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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en Feb 06. 2017

말하기와 쓰기

경험에 의미 부여하기

사고(思考)라는 요소를 전혀 내포하지 않고 의미를 가진 경험이란 있을 수 없다.

- 존 듀이 -


또 그 얘기?


수다와 잡담은 나름 유용하다. 폭발 직전 꽉 찬 김을 빼준다. 엉뚱한 시점에 터질 걸 막기도 한다. 한바탕 풀면 속도 후련하다. 그래서일까? 안부에 이어 바로 하소연이 이어진다. 상대도 나도 풀어야 또 살아가니까.


누군들 단방향을 좋아할까? 세상에 듣기만 좋아하는 이는 없다. 특히나 대화에서 일방통행은 가장 재미없다.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준다면 그는 당신을 배려하는 거다. 어느 순간 그가 입을 닫았나? 그러면 귀 닫고 입만 연 당신에게 지쳐 대충 맞장구치고 접자고 맘먹은 거다.


애당초 고통 앞에 객관성은 없다. 자기 고통이 제일 크지 않을까? 사경을 헤매는 생명보다 내 손의 가시가 더 아프잖나. 모두 내가 얼마나 힘든지 봐달라고 한다. 그러니 나는 주로 듣는다. 배려던 맞장구치던 뭐 어떤가. 들어주는 것만으로 풀린다면 좋지 않겠는가.


듣다 보면 속으로 '또?'를 외치게 된다. 마치 고장 난 뻐꾸기시계 같다. 몇 개월째, 몇 년째, 심지어 십수 년째 똑같다. 하소연에 일관성이 유지되면 듣는 이에겐 고문이다. 이리 쏟는데 왜 그대로인지. 왜 자꾸 반복되는지.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말하기, 그 허무함


나라고 다를까? 시간만큼 깊어지면 좋으련만 소인인지라 늘 찰랑거린다. 여행에서 더 심하다. 몸도 맘도 불편하니 더 예민한 거리라. 다녀온 후 좋았던 것보다 나빴던 것에 집착해 한동안 씩씩거린다. 특히 동행자에.


분노는 친한 이에게 하소연으로 쏟아진다. 돌이켜보면 듣는 그도 꽤나 지겨웠을 거다. 아마 속으로 ‘저럴 거면 왜 자꾸 여행가나?’했을 거다. 그러니 다녀오면 ‘이번엔 별 일 없었어?’라는 물음이 날아온다. 아차! 내가 이걸 반복하는구나.


나도 고장 난 뻐꾸기시계? 싫다. 그래서 여행 후 쌓인 걸 일기로 썼다. 맞다. 내 쓰기는 작가도 출판도 나눔도 아니었다. 옹졸한 웅덩이가 자꾸 출렁거려 다독이려는 몸짓이랄까? '상처 핥기'가 쓰는 이유였다. 적어도 남을 덜 괴롭히니 좀 낫다. 분노의 도돌이표는? 가라앉지 않더라. 잊을만하면 저 밑에서 계속 올라온다.


쓰기를 공개할 때


일기와 글을 공개하는 건 꽤 다르다. 나만 보는 일기에 곱씹는 사유가 꼭 필요할까? 들춰본 지난 일기는 날 것 그대로다. 휘갈긴 감정이, 참지 못한 분노가 그득했다. 그걸 매개로 화두가 던져지고 생각이 확장되며 의미로 정리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일기는 하소연과 다르지 않다. 상대만 좀 덜 괴롭힐 뿐이다. 쌓인 걸 풀려면 어찌 되었건 정리하고 결론을 내야 한다. 말로 쏟고 일기에 휘갈긴 하소연에는 이 과정이 없다. 후련함은 잠시고 다시 반복된다. 마침표를 찍지 않은 거다.


인간은 자기가 어떻게 절망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알면 그 절망 속에 살아갈 수 있다

- 발터 벤야민 -


쓰기를 공개하면? 휘갈겨 낼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사유'를 시작한다. 맥락과 요점 없는 글은 허무하니까. 그 사유 과정에는 때론 이해가, 성찰이, 질문이 포함된다. 불러내 마주하며 다시 생각하는 거다. 그걸 정리하면서 비로소 마침표가 찍힌다.


이리 쓴다고 내 작은 웅덩이가 갑자기 바다가 될 리 없지만 적어도 반응은 바뀐다. ‘뭐야? 저 인간’에서 ‘왜 그럴까’라는 궁금함으로. 그냥 싫은 감정이 아니라 질문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생각이 들어선다. 경험이 생각을 통해 의미로 내려앉는 순간이다.


뭉개지 말고 솔직하게


공개에는 부작용이 있다. 바로 자기검열. 숨기고 싶은 걸 뭉개고 꾸미기 시작한다. 남의 시선이 두려운 거다. 두리 뭉실하고 장황하며 현학적인 말로 덮는다. 이러면? 소용없다. 어렵게 꺼내놓고 서둘러 다시 덮는 거니. 그저 ‘활자 고문' 하나 추가하는 거다.


고통스러운 감정은 정확하게 묘사하는 순간 멈춘다고 했던가.

-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 은유 -


'솔직함'은 쉽지 않다. 쓸수록 더 어렵다. 자기검열에 걸린 미공개 글이 내게도 넘친다. 정리해서 드러내는 것도 용기다. 무분별한 솔직함은 어리광이지만 정리된 솔직함은 용기 맞다. 그리 마주해야 경험이 의미로 정리된다. 어설프게 뭉개어서 덮으면? 되돌아온다.


 매일 똑같은 창 밖을 마냥 보고 있을 때, 냥이의 뒷모습은 '사유하는 존재' 같다. 집사는 오늘 간식을 주려나...

말은 상대가 있어야 가능하다. 말하며 대응을 보고 듣는 과정은 행동의 연속이다. 사람은 행동하면서 사유할 수 없다. 꺼내서 제대로 마주하려면 사유가 들어오게 혼자 놔둬야 된다. 쓰는 그 순간은 다른 사람과 함께 할 수 없다. 특히 내 얘기는 절대 남과 섞여선 쓸 수 없다. 그래서 써야, 그것도 정리해서 써야 비소로 멈춘다. 그 반복되던 하소연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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