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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ow Melt – 천천히 녹는 위로

- 감기 끝에 만난 Ghirardelli 초콜릿의 따뜻한 사치

by Sunny Sea

며칠간 감기몸살로 앓았다. 병원을 다녀와 약을 먹고 쉰 지 이틀째 되는 날, 몸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마음만큼은 조금 여유로워졌다. 그때 문득 눈에 들어온 것이 미국 여행에서 돌아온 아들이 건넨 작은 선물, Ghirardelli 초콜릿 한 봉지였다.

평소였다면 바쁜 일상 속에서 당이 필요할 때, 입이 심심할 때 대충 집어 먹었을 것이다. 초콜릿은 그냥 다 맛있는 초콜릿이고, 좀 더 맛있는 초콜릿이 있을 뿐이었으니까. 뭔가를 더 좋아하고 그 맛을 찾는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티빙에서 '환승연애'를 켰다. 늘 바쁘게 시간을 쪼개 쓰는 게 일상이었던 내가, 정말 오랜만에 모든 걸 뒤로하고 화면에 푹 빠져들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내 자녀들 나이 또래인 MZ세대의 연애 이야기를 보면서, 단순히 재미로만 보는 게 아니었다. 요즘 결혼과 출산율이 점점 낮아지는 걸 보며 안타까웠는데, 이 젊은이들이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은 감사하게도 결혼해서 임신까지 하여 남편과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조부모 역할 준비에 돌입 중이다. 그리고 이 초콜릿을 사다준 아들도 자신의 꿈을 맘껏 펼치고, 곧 좋은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면 얼마나 좋을까. 화면 속 MZ세대의 연애관과 특징들을 이해하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더 몰입하고 싶은 마음으로 프로그램을 봤다. 그렇게 생각의 긴장을 다 풀어버린 상태로 화면을 바라보며, 하나씩 천천히 초콜릿을 꺼내 눈앞에 놓았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포장지의 부드러움, 입에 올리기 전부터 기대되는 달콤하고 진한 초콜릿 향. 그리고 조심스레 깨물며 속에 담긴 풍미를 천천히 음미할 수 있었던 순간들. 매 장면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드라마처럼, 초콜릿 하나하나가 작은 위로가 되어주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초콜릿이 주는 마음의 편안함을 느껴봤다. 감기 기운도 많이 잦아든 것 같았다.



가장 먼저 손이 간 건 다크 초콜릿 라즈베리였다. 다크 초콜릿의 깊은 풍미 사이로 라즈베리 크림의 상큼함이 부드럽게 퍼지며 입안을 환하게 밝혀주는 게, 마치 과일을 한 입 베어 문 듯 산뜻했다. 묵직한 초콜릿과 산뜻한 과일 필링이 한순간에 어우러지며 기분까지 리프레시되는 느낌. 실제 라즈베리처럼 톡 쏘는 산미 덕분에 마지막까지 입안이 상쾌했다. 조화로운 쓴맛과 산미로, 달콤한 초콜릿의 안정감 속에서 은은한 과일의 감칠맛이 오랫동안 남았다.



다음으로 집어 든 밀크 초콜릿 캐러멜은 포근했다. 포근한 밀크 초콜릿에 캐러멜이 천천히 녹아들며 입안 가득 고소하고 진한 달콤함이 퍼졌다. 첫맛은 부드럽지만, 곧 이어지는 캐러멜의 꾸덕한 쫀득함과 미묘한 버터 향이 입안을 감싸며 행복감을 선사했다. 클래식하면서도 포근한 달콤함. 먹는 순간 기분이 말랑말랑해지는 느낌이랄까. 화면 속 누군가의 설렘이 이 캐러멜의 달콤함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저렇게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하고, 상처받을까 두려워하면서도 용기 내는 모습들이 참 예뻤다.



다크 초콜릿 민트는 청량했다. 다크 초콜릿의 쌉쌀함 뒤에 시원하게 퍼지는 민트 크림이 상쾌함을 더해주는데, 한입 깨무는 순간 상큼한 민트 향이 입안에 번지며 하루의 피곤함을 리셋시키는 느낌이었다. 마치 입안에 청량한 바람이 부는 듯한 기분. 달콤함과 청량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복잡했던 생각들이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꺼낸 인텐스 다크 60% 카카오는 네 가지 중 가장 익숙한 맛이었다. 진한 카카오의 풍부함이 어떤 단맛에도 휘둘리지 않고 오롯이 입안을 채웠다. 씁쓸하면서도 은은한 초콜릿 향이 차분하게 다가오며, 천천히 녹는 질감이 묵직한 만족감을 주었다. 클래식한 다크 초콜릿의 매력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렇게 '환승연애'를 몰아보며 네 가지 맛을 다 음미했다. 시간이 꽤 흘러 이 글을 쓰려고 다시 제일 좋아했던 라즈베리를 입에 넣어봤는데, 처음 음미했을 때만큼은 맛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용물이 따로 들어가 있는 것보다 아무것도 안 들어있는 60% 카카오가 질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화려함보다 담백함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보다.

초콜릿을 단순한 간식이 아닌, 잠깐이나마 나만의 작은 호사로 제대로 음미할 수 있었던 시간. 라즈베리 맛의 새콤달콤한 감동, 클래식한 캐러멜의 꾸덕함, 민트의 청량함, 그리고 다크 초콜릿의 진한 취향까지. 각각의 개성이 분명해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감기가 내게 준 선물은 아이러니하게도 '천천히 음미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바쁘게 달려온 일상을 잠시 멈추고, 화면 속 젊은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그들을 이해하려 애쓰고, 입안에서 녹는 초콜릿의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던 시간. 내 아이들도, 그리고 화면 속 그 젊은이들도 모두 행복한 사랑을 만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본 프로그램이었는데, 그 시간이 나에게도 작은 위로가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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