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쌍의 연인이 잔잔한 바다 위 요트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서 있다.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남자는 여자를 바라보며 반지를 건넨다.
"나랑 결혼해 줄래?"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이 오글거리는 장면과 멘트. 현실에선 단 한 번도 상상한 적이 없다. 영화가 좋았다고 해서 현실에서 그대로 차용하면 어딘가 모르게 어설퍼 코미디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 산토리니에서는 그게 가능하다. 로맨틱한 풍경이 마음에 와닿는 곳. 마음껏 사랑한다고 외쳐도 되는 배경이 준비되어 있는 곳. 그래서 더더욱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와야만 하는 곳. 바로 산토리니였다.
오늘은 산토리니 섬으로 이동하는 날이다. 조식을 든든히 먹고 짐을 챙겨 호텔을 나섰다. 정말 매번 느끼는 거지만 짐을 들고 이동하는 것은 힘들다. 열심히 걸어 항구에 도착했다.
내가 타야 할 배는 이미 승선 준비를 하고 있다. 9시 30분 배라 아침부터 서둘러서 캐리어를 끌고 왔더니 숨이 찬다. 배가 생각보다 크고, 바다에 바람도 많이 불지 않아 멀미는 안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캐리어를 짐 칸에 두고 자리로 가서 앉았다. 사람들이 많지 않아 여유롭고 쾌적하게 2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산토리니 섬에 도착했다. 숙소에 픽업을 요청해놓은 상태라 내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있는 사람한테 가서 차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숙소는 아니었지만 나름 가격이 합리적이고 주택가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아 만족했다. 젊은 사장님은 내 캐리어를 직접 받아주며매우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체크인할 때 산토리니 지도를 주며 볼거리, 맛집 등도 세세히 알려주었다. 각종 투어도 있었는데 검토해보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신청을 도와준다고 했다. 나는 투어 브로셔를 쭉 둘러보다 '화산섬 트레킹'이 있길래 일단 이걸 내일 하겠다고 신청해두었다. 산토리니는 화산이 폭발해 만들어진 섬이라 궁금했기 때문이다.
방으로 들어가서 자세히 보니 업그레이드를 시켜줬는지 더블베드 1개, 싱글베드 1개로 3인용 방이다.기분이 좋았다. 천장은 둥근 아치형이었는데 말을 하니 울린다. 마치 동굴 속에 온 기분이다. 숙소 앞은 작은 풀장과 썬베드가 있고, 테이블도 있었다. 짐을 풀고 일단 점심을 먹으러 갔다.
사람이 많아 보이는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그릭 샐러드와 토마토 파스타를 시켰다. 음... 둘 다 그저 그렇다. 그릭 샐러드는 너무 건강한 맛이었고, 파스타는 아무 맛이 안 났다. 그냥 밀가루 맛... 이럴 수가... 그래서 배 채울 만큼만 겨우 먹고 일어섰다.
본격적인 주변 산책에 나섰다. 이곳은 피라마을로 산토리니 섬의 중심지이고, 각종 편의시설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다. 교통이 편리하여 그만큼 관광객도 많다.건물의 대부분은 흰색이었다. 햇빛이 강렬해서 반사가 잘 되게 하기 위함인 걸까? 이 흰색 건물에 석양이 비치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때까진 알지 못했다.
바다 쪽으로 나가니 멀리 섬이 하나 보인다. 저곳이 바로 내일 트레킹 할 화산섬이었다. 잔잔한 바다 위에 살포시 떠 있는 섬을 보니 우리나라의 남해바다가 떠올랐다. 청명한 푸른빛의 바다. 잔잔하고 예쁜 바다가 똑 닮았다. 이렇게 좋은 봄날 한산도를 걸었던 기억도 난다.
조금 걸었는데도 어제 파워워킹의 여파였는지 오후가 되면서 몹시 피곤해졌다. 숙소에 가서 한숨 자고 와 일몰 감상을 하기로 했다.
저녁 즈음에 일어나 기로스를 하나 사서 먹으며 피라마을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관광지답게 사람들이 북적였다. 바다 뷰를 자랑하는 고급 숙소들의 하얀 건물과 하늘색 수영장은 이곳이 휴양지임을 확실히 알려주었다.
일몰 감상을 어떤 방법으로 할까 망설이다 전망 좋은 카페에 가기로 했다. 나름 뷰가 괜찮아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카페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다. 나도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메뉴를 둘러보니 꿀 요거트가 있어 하나를 주문했다.
비주얼에 감탄 한번, 맛에 감탄 두번이다. 꿀이 들어가 있으니 당연히 맛있겠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꿀이 없어도 요거트 자체로도 매우 훌륭하다.
'아~ 그리스 요거트 정말 맛있다. 내 인생에 이런 사치라니. 그간 열심히 살아왔으니 한번 정도는 괜찮아.'
멋진 풍경 앞에서 맛있는 것을 먹으며 느끼는 행복함이 나를 더 편안하게 해 준다.서빙을 해 준 종업원이 혼자 온 내가 외로워 보였는지 이것저것 물어본다.
"어디서 오셨어요?"
"한국에서 왔어요."
"아 그렇군요. 저는 아테네에서 왔어요. 요거트 맛있어요?"
"네~ 최고예요."
"맛있게 먹어요. 여기 전망이 되게 좋아요. 사진 찍어 줄까요?"
"그럼 감사하죠."
덕분에 이곳에서의 독사진을 건질 수 있게 되어 좋았다. 종업원의 친절함에 기분이 더 좋아졌다. 그 종업원은 다른 손님을 응대하며 바쁘게 움직이더니 이내 또 내게 와서 말을 건다.
"혼자 왔어요?"
"네. 혼자 여행 중이에요."
"어디 어디 갔어요?"
"터키, 몰타, 그리스요. 그리스는 3번째 나라예요."
"아테네도 갔어요?"
"네. 파르테논 신전을 잘 보고 왔죠."
"파르테논 신전 멋지죠. 저도 좋아해요."
대화가 이쯤 되니 이제는 일몰 감상을 조용히 할 수 있게 자리를 좀 비켜줬으면 해서 대화를 마무리하려고 하는데 서비스 응대치고는 좀 과한 말을 한다.
"음... 당신 외모가 제 이상형이에요. 너무 마음에 들어요. 이따 밤 11시가 되면 카페일이 끝나니까 이리로 다시 와 줄래요?"
나는 이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은 데다 그의 눈에 약간의 장난기가 서려있는 것 같아 알겠다고 대답하고 그만 가서 일보시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카페에 있는 내내 내게 눈짓하며 필요한 게 없는지 지나갈 때마다 물어봤다.)
이윽고 해가 조금씩 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더욱더 몰려든다. 곳곳에서 카메라 셔터 소리가 멈추질 않는다.나도 아름다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 쉬지 않고 사진을 찍었다.
영화 타이타닉의 주제가가 내 귓가에 맴돌며 로맨틱 산토리니의 모습이 빛을 발한다. 하얀색 건물들은 태양의 위치에 따라 시시각각 예쁘게 변했다. 사람들이 보내는 환호와 감탄사는 마치 사랑고백을 하는 말처럼 들렸다.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요트에서도 일몰을 감상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손을 잡고 웃고 있는 것 같다.
'와아~ 이거 너무 멋지잖아? 그런데 혼자 오니 외롭네... 이런 곳은 꼭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와야겠는데?'
사람들을 보니 다들 일행이 있어 삼삼오오 모여 일몰을 감상한 후 저녁을 먹으러 가는 모양새다. 산토리니에 혼자 온 사람은 나밖에 없는 듯한 느낌은 외로움 때문에 생긴 나만의 착각이겠지. 숙소에 빨리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카페를 나와 걸었다. 더 있다가는 외로움에 또 슬퍼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가 지고 노을빛이 하늘과 바다를 물들이는 그 찰나. 할 말을 잃게 만드는 풍경이 내 눈에 포착되었다.
'헉... 이게 뭐야? 여기 지구 맞아? 어떻게 이런 그림이 나올 수 있지?'
나는 너무나 아름다운 산토리니의 모습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로맨틱의 끝판왕이었다. 정말 진심으로 아름다웠다. (내가 가본 유럽 여행지 중 일몰은 이곳이 최고였다.) 산토리니는 막 찍어도 아름답다는 친구의 말이 있었는데 이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로맨틱 산토리니. 이곳은 영화가 현실이 되는 마법 같은 일이 펼쳐지는 곳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