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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Aug 28. 2021

이터널 선샤인

끝-사랑

 사랑은 수많은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향유된다. 그것은 철저하게 개인적이지만 사회적으로 통용되며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한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이 제각각 하게 될 경험을 모아 개념적으로 서술해 보려고 해도, 자신이 느낀 부분을 확장하여 개괄적으로 묘사해 보려고 해도 사랑의 스펙트럼을 완벽하게 그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수많은 로맨스 영화와 사랑 노래들이 비슷한 맥락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도 불구하고 내 마음 그 자체였던 A와 다르게 A'는 오묘하게 이물감을 남기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로맨티시스트를 자처하고 낭만주의를 동경하는 이들이 꼬박 키보드를 잡을 수밖에 없는 까닭도 마찬가지이다.


 2018 년 11월, 나는 첫사랑의 아픔을 품고 블루 발렌타인에 대한 글을 적었고, 초고를 그대로 옮겨 발행했던 브런치의 첫 글에는 그때의 불안했던 심리가 그대로 담겨 있다. 이 글은 마침내 그날들에 헌정하는 마침표이다.


 이터널 선샤인은 유명한 첫사랑 판별극이다. 감상 자체가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기 전과 후로 크게 바뀐다고 말해질 만큼 실제로 이 영화는 깊은 감정을 겪어 본 이들에게만 통할 미장센을 진행로 곳곳에 배치해 두었다. 내가 이터널 선샤인을 처음 봤던 때는 2017 년 여름이었다. 첫사랑을 만난 게 2018 년 1월이었으니 나는 감사하게도 이 영화의 마법을 온전하게 느낄 수 있었던 셈이다.


 사실 첫사랑이라는 말도 꽤 우습다.


 첫사랑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누군가는 진짜 처음으로 연애해 본 유치원 상대를 말하기도 하고, 혹자는 처음으로 연애다운 연애를 해 본 사람을 말하기도 하며 또 그와 다른 사람들은 살아 가며 만났던 중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말하기도 한다. 이것을 인지한다면 이제부터는 첫사랑이라는, 단순하고 무려 뻔해 보이기까지 하는 단어에조차 무조건적인 이해를 구할 수 없게 된다.


 나는 언제나 마지막을 대답한다. 그러면 결국은 누구를 만날 때마다 달라지지 않냐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정말로 그렇지 않았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사랑은커녕 좋아한다는 감정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대신 연애 경험만큼은 웬만한 평균을 훨씬 웃돌았다. 능숙하게 사랑을 가장해 연애놀이를 즐겼다. 모든 것이 달라진 건 그를 만난 후부터였다.


 스스로를 망쳐 가면서도 멈출 수 없는 것,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선택을 번복하고 반복하는 것, 싫어야 할 순간에도 더욱 좋아하게 되는 것, 상대가 너무나도 소중해서 신념을 수십 번 꺾게 되는 것 모두가 처음이었다. 자기 파괴적이라고 생각했다. 여태까지 발에 채일 정도로 많이 겪어 본 연애들이 조상신처럼 경종을 울렸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런 감정을 다시는 겪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첫사랑은 질리도록 되어 봤던 내가 수십 년을 살고서야 비로소 만나게 된 첫사랑이라는 그 사실에만 몰두했다. 그는 내가 평소 바라던 모습과는 달랐고, 하나하나 싫은 점투성이였지만 사랑은 확고했다. 그것이 사랑의 증거였다. 좋아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데다 피해야 할 이유는 한가득이었는데도 마음이 쏟아지는 경험은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클레멘타인과 조엘을 보면서 느낀 점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장기 연애 끝에 서로를 지우기 위하여 찾은 라쿠나 사의 녹음기 앞에서 돌이키지 못할 상대의 험담을 늘어놓는다.  모두가 서로에게 미처 입에 담지 못할 말을 쏟는데, 심지어는  전부가 서로이기 때문에 아는 것이라는 점에서 가장 잔인한 날을 취한다.


 맞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몇 번이고 만나게 되는 사랑.


 우연을 잡아채면 운명이 되는 것처럼 아닌 관계는 쥐었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을 극복한 사랑으로 남는다. 그것이 건강하지 않은 관계일 때 카타르시스의 얼굴을 한 마취제는 뇌를 특히 쉽게 잠식한다.


 내가 겪었던 첫사랑도 그랬다. 빠져든 이상 새삼스럽게 빠져나올 의지는 없었다. 내가 머무르기를 선택하고 그의 감정이 식지 않는다면 이것은 결국 세기의 트루러브가 될 터였다. 플레이리스트에 가득할 염세를 몇 번씩 고막으로 씹어 흉중의 체기를 누르면서도 나는 감정에 잠식되기를 바랐다. 남들이 고르는 쉬운 연애와 다르게 진정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고난까지 감당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첫사랑이 간절한 것은 그들이 아직 그 순간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클레멘타인과 조엘이 작중에서 한 번, 그리고 비하인드 스토리에서 몇 번이고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라쿠나 사가 하사하신 망각이라는 축복 덕분이다. 늙은 클레멘타인이 다시 조엘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 병원을 찾는다는 점을 볼 때 조엘이 말한 OKAY는 둘의 문제점에 대한 타개책이 아니라 그저 도돌이표였다.


 그들은 이미 해 볼 만큼 해 보고 나서 이별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순간을 맞이했다. 그렇기 때문에 클레멘타인과 조엘이 기억을 지우지 않고 힘들게 이별을 견뎠다면 그들은 다시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조엘이 선물을 줘서 재회했더라도 이미 서로에게 지칠 대로 지친 둘은 억지로 연장시킨 관계를 이별로 수렴시키는 과정을 밟을 뿐이다.


 물론 나는 시간이 흘러도 그들이 서로처럼 소중하고 애틋한 연인을 만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첫사랑은 유일하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데여도 그대가 남긴 상처라면 소중하고 애틋하다는 식으로 멍청하게 달려들 기회는 인간의 삶에 단 한 번밖에 없다. 사람은 기억하고, 그래서 발전하거나 퇴보한다. 둘 중 어느 쪽이어도 사건은 사람을 원래 서 있던 자리에 계속 머물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달라진 사람은 또 새로운 자리에서 여생의 유일을 찾게 된다.


 이별에 힘들어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위로는 시간이 흐르면 나아진다는 것과 절대 안 생길 것 같아도 또 그렇게 좋아할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말이었다. 정확히 하자면 전자는 맞았고, 후자는 틀렸다.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진다. 그렇지만 다시 그렇게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힘든 순간을 기록해야 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블루 발렌타인에 대한 소감을 적을 때 딱 그런 심정이었다. 이런 감정을 다시 느낄 기회는 오지 않을 테니까 이 엉망진창을 진열해 두고 싶다.


 확실히 시간이 갈수록 감정은 퇴색된다. 나아진다고 말하기보다는 괜찮아진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때의 일이 말 그대로 흐려지기 때문이다. 억지로 기억이나 감정을 되살려 그때를 소스로 무언가를 창작해 보려고 해도 기억하는 것마저 쉽지 않아지는 날이 온다. 극복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상처 위를 단단히 다져서 밟고 올랐다기보다는 소각된 곳을 내 부지로 두고 다른 곳에서 활동을 하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연히 그곳 또한 내 영토이므로 뭔가 발전한 것은 맞다.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말에는 그보다 사랑할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말은 포함되지 않는다. 다만 그런 연애가 불가능해진다는 뜻이다. 한번 앓고 나서 면역이 생기는 것처럼 다시는 그런 류의 사랑을 할 능력이 사라진다. 예를 들면, 자신을 깎아 내리면서까지 상대를 사랑할 수는 없게 된다. 이유 없이 반하는 일도 사라진다. 이미 겪어 봤으니 두 번도 가능하겠지,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랬으면 그 상대가 첫사랑일 리도 없었을 것이다. 예외는 그 자체로 남아 있는다.


 하지만 첫사랑과의 이별을 극복하는 경험은 자양분으로 남는다. 가장 처음 몬탁에서는 그를 붙잡는 클레멘타인을 보냈던 주제에 아무것도 모르고 다시 만난 클레멘타인에게는 클락션을 울려 그를 잡는 조엘처럼, 기억이 지워지더라도 남는 경험치가 기억을 가지고 이별을 극복해 낸 이에게 박할 리 없다.


 환상과 현실을 엮어 사랑을 그려 낸 이터널 선샤인은 유일무이한 사랑의 가치를 아름답게 보여 주는 동시에 그것의 존속 가능성을 가벼운 어조로 신랄하게 비판한다.


 클레멘타인과 조엘은 처음부터 만남을 지속하는 내내 서로에게 다시 없을 예외였다. 그들은 계속해서 만나는 동안 서로에게만 허용하는 부분을 늘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상대가 사랑을 이유로 모든 것을 이해해 주기를 강요한다. 모두에게는 이전에는 양보한 적 없더라도 예외라는 범주로 내어 줄 수 있는 구역이 있고, 또 절대 달라질 수 없는 선이 있다. 그것을 눈치채거나 배려하지 못한다면 결국 영원한 사랑은 꿈속에나 존재하는 판타지가 될 테지만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끝이 아닌 마지막 사랑의 영위를 보장할 것이다.


 어긋난 서로를 뫼비우스의 띠 위에 올려 놓고 억지로 반복해서라도 쥐고자 하는 사랑이 얼핏 운명을 만들어 내는 듯보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터널 선샤인을 사랑의 끝에 대한 영화로 상정한 것 역시 그 둘 때문이다. 그들의 사랑이 진정하고 유일한 사랑일지언정 그들은 영원할 수 없다. 둘은 끝내 변하기를 선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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