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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en Dec 04. 2016

흐르는 시간이 쌓인 곳

그곳에 머물고 싶다 - 베로나

내일도 베니스? 아니다. 이 부분엔 서로 동의했다. 미로 같은 어두운 골목길이 베니스는 그만이라 외쳤다. 원래 겁이 많지만 묘하게 여행에서는 평소보다 대범해진다.


한 발 디뎌라, 잡아 먹히지 않는다.


그따위 골목길? 낙서 있는 건물? 구걸하는 집시? 안 무섭다. 어차피 사람 사는 곳이다. 공포는 편견과 무지에서 시작해 상상 속에서 자란다. 실제 마주하면 상상으로 키운 두려움이 무안해진다. 한 발만 디디라고 별거 아니라고 경험이 가르쳐준다.


상상은 현재의 경계를 쉽게 뛰어넘지 못한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상상을 담당하는 뇌의 영역이 동시에 지각을 담당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상과 지각이 동일한 뇌의 영역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둘을 착각하게 된다.
...
부정적인 사건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하는 만큼은 아니다.

-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 | 대니얼 길버트 -


완벽한 안전함 속에 어디 가서 무엇을 보는 것이 전부라면 여행이 아닌 숙제를 하는 거다. 익숙하고 반복되는 일상과는 다른 것을 위해 짐을 싸고 여행을 떠난다. 의지할 곳 없고 피할 수 없는 낯섦이 무뎌진 감각을, 바뀐 관점을 안긴다. 낯선 것이 나를 자극하는 새로운 것이 될지 불편함과 공포로 다가올지는 자신의 몫이다.


우리는 경험을 바꿀 기회가 없는 경우에만 그 경험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바꿀 방법을 찾게 된다.
...
우리의 운명이 피할 수 없을 때, 도망칠 수 없을 때 그리고 취소할 수 없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운명에서 긍정적인 면을 발견하려고 한다. 피하거나 도망치거나 뒤바꿀 수 없는 상황은 심리적 면역체계를 발동시킨다.

-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 | 대니얼 길버트 -


우리는 삶이 안정되면 그것이 행복일 거라 생각한다. 그럴 수 있다. 하루하루가 팍팍하면 안정이 그립다. 걱정 없지만 기대도 없고 변함없지만 자극도 없는 그런 삶. 그렇다. 그 안정이 변하지 않은 채 지속되면 공포로 변한다. 그렇게 어떤 이들에게는 평온하지만 기대나 변화 없는 삶이 어둑한 골목길보다 더 공포스러울 수 있다.

 

남들이 보면 왜 사서 고생할까 갸우뚱하겠지만, 안정된 삶도 그 누군가에겐 큰 공포일 수 있다. 크게 불편하지 않지만, 기대할만한 것도 없는 삶이 주는 공포. 기대 없는 하루하루로 연명하다 죽어 버리는 일생. 모든 게 순조운 삶이 주는 공포. 그 무서움이 견딜 수 없는 사람은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다.

- 1만 시간 동안의 아시아 3 | 박민우 -


내가 괜찮아도 상대가 불편하면 서로 힘든 거다. 삶에서처럼 배려는 여행의 윤활유다. 없으면 서로 상처 입는다. 배려라는 윤활유를 뿌려본다. 베니스 근처 소도시를 찾는다. 기차로 한 시간 정도에 베로나가 있다. 거기로 간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 고대 원형 극장의 오페라 축제,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예정에 없던 곳이다. 이럴 때 쓰라고 나온 건가? 구글 여행 앱을 켠다. 괜찮다. 짧은 일정을 소화할 내용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정보는 인터넷에 널렸지만 지도, 리뷰가 함께 잘 정리되어 있다는 것이 장점이겠다. 얘들은 절제력이 없는 만큼의 잉여로 가끔 유용한 것도 만든다. 인간사의 쓸모 있는 것의 대부분은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닌 낭비처럼 보이는 잉여의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은 행동하면서 사고할 수 없다.


느리게 흐르는 베로나


베로나는 작은 도시다. 주말인데 비까지 와서 더 한산하다. 날씨와 햇볕에 집착하는 내게 비 오는 날 산책도 좋을 수 있다고 알려준 곳이다. 굽은 강, 시야가 트이는 나지막한 건물과 언덕, 언덕을 수놓은 사이프러스 나무. 베로나의 첫인상이다. 머물고 싶다. 머무는 일상이 그려진다. 강가를 산책하고 언덕에 오르고 도시 골목골목을 누빌 거다. 베니스는 물론 피렌체도 기꺼이 지우겠다.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답게 시간을 머금고 있다. 로마시대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축소판 포로 로마노 같은 로마극장, 콜로세움이 떠오르는 아레나, 아디제 강 위에 피에트라 다리, 실제 로마시대 포럼이었던 에르베 광장.

 


고대 흔적에 중세와 르네상스가 겹겹이 쌓여 있다. 특히 베로나 로소(분홍 석회암)로 지어진 건물들이 도시에 아늑함을 더한다. 세월이 쌓인 듯한 골목길, 람베르트 종탑과 베로나 영주의 성곽인 카스텔 베끼오,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으로 유명한 산 제노 마조레 성당, 그리고 이 도시의 모든 관광객이 모인 그 유명한 줄리엣의 발코니.



이탈리아 마지막 날 우연히 이 곳을 오게 된 것은 행운이다.  세렌디피티!!! 운 좋은 여행 마감이다. 줄리엣의 발코니만 빼면 한적하고 걷기 좋다. 시간이 쌓인 건물과 골목 사이를 누비다 노천카페에서 차 한잔한다면 행복하리라. 흐린 날씨에도 이러니 볕 좋은 날에는 또 다르겠지. 기대되는 곳이다.


오늘 행운에 감사하며 기차에 오른다. 세렌디피티가 있다면 젬블라니티도 있다. 인생은 새옹지마 맞다. 그렇게 좋은 일에 들떠 자랑하지 말고 나쁜 일에 풀 죽어 좌절하지 않도록 가르쳐준다. 아마도 그것이 오르고 내리며 사는 것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지도 모른다. 삶은 평평한 단방향이 아닌 거다.


사람의 시간이 쌓이면


예약된 좌석엔 할머니가 앉아계셨다. 표를 확인하니 할머니가 잘못한 거 맞다. 할머니는 뭔가 설명을 하시려는데 영어가 짧으시다. 곧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외면하신다. 매너가 없으신 것도 맞다.


상황을 생각 중인 내게 선배가 눈짓을 한다. 나보고 따지라는 거다. 통역의 난감함이 여기서 나온다. 상대의 분노를 내 입을 통해 내보내야 되는 거. 사실 난 따지고 싶지 않다. 영어를 이해할리 없고 빈자리는 많다. 눈치를 보니 '빈자리도 많은데 꼭 이 자리에?'라는 거 같다. 뭐 뻔뻔하다고 화낼 수도 있지만 내겐 그 자리가 분노할 만큼 중요하지 않다.


다행히 근처 이탈리아인의 설득으로 결국 그 자리를 탈환(?)했다. 앉아서도 찜찜하다. 그런데 선배는 분이 안 식는다. 내게 따진다. 저 할머니 왜 저러냐고. 설명하면 이해하고 분노가 풀릴까? 아니 뭐 나도 할머니께 직접 확인한 건 아니니 설명할 것이 없다. 나이 드신 두 분이 서로를 향해 씩씩대고 있다.


우린 살면서 자기 것을 열심히 챙긴다. 누군가 내 것을 침범하면 분노하며 응징한다. 응징이 안되면 며칠을 싸고 눕는다. 대게는 작은 것일수록 그 분노가 크다. 사는데 '하수'인 거다. 내가 그 하수의 방식으로 많이 분노해봐서 안다. 돌이켜 생각하면 분노가 필요 없는 사소한 것들이다. 중요하지 않은 것을 너그럽게 넘겨주면 살며 인상 쓸 일이 적어진다. 그리고 사소하게 넘겨준 것을 만회할 만큼 우린 오래 산다.


방금 뺏은 자리가 춥다고 옮기자는 선배를 끌어 앉혔다. 이즘 되면 부끄러움은 내 몫이다. 결국 뺏은 자리는 바로 버릴 만큼 하찮은 거였다. 돌아오는 시간 내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우린 나이 들면서 여유롭고 현명해지는 거 맞을까? 살아온 날들이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는 거 맞나? 통찰력은커녕 편협해지는 거 아닐까? 나는 다를 거라 장담할 수 있을까? 높아진 평균수명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젊은 날 반짝이던 사람들이 시간이 쌓이며 민폐의 아이콘으로 변한다. 낡은 생각을 고집하며 세대가 이상하게 바뀌었다고 혀를 찬다. 세대 문제가 아닌 시대가 바뀌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이 드는 건 자리를 바꿔 앉아 나보다 살아갈 날이 많은 세대를 응원해줄 때 아름다운 거다. 갈 날이 더 가까운 내 방식대로 바꾸라 외치는 이들은 녹슨 기계보다 더 형편없다.


시간이 흐르며 만들어 낸 유적을 품은 베로나는 아름다웠다. 한 인간을 흘러 지나간 시간은 어떤 흔적을 남기는 걸까? 그 시간으로 우리도 아름다워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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