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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en Apr 22. 2017

방콕, 익숙한 그곳

같은 장소, 같은 여행은 없다.

공포는 등골 휘는 중노동이 아니라, 그 노동의 완전한 공허함에서 나온다. … 이것이 시지프의 딜레마이자, 우리 모두가 알건 모르건 실제로 직면하는 딜레마다. 우리가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그것이 우리 삶에 불어넣는 의미는 사라진다. … 이것이 바로 인간의 절망적인 부조리 상황이다.

- 우주에서 철학하기 | 마크 롤랜즈 -


누구나 가는 그곳


첫 해외여행, 어디를 갈까? 일단 가까운 곳에 눈길이 간다. 경비는 물론 심적 부담이 가벼우니 시작하기 좋으리라. 그 리스트에 태국 방콕도 있을 거다. 이국적인 날씨,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 저렴한 물가 등등. 장점되겠다.


반면, 서울서 나고 자라면? 방콕은 한여름의 서울이다. 도시 규모가 커지면 특색보다 획일적인 구조를 갖는다. 고층 빌딩들, 교통 정체의 도로, 출퇴근 시간에 무리 짓는 바쁜 사람들 그리고 낯보다 더 화려한 야경. 이건 서울도 비슷하지 않던가. 내겐 새로운 것과 거리가 멀다.


여행에는 작더라도 기대가 있다. 그러니 이왕이면 새로운 곳을 찾는다. 갔던 곳, 그것도 일상과 비슷한 곳? 애써 여행지로 선택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다시 방콕? 적어도 익숙함은 내가 생각한 여행의 본질이 아닌데 말이다.


같은 장소, 다른 여행


장소가 같으면 여행도 같을까? 글쎄다. 모든 여행은 다분히 우연적이고 주관적이다. 여행지에서 더 신나고 감동하는 것이 과연 그만큼 독특해서일까? 뭐든 받아들이려고 이미 맘먹은 자신의 태도 덕분일 거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같은 상황에 더 분노하고 실망하기.


이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장소가 중요하지 않더라. 덩달아 내 취향 고집도 옅어졌다. 중저가 숙소, 동네 산책, 작은 가게들, 소박한 식사, 대중교통, 구시가지, 작은 카페에서 사람 구경 등등. 매번 이거? 권태롭다. 인간이잖나. 반복에 취약한 인간.


방콕을 다시 간다. 그리고 동행자 취향에 맞춘다. 도심 속 휴양지 같은 리조트, 비싸지만 맛있는 식사, 야경을 배경 삼아 루프탑 바에서 한 잔, 고급 마사지까지. 같은 곳에서 다른 경험이다. 지친 일상엔 이런 여행이 필요할 거다. 덩달아 쏭크란 기간인지라 한산한 도로와 낯선 이에게 물총도 맞아봤다.


넌 어떤 사람?


호기심 많은 낯선 이를 만나는 거. 그래서 정말 오랜만에 들어 본 질문. ‘넌 어떤 사람? 어떻게 살아?’ 사람은 들을 때가 아닌 말할 때 존재한다 했다. 맞다. 처음 본 친구의 사촌이 던진 질문이 낯설다. 아… 이런 질문을 언제 받아 봤었더라?


말을 할 때면 나는 온전히 그곳에 존재한다. 내 건너편에 앉은 상대방도 오로지 나만을 위해 존재한다. 술집에서 엄청나게 취한 사람은 이야기하고,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한다. 이야기하는 동안만큼은 그는 아직 존재한다. 그는 대답을 원하는 게 아니다. 술에 취해 이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없으므로.

-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 페터 빅셀 -


여태 내게 날라 온 질문들은 정상 괘도에 있는가 여부 아니던가. ‘직장은? 아이는? 결혼은? 집은?’ 질문 뒤에 여지없이 붙는 성의 없는 참견. 결국 잔소리를 위한 질문들. 하지만 여행에선 질문이 달라진다.


친한 이라도 여행이라면 다른 질문을 한다. ‘뭐 읽어? 뭐 그려? 요즘 어떤 생각을 해? 어떻게 살고 싶어?’ 등등. 그래서 여행을 공유한 사이는 친해질 수밖에 없다. 최악의 경우만 아니라면. 결국 여행은 사람이다 싶다. 혼자서 만난 현지인이던 동행하는 사람이던.


다시, 여행이란


일상을 벗어난 홀가분함, 낯선 경험이 내민 발견들, 그곳의 문화, 사람들에 대한 강렬한 인상까지. 여행은 꽤 많은 걸 안긴다. 그 당시에는. 한 일주일? 그 시간이 지나면 그런 적 있었나 싶다. 그러니 다시 여행을 준비한다.


어찌 보면 여행하는 내가 시지프 같다. 떠나고 돌아오고 다시 떠나고. 크게 보면 결국 난 이걸 반복하는 거다. 그곳에서 얻은 의미나 경험들? 있다. 하지만 늘 떠났던 곳으로 되돌아온다. 여행지에 평생 머문다? 사양하겠다. 이루고 지속되면 다시 권태의 시간이 시작된다.


이걸 철학이 풀어낸 언어로 '인간의 절망적인 부조리 상황’이라더라. 인간만의 태생적 문제겠다. 특히 키우는 냥이들을 보고 있으면 더 그렇다. 같은 식사, 잠자리, 놀이 등, 비슷한 일상에 그들은 항상 흥겹다. 작은 걸로 행복할 줄 아는 존재들 같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누리는 나는? 가끔, 아주 가끔 행복하다.


그래서 결국 내게 여행이란 권태의 시간을 깨는 브레이크 같다. 좋더라도 지속되면 다시 시작되는 무의미함을 중단하려고.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떠나고 다시 되돌아오는 거 아닐는지. 인간이니 난 냥이와 다르게 이렇게 살아야 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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