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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en Dec 28. 2016

나를 찾아서

혼자가 지루할 때 - 연습이 필요해

사람은 군집 동물이다. 작심하고 숨지 않는 한 무리 속에서 살아간다. 가족에 둘러싸여 성장하고 또래와 어울려 교육받고 동료들과 일터에서 부대낀다. 늘 섞여서 있어 공기 같다. 관계가 평온하면 별 문제없다. 하지만 항상 그럴 순 없다. 어그러지고 치인다. 그럴 때 나도 남도 입에 달고 다니는 소리들이 있다.


'아 진짜 밥벌이만 아니라면 퇴사하고 놀고 싶다'  '며칠이라도 애들 뒤치다꺼리하지 않고 혼자 있고 싶다' '주말에 끌려다니지 않고 쉬고 싶다' '집에 아무도 없으니 난 오늘 자유야'


남아도는 시간이 난감하다


막상 혼자 남겨지면 당황스럽다. 정확히 말하면 혼자인데 '할 일'이 없는 상황이 길어지면 어색하다. 적당히 혼자인 시간만 감당할 수 있다. 길어지면 무료해지다 못해 나를 참을 수 없다. 넘치는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린다.


'집 안 일을 끝내고 운동까지 마쳤는데 오전 10시야. 뭘 해야 될지 모르겠더라' '하고 싶은 것이 없어. 하루 종일 TV를 봤더니 머리가 아프더라' '가족들이 없어서 심심해. 여기저기 연락 중이야'


왜 넘치는 시간이 부담스럽고 혼자라는 상태를 견딜 수 없을까? 내가 낯선 거다. 잘 안다고 확신한 나를 정작 남보다 모른다. 어떤 면에서 당연하다. 아무도 내게 이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쳐주지 않았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 고민하고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해준 이가 없다. 늘 '해야 될 일'과 '기대되는 모습'만 얘기한다. 남을 들여다보는 기준에 맞춰 자기도 들여다본다. 내게 나도 타인인 거다. 그러니 어색하다. 모르는 이와 장시간을 보내는 만큼 무료하고 두렵기까지 한다.


'내'가 없는 사람들


연말이고 모임도 많다. 한 저녁 모임에서 모두가 3시간 넘게 '남'을 얘기한다. 누가 어디 CTO가 되고 누가 이사로 갔다가 밀려났으며 누구는 매출이 얼마고 회사를 차렸는데 망해서 인수되고 등등. 씁쓸하게도 그 누구들은 얘기하는 이들을 모른다. 나를 모르는 남의 얘기에 신난다. 어디에도 '나'에 대한 내용은 없다. 그러니 상대에 대한 질문도 비슷하다. '결혼은?' '애는?' '집은?' '취직은?' '연봉은?' '승진은?' 이런 질문거리가 없으면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어쩌면 자신의 얘기일 거다. 남을 들여다보는 기준은 나를 말해주는 기준이 되니까. 나와 남을 구분해주는 건 내가 남보다 얼마나 더 혹은 덜 똑같은 걸 했는지 못했는지랄까? 내가 없으니 내가 뭘 하고픈지 모르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그러니 넘치는 시간이 두렵다.


얼마나 그 시간이 고통스러우면 그것을 죽일 방법을 이렇게까지 찾을까?

'난 돈이 필요하거나 하는 일이 좋아서 회사 다니는 게 아니야. 그냥 출근할 곳이 필요해. 쉴 때 집 안일을 끝내고 운동까지 마쳤는데 오전 10시더라. 뭘 해야 될지 모르겠어. 평생 내가 뭘 하고픈지 알 수 없어. 그래서 출근을 해야 해.'

차라리 '돈이 필요해'가 훨씬 건강하다. 듣고 아무 대꾸도 못했다. 연민 비슷한 거였으리라. 아... 반백년을 살고도 나를 모르고 산다 싶다. 그래서 짜증을 쏟는 회사로 돌아간다. 그것이 혼자 있는 시간보다 덜 고통스러운 거다.


한 번 해본다. 넘치는 시간


넘치는 시간은 남의 일 같다. 지금 당장 바쁘고 늘 사람 사이에 있을 때에 당연하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시간들이 들어온다. 나이 들수록 여유가 생길수록 더 늘어난다. 난 미리 당겨서 그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남들이 집 사고 차 사는 돈으로 난 시간을 샀다.


바쁘던 일상이 멈추면 공백 밀려온다. 늘 울리던 휴대폰도 조용하고 시간에 맞춰해야 될 일도 없다. 홀가분함도 잠시이고 단절된 진공상태에 있는 거 같다. 사는데 바빴을수록 뭔가를 열심히 쫒았을수록 그 허함이 더 크다.


하지만 한 번씩 이런 악착같은 노력을 멈출 때면 의문이 밀려들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 자리에 오르면, 더 좋은 사를 사면, 이 여행을 할 수 있으면 그다음에는? 이 모든 것이 다 무슨 소용일까? 이 모든 것을 원하는 사람이 정말 나일까? 행복해질 것이라고 다들 말하지만 이루고 나면 허망해질 목표를 좇아 달리는 것은 아닐까?" 이런 질문이 떠오르면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 질문이 한 인간의 모든 활동, 즉 그가 원하는 것의 관념을 떠받치는 기틀에 의혹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불안을 조장하는 생각은 최대한 빨리 떨쳐버리려 노력한다. 그런 의문으로 괴로운 것은 그저 피곤하거나 기분이 울적하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원래 자기 것이라 여기는 목표를 계속해서 좇아간다.

-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 에릭 프롬 -


뭔가 해야 될 것 같고 누구라도 만나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지인들을 찾는다. 하지만 이미 서로 다른 궤도로 돌고 있다. 만날수록 허하다. 결국 부인하고 싶던 사실이 현실로 드러난다. 즉, 사람은 남에게 관심 없다. 그러니 어떤 이는 용건 없는 안부를 받을 때 내 존재 이유를 찾았다 하지 않겠나? 그만큼 타인에게서 목적 없는 관심을 찾기 어려운 거겠다.


돌고 돌아 다시 혼자가 된다. 이젠 내가 하고픈 것을 찾는다. 그런데 이런 거 익숙하지 않다. 무엇을 할 거냐고 질문받았지 어떤 사람이 될 거냐는 질문은 없었다. 늘 '해야 될 것'을 했다. 하고픈 것이라 믿던 것도 과연 내 것이었나 의문스럽다. 어떤 면에선 막연하고 또 한편으론 남의 시선에 마땅한 거였다. 퇴직 후 이직이나 창업은 용인되지만 백수는 안된다. 여행은 괜찮지만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쓸모없다. 중국어나 영어를 배우는 건 인정하지만 태국어를 배운다면 갸우뚱한다.


현대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지만 실제로는 타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가 원하는 게 마땅한 것만 원한다. 그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자신이 실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한다. 이는 인간이 해결해야 할 가장 까다로운 문제 중 하나이다. 완제품으로 제공된 목표를 우리의 것처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악착같이 회피하려는 바로 그 과제인 것이다.

-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 에릭 프롬 -


이렇다면 평생을 살아도 내가 하고픈 거 뭔지 모르고 갈 수도 있겠다 싶다. 사실, 하고픈 것도 남을 보면서 생각하니까 당연하다. 그래서 진부하고 지루한 질문이 필요하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내가 뭘 좋아하나? 내가 양보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이 뭘까? 절대 하고 싶지 않은 건 뭘까? 무엇을 할 때 시간을 잊던가? 남의 생각 말고 정확히 내 생각이 내 느낌이 뭘까? 나는 나를 뭐라고 표현할 수 있나?


연습이 필요해


사유와 성찰의 시간을 비우고 산 결과가 참담했다. 마치 다시 걸음마를 배우는 거 같다. 책을 읽고 여행을 떠나고 취미거리를 찾고 운동을 해도 생각이 거들지 않으면 예전으로 돌아왔다. 어떤 경험도 숙성의 시간 없이 의미로 남지 않는다. 그렇게 싫은 것부터 하나씩 지우고 하고픈 것을 하나씩 연습한다. 그리고 연습도 그에 따른 질문도 끝나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하지만 설사 균형을 찾았다 해도 그 균형에 도달하자마자 새로운 모순이 등장하고, 인간은 다시 새로운 균형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끝없이 계속된다. 인간의 본질을 만드는 것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
삶 자체의 완성만이 삶의 단 하나의 의미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 에릭 프롬 -


남아도는 시간의 무료함과 반복되는 무기력은 불안 때문이리라. 특히 자신을 모른다는 건 외부의 불확실함과 차원이 다르다. 정체성이 확실한 사람은 남에게 쉽게 분노하지 않는다. 나를 알면 타인을 이해하는 맥락이 생긴다.


알려면 생각하고 돌아보고 연습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나에 대해서 나만 오롯이 할 수 있는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한다. 중간중간 아마 후회도 할 거다. 지나간 선택을 아쉬워도 할 거다. 어설퍼 적응이 뎌뎌 가는 것을 안타까워할 거다. 하지만 시도가 없으면 후회도 없을 거고 그렇다면 만족도 없는 거다.


사람도 변할 수 있다. 사유한다면


보통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얘기한다. 일면 맞다. 사유와 성찰 없이 살면 안 변한다. 특이한 경험도 사유 없이 그 사람을 변하게 할 수 없다. 나이 드니 짜증과 분노만 늘고 거칠 것 없어 어린아이 같아지는 것도 당연하다. 평생 담쌓은 사유라는 것이 나이와 함께 늘 순 없다.


반면 사유하고 성찰한 시간을 보낸 이를 보면 아름답다. 그가 겪었을 무수한 생각의 시간이 얼굴에 드러나 빛난다. 철부지 같아 무시하던 이가 겪고 느낀 자기만의 시간을 쏟아내면 존경스럽다. 남의 생각과 느낌을 줄줄이 읇어대는 것과 달리 자신만의 것을 드러낼 때 온전히 그 자신이 된다. 자기 것에는 폭로가 있다.


합리화의 본질에는 이런 발견과 폭로가 없다. 합리화는 그저 우리의 감정적 선입견을 확인할 뿐이다. 합리화는 현실로 나아가기 위한 적절한 수단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소망과 기존 현실을 일치시키려는 사후의 노력일 뿐이다.

-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 에릭 프롬 -


그런 이와 보내는 시간은 즐겁다. 온전히 자신을 인지하고 표현하는 그 사람과 나누는 시간이 소중해진다. 나를 찾아 표현하도록 자극해준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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