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톡을 통해 본 관계 유지법
연락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필수 불가결하다. 그러나 이제 ‘연락’하면 카카오톡이 생각나게 되었으니, 연락 그 자체보다 카카오톡이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다. 현대인의 일상에 일부가 되어버린 카카오톡은 사람들로 하여금 친밀도와 연락의 빈도가 정비례하다고 느끼게 만들기도 하였다. 연락에 있어서 대부분 친하면 거의 매일, 애매한 관계이지만 친한 쪽에 가깝다면 정기적으로 안부를 물으며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정도, 아예 친하지 않다면 용건 있을 때에만 잠깐 이야기하고 얼른 끊어버린다.
카카오톡에 있는 검색 기능을 통해 나의 연락 패턴을 본 결과, 휴대폰을 바꾼 2019년 12월 14일부터 글을 작성 중인 2021년 4월 11일까지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가장 친한 친구와는 매일 카톡을 하고 있다. 또한, 애매하지만 그래도 친한 쪽에 더 가까운 친구와는 한 달에 한 번씩 약 2주간 연락을 이어가고, 연락은 자주 안 해도 만났을 때 잘 노는 친구와는 한 달에 한 번씩 연락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안 친한 친구와는 용건 있을 때 한 시간 정도 연락한 것을 확인하였다. 물론 예외는 있지만 이렇게 가상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연락의 빈도를 통해 친밀도를 확인할 수 있다. 위 글은 카카오톡의 등장으로 연락에 의미부여를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들의 행동 양식에 초점을 맞추어 작성되었다.
어느 날 친구와 카톡을 안읽씹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친구는 다른 친구가 휴대폰을 하고 있을 때 안읽씹 중인 카톡이 여러 개인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것을 보며 친구는 ‘내 카톡도 저런 취급을 받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그 친구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어 카톡 하는 것을 자제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의 경우에도 친구가 카톡 미리 보기 알림을 켜 놓은 걸 알고 있는데 답장은 몇 시간에 한 번씩 해서 서운함을 느낀 적이 있었다. 이렇게 연락만으로 감정이 좌지우지되는 이유는 상대방으로부터 답장이 오지 않는 것이 접속할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 때문이 아니라 본인의 의지가 담긴 선택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특히 카카오톡에서의 안읽씹이 바로 이 선택과 관련 있다. 상대방이 다른 온라인 활동은 하면서 나의 카톡은 안읽씹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 그가 불가피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나와의 연락을 의지로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에 큰 서운함을 느낀다. 이러한 이유로 안읽씹을 당하면 선택이라도 받은 읽씹보다도 더 무시받는 기분이 든다.
요즘에는 이렇게 안읽씹 기간이 관계의 정도를 계량화하는 기준이 되었다. 우선 안읽씹에 대한 해명을 하자면 바빠서 연락할 수 없는 상황 때문일 수도 있고, 연락하는 것이 귀찮거나 연락에 큰 의미부여를 두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상대방이 연락에 의미부여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러한 행동을 당했다는 것 자체에 서운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고 마냥 안읽씹을 당하는 사람에게만 부정적인 감정이 드는 것은 아니다. 안읽씹을 하는 사람도 1을 없애야 한다는 마음의 짐을 가진다. 트위터에 ‘카톡 프사 바꾸기 위해 밀린 답장 몰아서 하는 고통을 아십니까?’라는 트윗의 리트윗 횟수는 약 9,900건에 달했으며 여러 커뮤니티 사이트에도 스크랩되어 큰 공감을 얻었다. 그만큼 많은 현대인들 ‘1=마음의 짐’이라고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프로필 사진을 바꾸기 위해 밀린 답장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바로 프로필 사진이 바뀌었는데도 카톡방에서 1이 사라지지 않았을 시 상대방이 받을 서운한 감정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개인 톡을 하는 두 명이 서로 같은 단체 채팅방에 참여 중일 때, 단체톡에서는 활발히 대화를 나누면서 개인 톡은 안읽씹 하는 것에 서운함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프로필 사진을 바꾸기 전에 답장을 하는 것처럼 단체톡에서 대화를 함과 동시에 개인 톡에 답장을 보냄으로써 상대방이 서운함 느끼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한다. 물론 안읽씹을 당한 사람도 상대방이 프사를 바꾸기 위해, 단체톡에서 이야기하기 위해 답장을 했다는 것을 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마음이 상할 수 있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해와 수용이 가능하다. 상대방의 이러한 행동을 본인도 예전에 한 적 있다는 점에서 어떤 마음이었을지 공감 가기에 이해할 수 있고, 그래도 답장이 왔다는 점에서 수용할 수 있다. 만약 프사가 바뀌고, 단체톡에서 시끄러운 와중에 본인과의 개인 톡에 1이 여전히 남아있다면 이때 드는 감정은 또다시 서운함일 것이다. 이러한 예시들을 통해 가상공간 속의 연락은 사람의 감정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활동 중인 커뮤니티에는 2월 중순이 되면 ‘새내기 단톡방에 들어갈까 말까?’라는 글이 수도 없이 올라온다. 새내기 단톡방은 사전에 학교 정보와 과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공간이지만 가장 중요한 용도는 아직 얼굴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과 가상공간에서 친목을 미리 다짐으로써 얼굴을 보게 될 날에 친밀감을 느끼기 위한 것이다. 이후에 만나서 친해졌다면 서로 친해진 사람들은 개인 톡을 함으로써 서로 친해졌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렇게 개인 톡을 자주 하는 사이가 되고 정말 친해졌다면 저장된 이름을 바꾸기도 하며 친밀감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경우도 생긴다. 가상공간에서 볼 수 있는 친밀함의 척도 중 하나가 연락처 속 이름 설정이다. 현실에서는 친하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느끼기 어렵다. 얼마나 자주 만나는지 등으로 으레 친하다는 것을 짐작하는 정도다. 그러나 휴대폰 속 저장된 이름은 친밀도를 가시화할 수 있다. 친밀도에 따라 연락처 속 이름을 바꾸는 사람을 예로 들자면, 학교에서 처음 만난 관계 속 나는 ‘xx학교 xx과 xxx’으로 저장될 것이다. 이보다 더 친해지면 '성을 붙인 이름' 혹은 '이름'으로 바뀔 것이고, 정말 친하다고 느껴질 정도면 이모티콘이 포함된 ‘이름♡’ 혹은 별명으로 저장될 것이다. 누군가를 저장할 때 공적인 영역이 많이 포함될수록 거리감이 느껴지기 때문에 이를 제거함으로써 ‘나는 너와 이만큼 친하다.’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물론 바꾸는 것 자체를 귀찮아하거나 친하다고 해서 바꿔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이유로 처음 저장한 상태 그대로 두는 사람도 있다.
친한 사람 위주의 커뮤니케이션은 ‘현실에서의 친밀함을 바탕으로 하여 가상공간(카카오톡)에서 친밀도를 더 쌓고, 이렇게 쌓인 가상공간에서의 친밀도를 통해 현실에서의 친밀함이 쌓이는’ 일종의 뫼비우스 띠를 만든다. 친해지고 싶어서 연락을 하고, 그 친해진 관계는 연락을 자주함으로써 유지된다. 친한 친구와는 연락이 끊기지 않았으면 하지만 친하지 않은 친구와의 연락은 최대한 빨리 끊으려 노력한다. 친한 친구와의 연락은 중간에 잠들어도 다음 날에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잘 자’라는 말은 곧 ‘내일 또 연락하자.’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용건 때문에 연락하게 된, 친하지 않은 친구와는 연락이 그다음 날로 넘어가는 걸 막기 위해 꼭 ‘잘 자’라든지 ‘좋은 하루 보내’라는 말로 연락을 끝내려고 한다. 이들과의 관계에서는 읽씹을 당해도 감정이 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읽씹 당하기를 바라기도 한다.
또 다른 사이인 연락을 자주 하지 않음에도 친한 사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그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오랜만에 연락을 하거나 오랜만에 만나도 어색하지 않는 경우, 연락을 오랫동안 하지 않아도 인연이 끊기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경우 등이다. 이러한 복합적인 신뢰 덕분에 연락의 빈도와 친밀도가 정비례하지 않아도 이 관계는 유지된다. 그러나 친하지도 않고 안 친하지도 않은 애매한 관계에서는 단발성의 안부 연락, SNS에서 태그를 거는 행위, 댓글을 달거나 ‘좋아요’를 누르는 등의 행위를 하면서 지인 관계를 이어간다. 이들은 이렇게 가상공간 속에서만 인맥을 유지하며 ‘조만간 만나자.’라는 말만 할 뿐 실제로 만나지는 않는다.
위의 논리와 역설적이게도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은 이제 100% 통용되지 않는다. 몸이 멀어져도 연락을 자주 하면 마음은 그렇게 멀어지지 않는다. N수를 했던 친구와 유학을 갔던 친구를 예로 들 수 있다. 원래 이 친구들과 개별적으로도 많이 만나고 연락도 자주 했다. 그러나 이들이 연락을 자주 할 수 없는 특수한 상황이 되자 나는 틈틈이 먼저 연락을 취함으로써 ‘나는 너를 잊지 않았다.’는 믿음과 확신을 주었다. 이 친구들은 ‘네가 연락을 하지 않았으면 인연이 끊길 수 있었는데 연락을 해주어서 고맙다.’라고 하기도 했다. 이들은 연락을 자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연락이 끊기게 되면 인연의 지속성이 낮아지는 것 대해 걱정을 많이 한 것으로 보인다. 재수를 했던 친구는 상황 상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연락을 못하는 경우였지만 유학을 간 친구는 원래 본인이 먼저 연락을 하는 스타일이 아니라고 했다. 이 친구는 연락에 있어서 ‘필요한 사람이 먼저 하겠지.’라는 생각이라고 한다.
어느 순간부터 먼저 연락하는 것, 카카오톡에서의 ‘선톡’은 자존심과 연관되어버렸다. 이와 관련하여 주위로부터 이따금 발견할 수 있는 감정 소모가 ‘나만 먼저 하는 연락에 회의감이 와서 연락하는 것 그만두기’다. 이 또한 연인관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며 친구 사이에서 일어난 경우엔 친하다고 생각할수록 그 감정 소모가 더 커진다. ‘가는 인연 붙잡지 않는다.’는 말은 이제 ‘연락을 먼저 하지 않는 인연 나도 이제 먼저 연락 안 한다.’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연락이 끊긴 관계는 연락을 먼저 하지 않던 사람이 상대방이 필요하여 먼저 연락하지 않는 이상, 먼저 연락을 하던 사람이 선톡을 보내지 않는 이상 그들 사이의 ‘부재중’은 지속될 것이다. 만약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된 상태에서 다시 연락이 닿는다고 해도 그 사이는 이미 멀어져 있으며 어색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을 때 그는 우선 ‘선톡’이라는 것을 따지지 않은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다음으로 먼저 연락이 갑자기 끊겼다는 점에서 당황스러울 것이고, 친구의 갑작스러운 잠수를 본인에게 화났다는 표시로 오해할 수도 있다. 혼자 이러한 생각에 휩싸이다가 결국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 나오는 것인지 도리어 화를 내는 경우까지 생긴다. 그렇다고 해서 잠수를 탄 친구가 그 이유를 말하기도 민망한 상황이다. 이는 관계를 대하는 자세의 차이에서 나오는 오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서로 딱히 다툰 것도 아니고 피해를 받은 것도 아니지만 가상공간에서 일어난 연락 자존심 하나 때문에 인간관계가 정리될 수 있다는 것과 인간관계는 현실에서만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연락에 의미 부여하는 사람들이 연락의 빈도와 친밀도를 상관관계에 두는 이유는 본인의 행동을 통해 상대방의 행동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본인이 친하지 않은 사람 또는 연락하기 싫은 사람과 연락을 끊고 싶을 때 읽씹을 한다든지 답장을 느리게 하며(안읽씹의 일종) 연락을 지속하기 싫다는 의사표출을 한다. 만약 상대방의 답장 간격이 길어지면 본인의 경험에 상대방의 행동을 일치시켜 ‘나와 연락을 끊고 싶구나.’라며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그렇게 서로 답장이 느려지다가 한 명이 읽씹을 유도하는 메시지를 보내면 상대방은 읽씹을 하며 그렇게 암묵적인 합의 하에 연락은 끝이 난다.
카카오톡의 즉시성은 현대인의 연락을 대하는 태도를 많이 바꾸어 놓았다. 문자 세대 때만 하더라도 이 정도로 다수의 사람들이 연락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이때에는 읽씹과 안읽씹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었는데 이 단어가 생긴 것이 바로 카카오톡이 개발되면서다. 1의 유무로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되면서 연락과 관련된 새로운 언어가 생성된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 1은 곧 마음의 짐이다. 연락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든 안 쓰는 사람이든 카카오톡 사용자 대다수가 1에는 신경을 쓸 것이다. 다만 관계를 대하는 방식에 따라 1은 누군가에게는 빨리 처리하고 털어낼 일, 누군가에게는 최대한 미루게 되는 일 정도로 나뉠 뿐이다.
‘끊임없는 연결’이라는 연락 형태는 현대인들로 하여금 친밀한 사람과의 연결을 끊임없이 지켜내야 한다는 강박 만들었으며 그만큼 인간관계에 회의감을 들도록 만들기도 하였다. 인간관계와 연락의 복잡한 상관관계에 지쳐 해탈한 사람들은 ‘그러려니’라는 마법의 주문을 통해 읽씹과 안읽씹에 무덤덤해지게 되었다.
카카오톡이 등장하면서 친밀한 사람과의 연결이 끊임없을 것이라는 믿음은 읽씹과 안읽씹이라는 배신에 의해 깨지게 되었다. 끊임없는 연결을 위해 고려해야 할 점은 많아지고 까다로워졌다. 그만큼 연락은 감정 소모를 동반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연결되는 것에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연락을 통해 존재론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개인 톡방과 단체 톡방에 접속되어있는 것이며, 접속된 수만큼 다양한 공간에서 각자의 자아 역할을 수행하려고 하니 현대인들은 인간관계에 지쳐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렇게 마음의 짐을 하나씩 가지며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