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2022)
포스터부터 심상치 않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와 살고 있지만 녹록지 않은 생활과 가족 갈등, 경제적 문제로 삶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여성 에블린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에블린의 문제를 단순한 가족의 결합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멀티버스 세계관을 도입하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영화는 과거의 선택과 그로 인해 느끼는 지금 현재의 후회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점은 관객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삶을 반추할 수 있게 한다.
영화에서는 에블린(양자경)이 과거에 한 선택마다 모조리 실패했고, 그렇기에 현재 모든 가능성을 열어 멀티 버스를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다. 실패했기에 더 많이 도전해볼 수 있다는 흔한 위로가 독특한 설정을 통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다른 세계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살아내는 내가 있다는 점에서 모종의 위로를 안겨주는 동시에 짙은 허무도 동반한다. 모든 것이 모든 곳에 한꺼번에, 이미 운명적으로 존재한다면 지금 생의 번뇌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동시대 최고의 스타가 되어 레드 카펫을 걷는 내가, 초절정쿵후 고수인 내가 이미 어딘가에서 잘 살아가고 있는데, 이 부박한 세무 조사와 성격 괴팍한 딸과 이혼 타령하는 남편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이 허무를 가장 먼저 습득한 이는 에블린의 딸 조이(스테파니 수)다. 알파버스에서의 과도한 실험으로 모든 차원을 아우르는 절대적 존재로 거듭나 '조부 투파키'로 불리게 된 그는 베이글(모양의 블랙홀) 위에 세상 모든 진실(everything)의 조각을 올려둔 채 절대 고독 속에 빠져있다.
지독한 허무주의에 맞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악착같이 전투한다. 지금이 어떻든 그저 실존하기만 해도 괜찮다고 말하기 위해서다.
이 영화가 살아있는 모든 순간(everywhere)에 존재하도록 만드는 방식에 주목하고 싶다. 이른바 '버스 점프(verse jump)'라 불리는 다른 우주와의 접속을 위해 필요한 일은 '지금 가장 엉뚱한, 개연성 없는, 무작위적' 행동을 하는 것이다. 신발 양쪽을 바꿔 신기, 손가락 사이를 종이로 5번 베기, 립밤을 삼키기, 그리고 항문에 트로피를 끼우기 등등… "내가 도대체 뭘 보고 있는 거야.."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런 장면들은 영화의 장르를 강화하는 장치인 동시에 매우 현실적인 지혜의 은유도 된다. 사소하고 무용해 보이는, 나아가 말도 안 되는 일이 종종 우리 삶을 바꾸기도 한다는 어떤 진실 말이다.
영화는 후회 없는 인생은 없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이 '내가 실수로 한 선택은 작은 것에 불과했다'라고 생각하며 후회를 묻은 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간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친절해져라'라는 메시지
영화의 후반부에서 웨이먼드(조나단 키 쿠안)는 모두에게 '친절해져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세상과 싸우는 방식이라고도 한다. 영화가 제시하는 친절함의 이로움은 타인을 향한 것만은 아니다. 먼저 자신에게 너그러워지고 타협할 때 비로소 개인은 타인에게 친절해질 수 있다.
에블린은 지난날의 실수와도 같은 선택으로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을 비관하고, 다른 선택지를 꿈꾼다. 에블린은 자신의 삶에 환멸을 느낀다. 아버지에게 항상 인정받고 싶었지만, 자신이 자초한 일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자신을 속 썩이는 딸의 존재는 에블린의 삶이 마치 완전히 실패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친절해져야 한다는 웨이먼드의 말을 듣고 에블린이 가장 먼저 깨닫는 것은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법이다. 내면의 갈등과 그간 말하지 못하고 참아왔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 동성애자 딸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마음. 모든 것이 에블린이 자신 내면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며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 이를 시작으로 에블린은 타인에게 친절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짐을 덜어낸다.
영화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세탁소 세금 조사를 받는 에블린의 가족. 세금 계산조차 친절하지 않으면 진행될 수 없다. 에블린은 멋진 자신이 있는 다른 세계로 점프할 수 있지만 그러지 않는다. 자신과 타협하고 타인에게 친절해지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