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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서하 Jul 14. 2024

Interesting point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보고 

“그 영화 어때? 재미있어?”


‘그 영화’를 본 적 있다고 밝힐 때 사람들은 서로에게 즉각 묻는다. 재미있었냐고. 혹은 재미없었냐고. 자주 그 질문 앞에서 말을 잃는다. 재미, 그리고 있음 혹은 없음. 두 쪽 다 내가 답하기엔 어려운 문제라. 재미는 주관적이고 있음과 없음은 다만 불투명도 조절의 문제 아닌지. 때문에 그 질문은 종종 서로가 영화에게 주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논하자는 말처럼 들렸다. 그럴 리 없었겠지만. 때로는 건방지게도, 질문을 한 이와 나 사이에 거대한 함정이 용광로의 형태를 한 채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고 느끼기도 했다. 그럴 때면 들끓는 붉은 아가리를 무시한 채 눈을 질끈 감고 한 2초간 고민하는 척하며 저 멀리 매끈하게 깔린 회색 아스팔트 도로 위로 돌아걸어갔다. 그리고는 그와 나 사이 새하얀 횡단보도를 밟는 편을 택했다. 


“응, 좋더라.”


좋다는 말 뒤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그래도 용암의 아가리보다는 낫지 않은가. 휭휭 새어나가는 바람을 보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좋았고 어떤 점은 나빴고 아니 좋지 않았고 그러니 이러저러했다고 말하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영화뿐만은 아니었다. 구태여 내 입으로 손으로 뭔가 덧붙이고픈 욕망을 일으키는 것들이 좋았다. 주절주절. 허둥지둥. 그런 것들 뒤에 붙는 말들을 대강 뭉뚱그려  ‘좋다’고 말하며 웃어넘기곤 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것’들이 늘어갔다. 그렇게 뭉뚱그리다보면 사분면 위 어딘가에 무작위로 점찍혀있는 것들도 크게 보면 반반으로 나눠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보고 나오는 길,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사람들이 말했다. 야 나 지루해 죽는줄? 완전 졸았잖아. 나도 근데 그 소리는 뭐야? 개무서워. 내말이. 아 재미없고 졸린데 무서워 존나 희한하네. 자다 깨고 자다깨고 난리였어 이게 뭐임?  닫힘버튼을 세 번 누르며 생각했다. 어쩌면 당신들보다 더 적확하게 영화를 본 이들은 없을 거라고. 귓가엔 자꾸 우웅-우웅-하고 영화 속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영화는 많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폭력적일 수 있는지, 극한의 폭력 속에서 또 한 편에선 인간이 얼마나 인간일 수 있는지를 역사적 사실에 기대어 동시에 보여주는 게 주된 구성이었다. 둘의 낙차 속에서 우리는 쉽게 끔찍해하고 쉽게 울고 간편하게 추억했다. 학창시절, 학교에선 방학 전후 수업 시간에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이라던가 <인생은 아름다워>같은 영화들을 틀어줬다.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이라던가 이 이야기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같은 건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저 ‘좋은’영화니까 잘 봐두라던가 소감문을 써서 제출하라는 식이었고 난 또 말 잘듣는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잘 보고 잘 울었다. 잘 감명받고 잘 써서 내면 끝이었다. 대개 이런 영화에서 감동을 느끼는 것은 되려 현실과 영화 간의 괴리를 담보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우리는 여긴)다. 논픽션 위의 픽션이 주는 안전지대에서 우리는 감정에게 편안하게 자리를 내어줄 수 있다. 물병을 감싼 손수건을 풀어 눈물을 찍어내면서 어린 나는 그저 감동적인 영화였다고, 정말 재미있었다고 생각했다. 재미있었다고 말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우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관리 소장 회스와 그의 가족들이 수용소 담벼락 옆에 위치한 사택에 사는 모습을 바라본다. 아름다운 미술, 매끈한 화면, 섬세한 건축, 눈부신 자연과 평온한 일상. 평화롭고 아름다운 화면 위로 홀로코스트의 비명이 난무하다. 시각과 청각의 괴리는 절대 좁혀지지 않는다. 아기와 개만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제대로 감각하고 있는 듯 시종일관 울거나 분주하다. 정교하게 직조된 사운드는 다름 아닌 영화관 좌석에 앉은 이들을 불안하게 한다. 뭔지 모를 고함과 비명 그리고 기계음이 반복되는 동안 화면 속 다른 사람들은 마치 진공 상태에 사는 것처럼 거의 모든 것을 모른척하며 필사적으로 행복하다. 시체가 타는 냄새, 검게 피어오르는 연기, 멎지 않는 고함, 수 개의 언어로 흩어지는 비명, 가스실을 가동시키면서 나는 기계음. 모든 잔혹함은 80년 후 어느 쾌적한 영화관에 앉아있는 관객의 몫이 된다.







그러나.




그러나 내가 그리고 당신이 이 잔혹함을 정말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가. 감당하고 있다는 착각은 과거와 현재를 분리하는 오만함에서 비롯된다. 이런 식의 깔끔한 감상은 일면 비열하지 않은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내가 모를 수많은 내전. 알지 못했다는 말은 비겁하고, 몰랐다는 말은 무책임한 모든 일들 앞에서 나는 결국 회스가 되고 헤트비히가 된다. 영혼의 모든 구멍을 틀어막은 채 사는 그들의 얼굴이 스크린에 비칠 때 스크린이 거대한 거울처럼 느껴졌다. 내가 자리한 모든 곳이 zone of interest였다. 




영화관의 불이 켜지자 울고 싶어졌다. 회스의 구역질은 뒤늦게 내게 옮았다. 겨우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며 이 영화를 어느 사분면에 점찍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이 영화는 1. 재미없고 2. 무섭고 3. 잔혹하며 4. 아름다워 보이고 5. 실은 그렇지 못하며 6. 난리다. 가장 무서운 지점은, 이 이야기가 누군가의 말처럼 7. 지루하게 느껴지는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누가 이 영화가 어땠냐고 물으면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대강 뭉뚱그려 좋은 편에 치워둘 수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영화관에 들어가라고 말해야지. 그리고 나와서 나와 함께 세상을 다시 보자고 말해야지. 그런 미래밖에 약속할 수 없었다. 정말 비겁하지. 이것마저 나의 interest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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