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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en Dec 10. 2016

익숙함이 방해한다

내가 너를 열심히 듣고 있어 - 언어 편

영어가 서툴다. 뭐 영어뿐인가? 잘하는 외국어가 없다. 일정 시간 이상 들으면 주의력도 급격히 저하된다. 몸 상태가 안 좋으면 더 심하다. 그런데 여행을 하다 보면 필요하다. 어쨌든 의사소통을 해야 낯선 곳에서 먹고사는 것이 가능하다. 


싫다면? 매번 같은 곳이나 리조트 안에만 머물고 패키지여행을 선택하거나 가이드 같은 동행자를 찾으면 된다. 누구는 그건 여행이 아니라지만 놀이에 판단 기준이 있던가?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이해도 된다. 찌든 일상에 어렵게 낸 휴가라면 언어까지 짜증 유발하는 곳은 피하고 싶을 거다.


누구나 자기 취향대로 놀면 된다. 나 같은 경우 언어에 대한 불편함보다 매번 같은 나라의 같은 곳, 변경할 수 없는 빡빡한 스케줄이 더 공포스럽다. 그리고 가이드 같은 동행자? 있다면 복 받으신 거다. 


영어가 두려운 이들


사실 한. 중. 일 3개국처럼 영어에 강박을 가진 곳은 많지 않다. 10년을 넘게 배워도 쩔쩔맨다는 것에 우리 모두 난감하다. 잘못된 교육 방식? 일면 맞겠지만 과연 그것이 다 일까?


여행 중엔 타인의 모습이 더 잘 보인다. 낯선 환경과 삶의 동반자 격인 동행자에 대한 집중력이 한 몫한다.


'와.. 저 사람은 영어 잘해 좋겠다' '하나도 안 들려서 모르겠어' '어떻게 말을 해? 머리가 백지가 된 것 같아' '내 발음이 이상한가봐' '내가 뭔가 틀렸나봐 그래서 그냥 주는데로 먹었어'


공통점이 뭘까? 영어가 시험인 거다. 틀리고 맞거나 잘하고 못하는. 학교를 졸업하고 여전히 시험을 친다. 틀릴까 혹은 들킬까 그냥 넘긴다. 본질은 이미 머릿속에 없다. 언어란 타인과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라는.


배우는 것을 미루는 것들


그리고 여행 후 공부를 결심한다. 불편했던 기억과 바보가 된 듯한 자조감에서 출발한다. 학원도 알아보고 개인교습도 찾는다. 그리고 한두 달이 지나면 동기가 사라진다. 당장 사는데 불편함도 없고 틀려 창피할 일도 없다. 여전히 입시 공부다. 보여줄 필요가 없어지면 치운다.

 

이즘에서 배움의 동기를 만들었던 그 감정을 생각해본다. 겉으로 같아 보이지만 이후 과정이 전혀 다른 두 가지가 있다. 수치심과 죄책감. 들켰을 때만 작동되면 수치심이다. 시작점이 오로지 타인의 시선인 수치심과 달리 죄책감은 나에게서 출발한다. 이 둘은 인식 이후의 과정이 전혀 다르다.


우리가 어떤 행동에 대해 사과를 하고 보상을 하고 우리의 가치관에 맞지 않는 행동을 고치는 경우, 그 동력은 대개 수치심이 아닌 죄책감이다. 죄책감은 불편한 감정이지만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도 한다. 심리학적으로 불편은 인지 부조화와 유사하며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 낸다.

- 마음 가면 | 브레네 브라운 -


들킬 염려가 없어 접는 배움은 수치심에서 시작된 거다. 수치심은 남에게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 그래서 반복되어 들키는 상황은 방어할 핑계를 찾게 만든다. '난 원래 못해' '난 언어엔 타고난 재능이 없나 봐' '해도 안 늘어서 재미없어' 나도 그런다. 서툴고 어렵고 당장 늘지도 않고 필요도 없어 보이면 방어막을 친다. 


아니, 이 얼마나 좋은 핑계인가? 내겐 타고난 재능이 없으니.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니란다. 나의 좋은 핑계가 사라졌다. 흔히 타고난다고 모두가 믿는 그 센스는 지식의 축적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다. 맞다. 못하는 것이 아닌 안 한 거다. 남이 잘하는 무언가는 천부적인 재능이 아닌 노력의 시간을 쌓았기 때문이다.


'센스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평범함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평범함을 알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지식을 얻는 것이다. 센스란 지식의 축적이다.

- 센스의 재발견 | 미즈노 마나부 -


들키면 창피한가? 다시 걸리면 핑계를 찾는가? 그럴 때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노력은 꾸준히 했나? 서툰 것이 그리 부끄러운가? 그렇다면 앞으로 무엇을 배울 수 있겠나?' 모두가 영어를 능숙하게 해야 되는 건 아니다. 완벽한 발음과 문법, 표현은 소통이라는 관점에서는 꽤 사소한 거다. 오히려 맥락에 맞는 단어와 의지가 더 도움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불편했을 때, 불편함이 반복될 때 들키지 않게 덮지 말고 배우려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때론 익숙함이 장벽이 된다.


여행도 반복되면 패턴이 생긴다. 그래서 말하기와 듣기의 급급함이 사라진다. 이때쯤 나도 내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외국어가 필요한 순간, 평소와 다른 내가 툭 튀어나온다. 톤이 약간 높아지고 웃고 있으며 눈을 반짝인다. 


그렇다. '서투르지만 최선을 다해 당신과 얘기하겠다'라는 의지가 드러나는 거다. 누구나 꼭 해야 되는 상황에서 어설픈 것을 할 때 이럴 거다. 그때에는 모든 것이 열려있다. 상대에게 집중하고 비언어적인 표정, 몸짓까지 주의를 기울인다.


그렇다면 그 언어에 익숙하면 의사소통을 더 잘할까?


보통 해외여행에서 언어에 더 능숙한 사람이 앞에 나선다. 말하고 듣는 전담이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다. 서투른 사람은 한 발 뒤에 선다. 이 뒷자리는 여유 있게 볼 기회가 많다. 사는 것도 그렇지만 여유는 인식의 틀을 넓힌다. 한 발 떨어지면 상황이 더 잘 들리고 보인다.


그 나라 언어에 익숙하면 당연히 편하다. 공용어 같은 영어에 부담이 없다면 맘이라도 든든하다. 그런데 이런 익숙한 편안함은 주의를 흩어놓는다. 대화의 맥락을, 상대에 대한 집중을 놓친다. 뒷자리에서는 이런 것들이 잘 보인다. '그건 아까 저분이 얘기했는데...' '저분은 그 의미가 아닌 거 같은데...' '다른 쉬운 단어로 바꾸면 이해할 것 같은데...'


익숙함은 소통의 도움은커녕 오히려 독이 된다. 대충 듣고 건성으로 대답하며 상대가 했던 말을 처음인 것처럼 물어본다. 못하면 답답해하고 쉽거나 짧게 의도를 전달하는 것을 놓친다. 겁먹어 뒷걸음질 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너무 익숙해도 우리는 종종 원래의 목적을 잊는다.


언어의 목적은 소통이다


가끔은 잘하는 것보다 하려는 의지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상대에 집중하면 얘기하는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비록 그 사람의 말이 이상한 문법과 발음이더라도.


우린 일상에서 평생을 써 온 익숙한 언어로 얘기한다. 아마 이 익숙함이 서로에게 집중하고 상대의 의도를 읽어내는데 적잖이 장벽이 될 것이다. 다시 한국말로 돌아올 때 나도 변한다. 상대에게 덜 집중하고 덜 친절하다. 설사 낯선 해외에서라도 한국어를 하는 상황은 나를 다시 한국으로 데려다 놓는 효과가 있다.


언어는 원래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 사람의 의도를, 생각을 읽어내고 내 생각을, 내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거다. 이렇다면 시험 보듯 긴장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언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보다 '내가 너를 열심히 듣고 있어'라는 태도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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