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아침이 밝았다. 다시 여행길에 오른다고 생각하니 아침부터 긴장이 되었다. 그리스 아테네로 가는 비행기는 오후 5시 15분. 공항에 여유 있게 도착하기 위해 픽업 차량은 오후 2시 30분에 예약해두었다. 오전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생각하다 숙소 뒤편 바다를 산책하고 오면 시간이 딱 맞겠다 싶었다.
몰타에 와서 지중해 바다를 물리도록 봤는데도 여전히 새롭게 느껴지는 걸 보니 난 정말 바다가 좋은가보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천천히 산책을 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오니 난리가 나 있었다. 방으로 들어와 나머지 짐을 다 정리하고 있는데 청소하시는 이모님께서 들어오시더니 내게 막 화를 내시는 거다.(평소에 매우 친절하셨다.) 왜 아직까지 안 나갔냐며 오전 11시에는 방을 비워줘야 우리가 청소할 거 아니냐며 언성을 높이셨다. 나는 영문을 몰라 오늘 나갈 건데 픽업차량이 2시 30분에 온다 해서 그때 나가도 되는 거라 생각했다고했다. 이모님은 프런트에막 화내시며 전화를 하시더니 나보고 지금 당장 나가라고 하셨다. 짐을 제대로 정리도 못한 채 일단 급하게 1층으로 내려왔다.
프런트에 가니 나보고 다짜고짜 연장된 시간만큼 돈을 더 내란다.(당시 낮12시 30분쯤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갑자기 어안이 벙벙해졌다. 체크아웃 시간은 11시인데 시간이 오버되었으니 추가 요금을 더 내란다. 그러면서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보여줬다며 체크아웃 시간이 쓰여 있는 페이퍼 한 장을 내밀었다. 나는 처음 보는 안내문이었다.
"난 이걸 지금 처음 봤어요. 그래서 체크아웃 시간이 있는지를 몰랐어요. 시간을 연장하면 추가 요금을 내야 하는지는 더더욱 몰랐어요."
"어쨌든 추가 요금을 내세요. 그게 규정이에요"
나는 조금씩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 오늘 오전일찍 제 방 카드키가 작동되지 않아 문의했을 때체크아웃 시간을 말씀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언제 나가냐고 물으셔서 오늘 나갈 거라고 했는데 아무 말씀 없이 카드키를 고쳐서 다시 주시길래 공항 픽업 시간에 맞춰 나가도 되는지 알았어요."
오전에 방 카드키가 작동이 잘 안 돼서 리셉션에 가지고 가니언제 나가냐고 해서 today라고 대답하고 카드키를 고쳐왔다. 나는 그 직원이 저 사람이었다며 내 말이 맞지 않냐고 그 직원에게 물으니 눈만 크게 뜨고 매니저급 되는 직원을 보기만 할 뿐 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마 그 직원이 당신 말을 잘못 알아듣고 이틀 후에 나간다고 해서 카드키를 그냥 연장해준 것 같아요."
한참있다 매니저급 직원이 대신 대답해준다. 가만히 생각하니 직원이 언제 나가냐고 물었을 때 난 today라고 대답했는데, 그 직원은 two days라고 잘못 알아듣고 카드키를 연장해 준 듯 싶었다.(그 직원은 신입이었다.)
문제가 생기자 내가 체크인할 때 있었던 할아버지 매니저가 오셨고 상황을 정리해주셨다. 알고 보니 숙소 퇴실하는 날은 카드키가 작동되지 않도록 미리 세팅되어 있었고, 퇴실 시간은 오전 11시였다. 내가 오전에 카드키가 고장 났다고 했을 때 오늘 퇴실한다고 했으면 카드키 연장은 안 해줬을 거란다. 직원이 잘못 알아들은 거란다.(헷갈릴 정도로 안 좋은 발음은 아니었는데요... 흑...) 그래서 이틀 후에 나가는지 알고 청소하시는 이모님께는 따로 말하지 않았단다. 이모님께선 오늘 아침 일찍부터 일하시느라 이러한 내용을 전혀 모르고 당연히 처음 계약했던 대로 오늘 오전 11시에 퇴실했을 거라 생각하고 방에 들어갔는데 짐 정리가 안되어있으니 청소를 할 수 없어 화가 나신 거다. 그런데 내가 어찌 됐든 퇴실시간 이후까지 방에 있었으니 그만큼의 추가 요금이 발생하는 건 규정상 당연한 거였다.
안 그래도 청소 이모님한테 영문도 모른 채 한마디 듣고 울컥했는데 프런트에서 규정을 들이밀며 다짜고짜 돈을 내라고 하니 순간 화가 나 필사적으로 나를 방어하기 시작했다. 나는 체크아웃 시간이 있는지도 몰랐다. 더욱이 이 안내문은 처음 보는 거다. 그리고 신입 직원이 잘못 알아들어서 이틀 연장하는 바람에 생긴 오해를 왜 내가 다 책임져야 하느냐. 난 공항 픽업 차량을 오늘 퇴실이라며 프런트에 어제 예약했는데 이틀 후에 나간다고 하는 게 말이 되느냐, 내부 직원들끼리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된 책임도 있지 않느냐며 나는 조목조목 따졌다.(사실 이렇게 따지는 경우가 내 인생에 몇 없었을 뿐 아니라 이런 반박하는 말을 잘하지도 못하는데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타국에서 혼자 살아남기 위한 방어막이라 생각했던 걸까)
그렇게 한참 이야기하고 나니 속이 상했다. 눈물이 차 올랐다. 결국 나도 청소 이모님도 프런트도 서로가 원활한 의사소통을 충분히 하지 못해 생긴 일이었다. 한국이었으면 얼굴 붉힐 일 없이 그냥 넘어갔을 작은 일이었는데 이게 영어로 하다 보니 꼬일 대로 꼬여버렸다. 그냥 맘 편히 추가 요금을 내려하니 프런트 직원들이 상의 후 내게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해준다. 이래저래 마음이 불편했다. 결국 돈은 내지 않았지만 화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상황을 정리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공항으로 향했다. 몰타에 들어올 때도 터키 공항에서의 해프닝으로 마음이 무거웠었는데 그리스로 가는 날에도 이러다니... 이러다가 나라 바꿀 때마다 마음 무거운 일이 생기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몰타 공항에 도착하니 다시 긴장이 되며 속상한 마음이 조금 잊혔다. 이번에는 여유롭게 수속을 밟고 짐을 부친 뒤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시켰다.
나는 유럽에서 비행기 탈 일이 많았는데, 티켓팅을 하고 짐을 부친 뒤 홀가분한 마음으로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는 저 시간을 매우 좋아했다. 비행기 수속을 잘 마쳤다는 안도감, 다른 국가로 넘어갈 수 있다는 설렘, 여행 속 작은 여유를 즐길 수 있는 편안함까지 삼박자가 고루 갖춰진 보석 같은 시간이었다.(난 커피를 마시면 화장실을 자주 갔는데 유럽은 공중화장실이 유료라 여행 중에 커피를 자제했었다. 그러나 공항은 화장실이 무료라 맘껏 커피를 마실 수 있어 좋았다.)
시간이 되어 비행기 탑승 후 1시간 30분을 날아 그리스 아테네 공항에 도착했다. 무거운 캐리어를 가지고 공항버스를 탄 뒤, 숙소가 있는 일리시아 정류장에 내려달라고 운전기사님께 여러 번 부탁드렸다. 1시간이 채 안되어 버스기사님은 친절히 다음 정거장에 내리면 된다 하셨고 난 무사히 숙소에 올 수 있었다. 간단한 안내를 받고 방에 들어오니 2층 침대가 3개, 6인실이다. 나름 2층이 좋아 보였으나 1층에 우선 배정을 해주셨는데 나중에 생활해보니 1층이 훨씬 편하고 좋았다. 여러 가지 팁과 정보는 내일 아침에 알려주신단다. 숙소에 10시쯤 도착했는데 소등시간이 밤 11시라 얼른 정리하고 자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혼자 자유롭게 지내다 6명이 함께 지내려니 조금 불편했지만 또 그만큼의 장점이 있기에 감수해야만 했다. 하루가 너무 길게 느껴졌다. 몸과 마음이 다 피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