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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en Jul 12. 2017

무시할 만큼 하찮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하수다

그리는 동기는 다양하다.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에 저리 그리고 싶다거나, 일상을 혹은 여행을 담아볼까 맘먹거나, 시간을 멈추는 몰입을 원하거나. 아무래도 끌리는 장르부터 시작한다. 좋아야 시작하니까.


그런데 이상하다. 배우러 다니다 보니 자칭 정통 회화에서 벗어날수록 무시하는 분위기다. 자기 밑천이 적을수록 그 정도는 심해진다. 하긴 여유란 가진 자의 것이다. 그것이 실력이던, 경험이던, 재력이던. 그림뿐이던가? 습관적으로 줄 세우는 이들 많다. 내 뒤라고 판단되면 바로 무시와 하대로 이어진다. 그러니 약자, 그것도 가장 약한 생명을 대할 때 수준이 노출된다. 꽤 빈번하고 적나라하기에 관상 따위 필요 없다.


한 일러스트 강사는 원래 정통 회화 전공자라며 의시 댔다. 마치 일러스트는 곁가지라도 되는 듯이. 아마 여행 드로잉도 그녀가 무시하는 종류리라. 그럼 여행 드로잉 강사는? 그는 컬러링북을 시간 낭비라 했다. 절대 그림이 늘지 않는다며. 더구나 주 도구가 색연필이다. 뭔가 심히 아동스럽다. 그러니 이 분야에서 가장 무시하는 건 컬러링북 아닐까 싶다.

잠가놓은 범생 기질이 고개를 든다. 선생님 말씀 잘 듣기!!! 그러니 컬러링북? 그쪽 스위치가 내려간다. 이게 바로 범생의 문제점이다. 가르쳐주고 정해준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아마 일꾼에게는 바람직한 특성일 거다. 근데 삶이 배운 대로 펼쳐지며 시킨 일만 하면 되던가. 그러니 종종 딴짓이 필요하다.

물론 나는 순도 100% 범생이 아니다. 그러니 필요하면 금기의 컬러링북도 집어 든다. 필요한 이유? 놀이에도 슬럼프가 온다. 반복에도 마냥 재밌다? 인간은 그 방면에서 바닥권이다. 그러니 살짝 변형이 필요하다. 다 빼고 색칠만? 괜찮을 거 같다. 컬러링북 금기? 사뿐히 즈려 밟겠다.


첫 장부터 난감하다. '어서 와.. 컬러링북은 처음이지?'라며 책이 비웃는다. 남의 낯선 드로잉, 의도를 알 수 없는 내용과 구도 앞에 오만가지 고민이 들락거린다. '그냥 칠하자'가 안된다. 그놈의 범생이 기질은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또 뭔가 잘하고 싶은 거다.


용기 대신 자리 잡은 노련함으로... 끙끙 싸맬 필요 없다.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고 천재는 들키지 않고 베끼는 사람이라 했던가. 다른 이들의 작업을 보면 되지. 그렇게 감흥 없이 넘기다 바로 여기서 멈췄다. 무려 색연필로 칠한 거다.


magical delights | coloring by chris cheng

어떤가? 시간 낭비에 실력 늘지 않는다는 말이 믿어지나? 사실 그리 말한 이의 작품보다 나았다. 취향 탓이겠지만 내겐 그랬다. 으스대던 전공자와 그 분야에 종사자가 그토록 무시한 컬렁링북을 누군가는 멋진 작품으로 만든 거다.

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것도 어리둥절했다. 이걸 그려낸 동영상을 보고 있으면 모르던 걸 배우게 되더라. 색 조합, 명암 표현, 그라데이션 등등. 맞다. 기초부터 심화 기법까지 컬러링북으로도 배울 수 있다. 덩달아 색연필에 대한 선입견도 날려 버리고.


이 느낌 낯설지 않다. 언젠가 옆 팀에서 웹페이지 개발자를 구해달랬다. 자신들은 고급 서버 개발자이니 그건 자기 일이 아니라나 뭐라나. 우스웠다. 뭐가 고급이고 뭐가 저급인지. 그들보다 출중한 이들도 웹페이지를 만든다. 핑계도 투정도 없이. 도대체 안 하는 건지 못하니 그럴싸한 핑계를 대는 건지. 그들이 '고급 서버 개발'은 잘했냐고? 글쎄다. 그럴 리 없잖은가.


하찮다고 무시하는 거, 무시해도 된다고 경계 긋는 거. 하수의 전매특허일 거다. 삶이 보잘것없이 짧은 시간이라는 걸 안다면 그리 얕보고 무시할 게 있던가. 난 더 딴짓을 늘려야겠다. 쓸모없고 하찮다는 걸, 범위를 벗어난 것들을 자주 들여다 보리라. 결국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고 어떻게 마주하냐 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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