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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en Jan 26. 2017

왜 사냐고 묻거든

살아내기에 필요한 것들

다른 생활습관에 자신을 노출시키고, 인간 본성의 무한한 다양성을 구경하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의 학교를 모르겠다.

- 몽테뉴 -


정작 삶에 필요한 건 따로 있지 싶다. 내가 학교에서 배운 건 지식이다. 지금처럼 그때도 지식의 최종 목적은 전문성을 가진 직업이다. 그 전문성을 강조하다 보니 범위를 좁혀 산다. 관련 없음은 쓸모없음과 동의어니까.


그 때문일까? 전문 분야에 출중해도 정작 어른으로 나이 들지 못한다. 미생인 거다. 자기 몫에 어설프다 못해 눈물겹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으니 ‘지식’으로 쌓지 못한 탓인가? 이러니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우린 아직 유아기


일 년 넘게 같이 일하자고 조르는 사람이 있었다. 계속 언제 출근할 거냐며. 맘에 빚처럼. 그냥 그럴까 싶었다. 약속을 잡는데 뜬금없이 '사장 면담’이 필요하단다. 거기 모두가 나를 안다. 무슨 면담? 웃음이 나왔다.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불쑥 튀어나온 '면담'이 이상했지만 내 상식선에서 생각했다. 당연히 서로 상의했겠지. 그러니 얼마 전까지 출근하라며 졸랐겠지. 상황이 변했음 약속 전에 알려줬겠지.


아뿔싸!!! 그들은 어른이 아니었다.


그와 같이 나온 사장이 횡설수설한다. 그 모습에 그도 당황한다. 껄끄러운 말을 서로 못 한 거다. 그리고 내게도 미적이며 말 못 하고 어정쩡한 상황을 연출 중이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뭐야 애들이었잖아? 결과야 이미 알았지만 결정되면 연락하라 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어른이 될 리 없다. 가타부타의 답도 뭉개야 아이답다.


누구나 껄끄럽고 불편한 상황은 싫다. 그럼에도 내 몫이니 감수하는 거다. 더 이상 엄마는 없다. 미안해서, 불편해서 질질 끌고 뭉개는 건 아이다. 이건 학교에서 ‘지식’으로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러니 살수록 어렵다. 어른이 되어야 하니.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거...


어찌 그들만 그러랴? 그들만의 탓도 아니다. 모범생일수록 낯설고 못하는 건 외면하려 한다. 칭찬에 익숙하니 불편한 거다. '원만하고 성격 좋다'라는 강박도 아이로 남기에 한 몫한다. 그건 삶에 관대하라는 거지 해야 되는 불편한 상황을 피하라는 게 아니다. 좋게 좋게는 쉽다. 누가 나쁜 사람되고프겠나? 

 

이들은 왜 아이로 남았을까? 사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거겠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삶일 거다. 살수록 나이 들수록 감당할 불편하고 어색한 상황이 불쑥불쑥 나오니. 질겁하고 뒤로 숨고 싶은 거다.


현학적 공부와 지식 습득 능력은 갖춘 반면, 구체적 인간에 대한 관찰과 이해는 더 서툴다는 것이다. 그럴 만도 하다. 지식은 단순화, 맥락화 작업의 산물이고 삶은 고도의 복잡성, 우연성의 산물이니까. 그런 점에서 세상에서 공부가 가장 쉬웠다는 말은 설득력을 갖는다.

- 글 쓰기의 최전선 | 은유 -


이러니 지식에 유창해도 삶에는 누구나 초보다. 겪고 부딪히며 오랜 시간을 들여야 겨우 윤곽이 잡히지 않을까? 매번 어렵고 매번 당황스럽게 나를 몰아넣는 것도 이 ‘사는 거’다. 그리보면 계획도 준비도 뒤집어지고 틀어지는 건 당연하다. 노력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이걸 좀 뒤집어 보자. 삶이 '우연성'을 바닥에 깔고 있다는 걸 인정한다면? 끙끙 앓으며  복닥거리는 대신 툭툭 털게 해준다. 마음이 좀 쉬워지는 거지. 사는 시간 동안.


매 순간 살아내기


생명의 유일한 목적은 ‘살아내는 거’ 일 거다. 우리가 삶이라 부르는 그것이다. 생명은 만들어 내보내는 것보다 그 생명이 자기의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 더 어려운 거다. 아무리 애절해도 온전히 버텨내는 당사자만 하겠는가. 그러니 자신에게 기특하다 토닥여주라. 지금 살아내는 당신이 가장 수고하고 고생하는 거다.


그리 다독여도 살아내기란 만만치 않다. 살아내는데 정말 필요한 것이 뭘까? 인생은 한 방의 운이나 남의 인정으로 버티기엔 너무 길다. 사는 거 계속할 의지를 주는 건 크기가 아닌 빈도다. 그러니 충분히 작아서 매일 가능하다면 더없이 좋겠다. 보통 사람들이 '쓸모없다'부르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글은 작가만 쓰고 그림은 화가만 그린다? 지금 그걸 배워 어디에 써먹겠나? 보잘것없는 것이 내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될까? 글쎄... 한 번 해보면 다르다. 누구나 몰두할 나만의 것이 필요하다. 차곡차곡 쌓인 분노를 어딘가에 쏟으며 결국 자신을 놔버리지 않으려면. 살아내는 건 힘든 거니까.


일단 시작하기


내게 추천하라면 쓰기와 그리기다. 작가? 화가? 누가 그걸로 돈 벌라 했나? 살아내기 필요한 거라 했다. 매일, 30분 미만, 어디서나 가능하다. 하는 동안 몰입되고 쌓을수록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방법이 달라진다. 흔히 재능(창작능력)이 필요하다 오해되는 것들이다. 정말 그럴까? 


여섯 살에는 모두가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고 무언가를 만든다. 우리 모두가 예술가였고 배우였고 도예가였고 무용수였다. 그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
창작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뭔가를 만드는 게 아니라 세상을 다양하게 보고 느끼며 그걸 설명하기 위한 연결 고리를 짓는 일이다.
...
배나무가 "나는 열매를 잘 못 맺겠어."라며 비관하는 걸 들은 적이 있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뭔가를 만들어 내는 나무도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 우리도 똑같이 '장조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창작 면허 프로젝트 | 대니 그레고리


꼭 그거 아니라도 흥미 있는 걸로 일단 시작하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가급적 소비 말고 뭔가 만들어내면 좋고. 쭈뼛쭈뼛 어색한 그거 나도 잘 안다. 남의 시선 두렵지 않은 이가 얼마나 있던가? 근데 찾으려면 알아야 하고, 알려면 시작해야 된다. 그 시작은 누가 대신해줄 수 없다. ‘하면 좋겠다’는 기분과 실제로 ‘하는 것’은 꽤 다르다. 해보기 전엔 모른다. 당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건 현실이 아닌 느낌이다.


글을 쓰고 싶은 것과 글을 쓰는 것은 쥐며느리와 며느리의 차이다.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다. 하나는 기분이 삼삼해지는 일이고 하나는 몸이 축나는 일이다. 주변에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은데 정작 글 쓰는 사람은 별로 없다. 피곤하고 바쁘다며 '집필 유예'의 근거를 댄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말은 그 일이 우선이라는 뜻이다.

글쓰기의 최전선 | 은유


근면과 끈기에 중독되어 사니 별 걸 다 목숨 건다. 시작했음 끝을 봐야지라고. 그러다 지치면 '그래, 난 정말 하고픈게 없나 봐'라고 단정 짓는다. 그러지 마라. 다른 거 찾으면 된다. 할수록 핑계 대며 미루나? 그럼 당신은 그거 싫어하는 거다. 그건 당신 것이 아니다. 좋은 거에 달려드는 거만큼 싫은 거 던지고 감당하는 것도 용기다.


내가 살아내는데 필요한 것들


나는? 여행을 정리하려 맘먹고도 꽤 시간이 지나서야 쓰기 시작했다. 당연히 두렵지. 완전히 까발려지는 거잖아. 그래서인지 첫 글부터 힘이 잔뜩 들어간다. 과한 인용문들, 두리뭉실한 말들, 강박 같은 교훈 마무리 등. 이 모두는 읽기 싫은 글의 특징이다. 


읽는 이가 늘면 그 반응에 오르내린다. 그러니 남의 시선과 자기검열에 글도 뭉뚝해진다. 쓰면서 하면 안 좋은 모든 것이 내 글에 있다. 어쩌랴. 그게 내 현재인 걸. 어설프지만 그렇게 지금도 쓴다. 그리고 쓰면서 배운다. 시작해서 멈추지 않는다면 스스로 찾아가며 배운다. 배우는 과정은 모두 같다. '흥미가 생기고 시작해서 끊임없이 계속하는' 


써낸 글이 형편없고 부끄럽지만 계속하는 이유다. 모두에게나 처음은 있지 않던가? 자기에게 약간 관대해지면 된다. 그러면 나를 세상으로 당겨주는, 살아내는 데 꽤 필요한 걸 찾을 수 있다. 그러니 그냥 시작해보시라.

혹시 아는가? 버티고 살아내려고 손댄 작은 것이 여태 감춰진 무언가를 끄집어낼지. 삶은 우연의 연속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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