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를 떠나버린 너
어제는 프로젝트 데드라인이 목전이어서 새벽 늦게까지 작업을 했다. 무언가에 집중을 해야할 때 음악을 틀어놓곤 하는데, 작업의 성격에 따라 업비트한 음악을 듣기도 하고 집중력 뇌파에 좋다는 음악을 듣기도 한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시간 새벽 3시. 한 곡을 내리 재생해서 듣다 이제는 좀 지겨워져서 다른 걸 들어볼까 하다가 갑자기 어떤 특정한 노래 하나가 떠올랐다.
정확히 2개월 전까지는 하루에 한 번 이상 꼭 들었던 노래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로 오랫동안 들었냐면 내가 인스타에 그 노래를 올렸던 날짜가 2021년 6월 25일이었는데 그 때도 이미 그것에 푹 빠져서 살았던 시기였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도, 바텐더와 도란도란 얘기할 수 있는 작은 바에서도 사장님께 신청해서 노래가 업장을 가득 메우는 그 순간은 가슴 떨리는 경험이었다. 나에게는 마법같은 노래였다. 듣는 순간 내가 보는 풍경과 발 딯고 서 있는 이 세상이 모두 별 빛 가득한 보랏빛으로 물드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렇게나 사랑해 마지 않았던 노래를 지난 2개월간 단 한 번도 듣지 않았다. 가끔 떠오르는 순간이 있었지만 '들어야겠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잠깐 머릿 속을 스쳐지나가는 정도. 그러다가 어제, 그것도 새벽 3시에 마치 옛 애인에게서 오는 '잘지내?'류의 문자처럼 불쑥 날 찾아왔다.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내가 이 노래를 안 듣기 시작한 정확한 순간을. 바로 라이브 공연을 본 날 이후였다. 모순적이기도 하지, 그렇게 절절한 마음으로 짝사랑하듯 좋아하던 노래를 라이브로 들은 날이었는데! 공연장은 홍대에 있는 작은 바(bar)였고, 모든 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비슷했다. 2시간의 공연 중 단 한순간도 좋지 않았던 적이 없었고 내가 사랑했던 노래가 나오기 직전엔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제 그 노래가 나올 것임을. 아주 묵직한 베이스로 시작되는데, 베이시스트가 튕긴 첫 줄의 떨림은 마치 나에게 날아와서 내 전두엽을 띵-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한 걸 겨우 참고 노래에 몸을 맡기며 덩실덩실 춤을 추고 첫 가사부터 마지막까지 단 한자도 빼놓지 않고 따라 불렀다.
그랬던 내가 왜 갑자기 이 노래를 듣지 않았던걸까? 어쩌다 한 번 듣는 정도도 아니고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나는 누군가 나에게 무언가를 물어봤을때 '그냥'이라고 대답하는걸 싫어하는 편이다. 모든 사고에는 작든 사소하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무지 이것에 대해서는 왜그랬는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목표의 상실'일까. 대학생 때도,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배우는 정우성이다. 대학교때 팀플을 하러 신촌 카페에 있었는데 내가 있던 카페 바로 앞에서 그가 게릴라 데이트 인터뷰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길로 밖을 나가면 그를 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유는 그냥 평생 그를 실제로 보고 싶지는 않아서였기 때문이다. 웃기지만 그 때는 그를 실제로 보게 된다면 뭔가 살아갈 이유를 잃어버릴 것 같았다. 더 웃긴건 그렇다고 그 배우를 그렇게 미친듯이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노래를 더 이상 듣게 되지 않게된 것도 라이브 공연이라는, 어떻게 보면 가장 적극적으로 음악을 경험할 수 있는 정점을 통해 끝을 보고 말았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붙들던 그 마법이 사라졌던 것이다. 세상의 좁디 좁은 언어와 논리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게 마법일까? 그래서 오랫동안 나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냥'이라는 단어만 머릿 속에 둥둥 떠다녔다. 하지만 오랫동안 나에게 머물고 간 요정이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다른 누군가에게 마법을 부리러 떠난 것이고 그 뿐이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아쉽지만 그 요정이 떠나가지 않도록 붙잡기 위해서는 다른 이유가 더 필요했다. 더 절실하고 더 적극적인. 전자라면 그 노래가 없으면 살아가는데 지장이 생기거나 혹은 후자라면 그 이상의 열정이 생겨서 관심이 확대되거나. 그런데 그건 아니였나보다.
그래도 내 마음 속에서 꽤 오랫동안 살다간 요정이었다. 반짝였고 황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