 넘었는데 교대해야 하는 아이가 오질 않는다. 피곤한데, 잠이 쏟아지는데, 그런데 저기서 그 "최대리"가 보인다. 너무 보고 싶어서 환영이 보이는 걸까? 비슷한 사람이겠지? 점점 가까이 온다. 아 이럴 수가, 그다.
"안녕하세요? 김주임님. 여름에 엄청 고생하셨나 봐요? 원래도 마르셨는데, 살이 더 많이 빠졌네요? 저 오늘 예약인데 좀 일찍 도착했어요. 혹시 미리 체크인할 수 있을까요?" 아.. 멍하다. 눈만 껌뻑이고 있는데 갑자기 그는 조그맣한 여자아이를 안아 올렸다. "아빠 나 쉬"라고는 하는 그 여자아이는 그 "최대리"를 쏙 빼다 박았다. 그러고 보니, 그는 늘 반지를 하고 있었다. 아 너무 부끄러웠다. 내가 그동안 혼자서 무슨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거지? 울면 안 된다. 여기서 울면 안 된다. 절대 울어서는 안 된다.
"언니, 늦어서 미안해요. 아 최대리 님 오늘 예약이시죠? 일찍 오셨네요? 어머 사모님 미인이세요." 다행이다. 정말 딱 맞춰서 교대할 직원이 왔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빨리 자리를 피했다. "안녕"이라는 인사를 못 한채.
눈물이 마구 났다. 뛰었다. 겨우 나의 아지트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는 곳, 별관 옥상. 담배를 꺼내고 불을 붙이려고 했으나 손이 덜덜 떨려서 제대로 갖다 댈 수가 없다. 그때 누군가 와서 라이터를 들고 가더니 담배에 불을 붙여 준다. 그다.
"김주임, 아직 담배 안 끊었구나. 전에 끊는다 더니, 하긴 여름에는 너무 힘들어서 이거라도 있어야 했겠지? 저, 여름 동안 전화하고 싶었는데 말이야. 바쁜 거 아니깐 못 하겠더라고"
그는, 그 "최대리"는 갑자기 반말이다. 손에 들고만 있던 담배를 그가 가져가 바닥에 비벼 껐다. 내 팔을 움겨잡았다. 아프다. 그의 향기가 코 끝을 스치고 지나간다. 문득 그의 눈을 보았다. 그 조용하면서 서늘한 느낌. 영혼이 사라진 눈빛. 나는 그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미술대회가 떠올랐다. 그때도 그런 느낌이었다. 영혼이 사라진, 조용하면서 서늘한 느낌. 초등학교 5학년 때 골목길에서 봤던 바바리 맨, 소리 없이 웃고 있는데 영혼이 없는 눈빛, 그 서늘함. 중학생 때 만원 지하철에서 허벅지 사이를 헤집던 손, 그 손을 따라 올라가서 마주한 그 얼굴. 영혼을 느낄 수 없는 눈빛, 무표정한 서늘함, 나를 향해 있으나 나를 보지 않는 눈길. 고등학교 때 속옷 선에 정확히 맞춰 지그시 누르던 손의 영어 선생님. 아니지 그냥 교사지. 선생님이라 할 수가 없지.
여기를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내가 강하게 하면 그가 더 강하게 나올 것이라는 것을, 내가 싫다고 해도 내 말을 듣지 않으리라는 것을, 소리를 질러봐야 나만 이상한 여자가 되리라는 것을. 나는 애걸했다. 사정했다. 호소했다. 지금은 힘들다. 오늘 밤에 여기서 다시 보자고 그렇게 시간을 끌고 우선 장소를 벗어나야 했다. 아니 어쩌면 밤에 그를 다시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낮의 햇살이 너무 눈부시다.
복은 한꺼번에 오고 재앙은 이어서 온다더니, 타고난 복은 전혀 없고 이 재수 없음은 주기를 두고 계속 찾아오는구나. 나에게 이것들을 불러 모으는 어떤 냄새라도 나는 걸까.
숙소에 오자말자 구석구석 씻어냈다. 내 몸에서 느껴지는 그의 악취가 나를 미치게 했다. 창고에 가서 맥주를 몰래 꺼내 마시고 필름을 끊고 잠이 들었다. 나는 잠이 들어야 했다. 내가 나를 헤치지 않도록 내가 나를 죽이지 않도록 나는 잠 속에 빠져야 했다.
새벽 누군가 깨운다. 나는 이제부터 휴가라 1주일 동안 계속 잠만 잘 생각이었는데, 누가 깨우는 거지? 나와 교대하는 직원이다. "언니, 언니 내일부터 휴가라 이제 못 볼까 봐, 지금 아니면 얘기를 못할 까봐, 깨워서 미안해요. 그런데 언니 나 어쩌죠? " 울면서 말하는 그 직원에게 나는 "너 지금 근무 아니니? 프런트는 어쩌고 여기와 있는 거야?" 나는 참으로 냉정한 얼음이다.
"아 최대리가 와서 있어요, 어차피 지금은 아무 일도 없는 시간이니, 나 근무할 때마다 최대리가 새벽 3시에 항상 와서 봐줬어요. 근데 언니, 그 자식 맨날 이혼할 거라고 기다리라고 그러면서 오늘 결혼기념일이라고 어떻게 여길 오지? 미친 거 아니야? 아 언니, 누구한테 말도 못 하고, 언니는 그래도 믿으니깐, 언니, 나 어떡하죠? 나 임신했어요."
아, 그 ㄱ ㅅ ㄲ
나는 그 직원에게 옷을 내려 나를 보여주었다. 내 목과 팔과 어깨에 난 멍들을.
"아무래도, 그 ㄱ ㅅ ㄲ, 너와 나를 갖고 논 거 같아. 어떡할래? 아마 우리가 같이 나가서 난리 피우면 아마 또 누가 더 있을지도 몰라." 순간 머릿속에 몇 명 스쳐 지나갔다. 이 호텔에 여직원만 20명이 넘는다. 그동안 순간순간 아차 하던 그 장면들이, 그들이 지나가듯 했던 말들이 한꺼번에 홍수처럼 밀려온다.
그날 밤, 그리고 이후에도 우리는 어떤 것도 하지 못했다. 그 직원은 고등학교 졸업하고 처음 온 직장, 이제 20살인 어린 여자아이, 나는 대학교 졸업 후 첫 직장, 이제 24살 철없는 여자. 우리 둘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진실을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나는 그 아이의 보호자가 되어 병원을 찾았고, 우리는 그 이후로 그 일을 기억에서 지웠다. 우리는 너무 어렸고, 우리를 보호해 줄 부모님이 부재했고, 우리가 외치면 분명 우리 편이 되어 줄 것 같은 직장 동료를 알지 못했다.
아무리 선명한 기억도 시간의 힘은 좀처럼 당해내지 못한다.(하루키) 그 최대리는 정말 실존 인물일까?
그때는 그랬다.
그러나 지금 나는 40대 중반, 만약 지금 나에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이제는 얼굴이 무기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려나)
나는 진실을 마주할 수 있을까? 과연 나는 내가 당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아무리 고민해 봐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 내 편이 되어줄 법적 남편이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경제력이 있고, 나를 믿고 지지해 줄 친구들도 있다. 하지만 과연 나는 내가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그렇게 진실을 말할 수 있을까?
나에게는 그런 용기가 있을까?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