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사회와 그 후손들
아침부터 뛴다. 기차 출발 5분 전이다. 담배는? 참아야 된다. 짜증이 난다. 기대 없는 베니스였다. 내 맘대로면 소도시를 택했겠지만 밀라노도 겨우 뺐다. 기대가 없으면 둘 중 하나다. 예상 못한 선물이 되거나 역시라는 실망을 안기거나. 출발 전부터 예감이 후자라고 얘기한다.
타기 전 사실 약간 머뭇거렸다. 급하지만 피고 출발 전 올라탈 수 있었다. '먼저 타시면 저는 담배를...'라고 꺼냈다면 미쳤냐는 반응이 올 거다. 서로 기분 나쁜 것보단 참는 것이 낫다.
여행엔 일상이 포함된다. 그 일상엔 습관 들어 있다. 내 습관은 커피와 담배다. 날씨 좋은 노천카페에서 커피와 곁들인 담배는 내겐 천국이다. 맛있는 커피, 느긋이 오가는 사람들을 보는 여유, 생각을 도와주는 담배. 일주일째 못하고 있다. 피곤하다.
버젓이 재떨이 놓인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 길 건너 쓰레기통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다시 온다. 며칠 이러니 이젠 나도 자리에 앉아 즐기고 싶다. 커피만 마실 거면 자릿세 내며 앉지 않는다. 내가 맞췄으니 너도 양보해야지라는 생각이 올라온다.
조심스레 운을 떼면 당연한 듯 답변이 온다. '그래 저쪽 가서 피고 와' 아울러 '담배 끊어라'라는 잔소리도 얹는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가 되는 거다. 덩달아 자기 선 밖의 것에는 상상력이 없는거다. 앉아서 담배? 담배는 당연히 뒷골목 쓰레기통 옆 아냐? 미안한데 여기는 서울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과 다르다.
사실 개개인에게 금연 잔소리 전에 담배를 팔아 세금을 받는 정부를 탓해야 된다. 돈은 벌면서 흡연구역 하나 제대로 만들지 않는다. 국민 건강을 그리 걱정한다면 세금을 올릴 궁리보다 근본 원인을 찾아야 된다. 담배를 불법화해라 그럼 나도 끊겠다.
사실 습관과 생활방식은 강요할 수 없다. 여행 중이면 잠시 적당히 맞추면 된다. 평생 같이 사는 거 아니다. 그런데 맞추는 행위인 배려도 상상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타인의 입장이 상상이 안되면 미처 배려까지도 못 간다.
일반적으로 배려 없는 행동은 이기심 때문이라 생각하지만 대부분 상상력 부재다. 타인이 나와 다를 수 있다는 상상력. 그래서 우린 문학을 읽는 거다. 오만가지 상황들을 소설 속 인물의 행동과 생각으로 경험하는 거다. 그렇게 타인을 상상할 수 있다. 그래야 배려도 할 수 있다.
공상이란 하나를 다른 것으로 볼 수 있고, 또 다른 것 안에서 하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소설적 용어이다. 달리 말하면 은유적 상상력이라 부를 수 있다.
......
소설 읽기의 경험은 각각의 삶이 다른 삶과 분리되고 독립된 것으로 여기도록 하는 강력한 힘을 만들어 낸다.
- 시적 정의 | 마사 누스바움 -
같으면 감사한 거고 다르면 맞춰야 된다. 어쩔 수 없다. 문제는 시간이다. 습관을 거스르는 시간이 길어지면 피로가 쌓인다. 그래서 중간에 단 하루라도 떨어지는 것이 서로의 정신 건강에 좋다. 그럴 수만 있다면. 오기 전에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하루 정도인데 애도 아닌데 혼자 다닐 수 있겠지.
하지만 '따로'라고 말도 꺼내기 전에 쏟아지는 이 말에 멍했다. '웃기지 않냐? 같이 여행을 갔는데 따로 다녔다더라. 말이 되냐? 그럴 거면 여행은 왜 갔냐? 도대체 이해를 못하겠다' 뭐 뒤에서 욕하고 듣는 거 나도 하고 남도 하니까 상관없다. 꺼낼 수 있다. 하지만 '듣고 말하는 거 니가 다해. 니가 영어 더 잘하니' 이러는 사람에게 혼자 다니라고 할 용기가 없다.
심지어 상대의 휴대폰은 오만가지 이유로 무용지물이다. '아니 또? 저번에도 그러더니 준비 안 했나? 최신폰인데? 저 정도면 평소에도 불편할 텐데? 안 쓰나?' 꼬리를 무는 질문 따위 안 한다. 그냥 Siri 하겠다.
여행 전 가서 입을 옷은 열심히 사는 우리는 정작 필요한 준비물은 안 챙긴다. 지도, 책, 음악, 예약 바우처, 일정, 번역, 장소 리뷰 등등 폰으로 여행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한다. 가장 필요한 준비물은 제대로 준비된 폰 하나가 아닐까? 오프라인에서도 가능하게. 살면서도 이럴까? 가장 중요한 거 하나를 빼놓고 다른 것을 열심히 챙기며 사는 걸까? 상대의 폰 덕분에 난 완벽한 Siri가 되어가고 있다.
도착한 베니스는 날씨처럼 썰렁하다. 일부러 본 섬이 아닌 메스트레에 숙소를 잡았다. 낡고 좁은 숙소의 미친 가격이 한 정거장 전으로 나를 밀어냈다. 물론 본 섬은 사람으로 넘친다. 딱 두 부류다. 관광객 아니면 상인. 기념품 가게로 도배된 길, 어둡고 좁은 골목, 바다 앞 늘어선 호텔과 식당.
이 모두는 관광객 시간에 맞춰 열고 닫는다. 사람 사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방치되어 낡은 에버랜드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다. 보수는 포기한 듯 건물은 낡았고 조명은 없거나 어둡다. 산마르코 광장만 밝다. 수상도시? 글쎄, 시궁창 물이다. 골목에 조명 켤 예산도 없는데 수질관리가 될 리 없다.
그나마 밤이 낫다. 이 모든 스산한 낡음을 어둠이 감춰준다. 하지만 문제는 미로 같은 골목길엔 가로등이 없다는거다. 로마 건물 낙서에도 울 것 같은 상대가 패닉이 된다. Siri모드는 켜두고. '어디로 가야 돼? 어디즘이야? 지도에 맞게 나와?' 묻다가도 사람만 보이면 쫒아서 뛴다. 가 본 친구가 말한 한적한 골목길 산책? 그런 거 없다. 본 섬 기차역에 도착할 때즘 마라톤을 한 기분이다.
예전의 베니스는 달랐다. 중세에 해상무역으로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 바다를 끼고 있다고 모두 해상무역으로 흥하지 않는다. 번영에는 이유가 있다. 다수에게 기회가 열린 제도 때문이다.
베네치아의 경제가 이처럼 확대될 수 있었던 토대 중 하나는 경제제도를 한층 포용적인 방향으로 이끌었던 잇따른 계약 혁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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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신분 상승을 도모할 수 있는 주요 수단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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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제적 포용성과 무역을 통한 신흥 가문의 등장으로 정치체제 역시 한층 개방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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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제위원회는 도제가 절대권력을 쥐지 못하도록 하는 임무를 띠었다.
-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 대런 애쓰모글루, 제임스 A, 로빈슨 -
어느 곳이건 흥하려면 불특정 다수에게 공정한 기회가 열려 있어야 한다. 서열화되고 견고한 체제는 당장 현상 유지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그어진 선을 넘진 못한다. 현상유지는 다른 말로 하면 안으로 쪼그라드는 일만 남았다는 거다.
누르고 쪼그라들다 보면 엉뚱한 반대 방향으로 튄다. 다수에게 나눠지지 않은 사회는 현재 미국 대통령과 같은 이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어떨까? 역사에서 배운다면 나을 거다.
흔히 경제만 살리라고 말한다. 미안하다. 삶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폐쇄적 정치나 제도로는 성장도 오래 못 간다. 이념 하나로 새로운 유토피아를 건설하리라 흥분했던 러시아를 보면 된다. 그때 유럽과 미국도 러시아 발전에 광분하며 경탄을 내놓았다. 단 하나의 동력, 독점과 폐쇄적인 견인은 실패한다. 결국 삶에 관련된 모든 것이 바뀌어야 효과가 난다. 그중 가장 약한 부분이 그 한계를 결정할 거다.
언제나 그렇듯이 기득권은 넘지 못할 선을 긋고 싶어 한다. 포용적 제도로 흥한 베니스는 그 제도를 폐기하여 몰락한다.
경제성장을 뒷받침했던 베네치아의 포용적 제도는 창조적 파괴를 수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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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 부자들은 기존 엘리트층의 정치권력에도 도전했다. 따라서 대평 의회에 참여하는 기성 엘리트층은 늘 말썽만 생기지 않는다면 새로운 인물이 이 체제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리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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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평의회는 이제 사실상 외부인에게 문을 닫아걸었고 초기 의원은 세습귀족으로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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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폐쇄'를 단행한 대평의회는 이내 경제적 폐쇄 정책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 대런 애쓰모글루, 제임스 A, 로빈슨 -
닫은 결과는 참담하다. 한때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의 후손들에겐 이제 박물관 같은 옛터에서 관광객을 상대하는 역할이 주어진다.
오늘날 베네치아가 가진 경제라고는 어업 말고도 관광업뿐이다. 무역로와 경제제도를 선도하기는커녕 베네치아인은 떼로 몰려드는 외국인을 위해 피자를 굽고 아이스크림을 팔며, 입으로 색유리를 분다. 관광객은 두칼레 궁전과 베네치아가 지중해를 호령하던 시절 비잔티움에서 약탈해 온 성 마르코 성당의 청동 기마상 등 폐쇄 이전의 경이로운 장관을 보러 베네치아를 찾는다. 베네치아는 경제 대국에서 박물관으로 전락한 것이다.
-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 대런 애쓰모글루, 제임스 A, 로빈슨 -
이것이 단지 베니스만의 일은 아니다. 돌고 도는 역사는 늘 말해준다. 과거에서 배워 현재를 고치고 미래를 만드는 것은 우리 몫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