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연.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내가 어릴 때 우리집에는 5단 짜리 커다란 책장이 2개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빠의 책들이 가득했다. 가끔 책을 보고 있는 아빠는 괜히 멋있어 보였다. 아무도 없는 낮 시간에 나는 혼자서 몰래 아빠의 책을 꺼내보곤 했다. 누런 갱지에 지렁이들이 기어가는 모양은 별로 신기할 게 없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자주 그렇게 책을 보는 아빠의 흉내를 내며 놀았다. 그건 나에게 웬지 내가 나와는 다른 근사한 사람이 되는 환상을 품게 해 주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외삼촌이 하시던 작은 중국집이 입소문이 나면서 해운대에 2층짜리 커다란 중국성을 오픈했다. 지금처럼 배달전문 업체가 없었던 시기라 주말처럼 배달이 몰리는 날에는 모든 친척들이 동원되었다. 나와 내동생도 주말이면 늘 외삼촌 댁에 가서 짜장면을 배달하고 홀 서빙을 하고 그래야 했다.
그런데, 그 외사촌의 방에는 아빠의 책장보다는 작았지만 그래도 꽤 큰 책장이 있었고 그곳에 세계명작 전집과 한국 단편 전집이 가득 빛나고 있었다. 이건 지렁이가 아니었다. 한자도 없었다. 읽는 동안. 머리속에 인물들이 살아나서 드라마가 되었다. 너무 재미 있어서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지금의 나라면 애교가득 무장하고 외숙모에게 책 좀 빌려달라고 정말 깨끗하게 보겠다고 할 수가.....없겠구나..지금도 못 할 듯 하다. 내가 참 부탁을 못 한다.)
너무 보고 싶은데, 배달을 가야하면 책을 당연히 덮어야 했다. 배달이 없을 때는 사촌들이 다 놀고 있는 그 웃음 속에 나도 끼고 싶은데,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놀려면 빨리 읽어야 했다. 그렇게 4학년, 일년의 주말과 방학동안, 외삼촌 댁에서 배달하며 틈틈히 그 책장의 책들을 모두 읽고 나자, 나는 나도 모르게 '속독'이 가능하게 되었다.
나는 책을 참 빨리 읽는다. 그런데 그 "최대리"가 건네준 '데일 카네기'의 <인간 관계론>은 천천히 읽었다. 한줄 한줄 외우듯 읽었다. 나의 '속독'이면 반나절 정도면 다 읽을 분량의 두껍지 않은 책인데, 1달에 걸쳐 꼼꼼하게 읽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리고 주변 동료들의 장점을 눈여겨 보기 시작했고, 칭찬하기 위해 기회를 살폈다. 적절한 타이밍에 하는 업무에 대한 인정, 그리고 그 사람이 없을 때 그 사람의 지인에게 하는 과한 칭찬들, 나는 변하고 있었다. 인간관계에 대한 요령을 익히고 있었다.
새벽 2시 아무도 없는 고요한 시간, 늘 한결같이 소리없이 다가와 미소짓는 그 "최대리" 나는 이제 더 이상 피곤하다고 잠을 청하지 않았다. 그 시간은 이제 소중한 대화의 시간이었다. 나는 내가 그날 책에서 배운 내용과 그걸 적용해서 한 행동들을 자세하게 설명했고, 그 "최대리"는 늘 고개를 끄덕이며 "오" 마치 '잘했다' 듯 그렇게 "오오"를 반복해 주었다. 여전히 나에게 눈을 맞추지 못한 상태로.
<인간 관계론> 책을 돌려 준 건, 3개월 후,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시작할 무렵 이었다. 3개월 동안 내 주변은 놀라운 변화가 있었다. 책 때문인지, 내가 칭찬을 많이 해서 인지 알 수는 없지만, 동료들의 업무 성과가 아주 높아졌다. 더이상 박과장이 소리치며 화를 내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었다. 박과장의 그 능글한 개구리 같은 손길을 피할 수 있어서 나는 무척 기뻤다. 책을 돌려주면서 감사하다고 했다.
그 "최대리"는 내가 돌려주는 책을 받으면서 "저 이 책 선물이라고 했었는데, 저는 집에 제 책이 있거든요. 김주임님 덕분에 이제 책이 2권이 되었네요. 그래서 말인데요, 사실은 또 선물하고 싶은 책이 있는데 이건 두꺼워서 말이죠. 그래서 돌려 주시면, 그래서 2권이 되면 조금 곤란해서 말이죠." 라며 건넨 책은 앤서니 라빈슨의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 였다. 정말 조금 두꺼웠다.
그는 그 책을 정말 좋아하나 보다. 목소리가 커진다. "그래서 말이죠. 김주임님 성격상 웬지 다시 돌려줄 것 같아서 말이죠. 새 책을 안사고 제가 읽었던 책을 가져왔어요. 혹시 불쾌하시지 않으면 읽어 봐 주실래요? 이 책에 제가 느꼈던 것, 저의 꿈, 제가 좋아하는 것, 제가 싫어하는 것, 제가 원하는 미래들을 기록해 놨어요. 이 책을 3번이나 읽었거든요. 읽을 때마다 계속 달라져서 책에 제 메모가 너무 많기는 한데, 김주임님이 같이 읽어봐 주시면 저는 너무 좋을 것 같아요" 평소의 그 답지 않게 무척이나 말이 길다. 그리고 들떠 있다. 나를 보는 그의 눈이 반짝인다. 문득 나도 모르게 그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심장이 두근 거렸다. 얼음심장이 두근 거릴 리가 없는데, 순간 두근 거린다는 착각을 했다.
겨울이 시작된 호텔은 적막하다. 너무나 춥다. 특히 새벽은 더 춥고 더 고요했다. 그러나 그해 겨울,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내 얼음심장이 녹는 느낌을 받았다. 새벽 2시, 어느새 나는 그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위해 전날 하루를 꼬박 준비했다. 나는 책을 열심히 읽고, 필사하고, 책에 메모 되어 있는 그 "최대리"의 생각을, 그의 느낌을, 그의 꿈을, 기억하고 그에 적합할 만한 나의 꿈을 찾아내서 기록했다. 그해 겨울 그렇게 3개월 나는 내 안에 잠들어 있는 거인을 깨워냈다.
나의 얼음을 깨고, 나의 거인이 드디어 일어나서, 나를 통해 새롭게 태어났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나를 생각하는 것은 그의 일이었다.
나는 그렇게 착각했다.
내가 머라고, 나 같은게 머라고
얼굴이 예쁜 것도 아니고, 몸매가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애교가 있지도 않고
게다가 집은 빚투성이고
그런 여자인 나를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나를
그런 나를 생각 할 리가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