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일까? 버팀목일까?
인생에서 가장 위험할 때는 지고 갈 짐이 없을 때이다.
- 선다 싱 | 가장 위험한 때 -
생에 책갈피가 끼워지는 순간이 있다. 나만의 발견이랄까? 자꾸 멈춰 생각하게 만드는 글들, 흥얼거리는 음악들, 맴돌던 상념이 글로 자리 잡는 순간, 평범한 풍경을 그림으로 앉힐 때. 여행 중 들어선 곳이 머물고 싶을 때. 볕 좋은 날 거닐 때.
마주하는 순간 가슴이 뛴다. 웃음도 번진다. 이거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참 멀리도 돌아왔다. 남이 가르쳐 준 건 하나도 없다. 세상이 가치를 부여한 것도 없다. 그동안 목매고 산 것들에도 없다. 결국 나를 살아내게 만드는 건 다수가 한 방향으로 지목한 건 아니었다.
힘들여 발견하니 소중하다. 보상이라도 하듯 가속도가 붙는다. 그래서 한참을 여행 다닐 때는 장기 여행을 그렸다. 한 달에 한 도시 살기 같은. 그게 아니더라도 겨울 몇 달 만이라도 볕 좋은 따뜻한 곳으로.
그러려면? 냥이들을 부탁해야 된다. 맡아주는 친구는 최대 보름 이하라 했다. 설사 더 봐준다 한들 내 맘이 편할까? 갑자기 냥이들이 발목을 잡는 거 같다. 내가 불러들여 10년을 넘게 함께 살면서 발목 잡다니. 이건 아닌 거다. 내가 한심하다. 어찌 이리 못났나.
‘결혼 전 알았다면 절대로 아이를 낳지 않았을 거야’ 여행 중 지인의 말이다. 아이뿐이랴. 눈치 보여 여행을 출장이라 했으니 결혼 자체가 불만 이리라. 십수 년을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던 울타리가 이젠 부담스러운 짐이 된 거다.
그 말 그대로 아이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과연 비혼과 무자식에 쏟아지는 날 선 시선들을 버텼을까?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되는 순간을 무사히 넘겼을까? 아닐 거다. 모든 삶에는 자기만의 무게가 있는 거다. 그때는 아니고 지금은 맞다? 순간의 단면이 전부라고 착각할 때 내가 갖지 못한 생은 참 쉬워 보인다.
그래도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다. 특히 이미 던져진 생명을 부정하는 말. 내가 낳았던 거두었던 부정할 자격이 없는 거다. 어찌 그리 가볍게 내지르나? 책임감이 이리 쉽게 나풀거리나 싶었다. 내 책임감의 무게와 참 다르다며 혀를 찼다.
싱글에 삐딱한 시선을 견디는 거, 울타리 없이 감당하는 거, 거둔 생명들을 부정하지 않는 거. 이건 내 책임감이다. 내가 선택했으니 기대와 달라도 시간따라 변해도 누굴 부여잡고 투덜거리고 징징댈 수 없다.
가볍든 무겁든 책임감도 어찌 되었건 짐이다. 적나라하게 싫다고 불평하던 참고 견디던 무겁긴 마찬가지다. 그러니 버팀목보단 걸림돌에 가깝다. 무게를 지는 내가 기특해진다. 일정 부분 내 희생이 필요한 거니. 과연 그럴까? 그거 네 희생 맞나?
그림노트를 만들고 그리기 시작했다. 서툴러 민망해도 매일, 지우지 말고, 모으라 권한다. 채워진 노트를 넘기며 키득거렸다. 정말 못 그린다. 그래도 이리 모아 놓으니 좋다며. 그러다 문득 노트를 채운 건 대부분 냥이들이란 걸 알았다.
어려워도 자꾸 눈길이 가서 그린 건 냥이들이었다. 그랬구나. 내가 뭔가 대단한 착각 속에 살았구나 싶다. 책임감? 내 희생? 우스웠다.
장기 여행을 포기할 때 냥이들은 생의 가지치기 끝에 남은 마지막 무게라 생각했다. 그 무게가 실은 살아내게 한 버팀목이었다. 부유하지 않고 땅에 발 딛게 한 강한 끈이었다. 가볍게 훨훨 날면 생이라고 가볍게 등지지 않으랴.
지금 짊어진 가장 무거운 짐이 무언가? 그 무게가 인생의 발목을 잡는다 생각하나? 아닐 수도 있다. 그 무거움 덕에 생을 살아내고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