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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nna Nov 13. 2021

서른의 겨울

꽃밭에서는 안녕한가요?



젊고 찬란하고, 재능 많은--그러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청춘들을 이따금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따뜻하게 햇살이 드리우는 드넓은 꽃밭에서 그 따뜻함을 온몸으로 맞이하고 있는 상상을 한다. 사후의 세계를 천국과 지옥으로 이분하는 쪽이든, 죽으면 그저 바람에 부서지고 물에 뒤섞여 땅으로 분해되는 유기물질일 뿐이지 하는 쪽이든 죽음 이후의 장소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생각을 하든 거기에 그런 화사한 꽃밭이 하나 있기를 사람들이 나와 같이 소망하고 믿어 주기를 바란다. 매번 쨍쨍할 순 없어 이따금 비와 눈이 내려도, 그건 꽃을 피우고 언 땅을 녹여 봄이 오게 하기 위함인 그런 세계관에서, 이른 나이에 떠나지 않았더라면 느낄 수 있었던 여생의 충분한 기쁨과 즐거움을 거기에서 가지고, 반면 떠나지 않았더라면 이어졌을 고뇌와 고통은 떠남으로써 함께 놓아둘 수 있었으면 한다.


떠날 거면 따뜻한 날에라도 떠나지, 옷깃은커녕 시선조차 스친 적 없이도 자신의 부재로 하여금 나를 하염없이 서글프게 하는 이들은 내 서러움에 한몫 보태며 굳이 굳이 추운 날에 떠났다. 가을도 있고 겨울도 있었다. 사실 가을의 날씨는 그다지 춥지는 않았는데, 아니 오히려 한국에서 가장 날씨가 좋은 시기가 아니던가, 그 시원함을, 숨을 턱턱 막히게 하던 빌딩 유리들에 단풍이 비쳐 만드는 빨간 흔적들을, 코끝에서 기분 좋은 탄내음을 주는 건조함을 조금은 느끼다가 가지, 그랬으면 마음이 조금은 바뀌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싶은 것을 보아하니 따뜻한 날이었더라도 나는 또 다른 사유의 슬픔을 느꼈겠지만 그럼에도 추운 날에 떠난 것은 나를 너무나도 울적하게 한다.


그 안에서는 덕분에 가슴 따뜻해진 추억을 만들어준, 좋아했던 이도 있었고 존재는 알았으나 별다른 애정이 없었던 이도 있었다. 애정이 없었다고 해서 별다른 반감을 가졌던 것도 아니고, 그냥 특별한 인식의 대상이 아니었던 이들, 그러나 존재를 알았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친밀감을 가졌던 이들이 있다. 좋아했던 이와 나 혼자 친밀했던 이들이 나의 꽃밭에 함께 갔음을, 꽃밭보다 가까운 내 현실에 의식 저 먼 곳으로 밀어 두었다가 불현듯 한 번씩 떠오를 때면 처절한 감성에 부딪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은 주로 추울 때에 왔다. 몇 해 전 1월 13일 새벽이라는 곡의 가사를 썼을 때도 바로 이런 부딪힘의 순간이었다. 2018년이었는지, 19년이었는지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언젠가의 1월 13일 차디찬 겨울의 늦은 새벽, 꽃밭으로 간 나의 일방적인 인연들이 생각나 못내 눈물지으며 그 가사를 썼고, 메모장에 남긴 기록이 그대로 가사와 제목이 되었다. 추운 밤이었다.


아직 스물몇 살이던 시절에는 '왜?'라는 의문이 동반했는데, 어른이 되기엔 아직 먼 나이이지만 어림의 범주에 머무를 수도 없는 나이에 닿으니 그들에게 더 이상 의문은 가지지 않게 되었다. 그들을 추모하는 노래를 들으며, 몇 해가 지났어도 여전히 노래 중간중간에 울컥울컥 감정의 솟음을 숨기지 못하는 가창자들을 보며 그들도 그들 나름의 꽃밭을 만들어 떠난 이들이 천국이나 지옥이란 지극히 이별스럽고도 먼 곳이 아닌, 그다지 멀지 않으면서도 따뜻한 곳에 머물러 있다고 믿고 있겠구나, 하게 된다. 멀지 않은 곳에 그들을 두었기 때문에 눈물이 나는 것이라고, 따뜻한 곳에 그들을 두었기 때문에 날씨가 추워질수록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면서도 계절의 변화를 같이 느낄 수 없으니 조금 더 서글픈 것이라고.


서른의 겨울에 꽃밭에 간 이들을 떠올리면서는 '당신은 여전히 참 많은 사람들을 울린다'하며, '당신의 여생을 대신하여 우리가 눈물을 흘리니, 꽃밭에서 행복하게 살아라' 생각한다. 슬프지만 마냥 슬퍼하지 않고, 이제는 소용없는 무의미한 시간의 되돌림을 상상하는 대신에 그들의 현재는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동시에 남겨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러니 다시 한번 그들을 아는 사람들이 저 어딘가에 흐드러지게 만개한 화원이 있기를 나와 함께 소망해주길 바란다. 그래야만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도 달래 진다. 떠났다는 슬픔이 지금 이 자리에 함께 있지 못한다는 아쉬움의 결로 서서히 번져 적당한 울적함과 그리움으로 블랜딩 될 수 있어야만이,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를 어둡지 않게 말할 수 있게 되어야만이 슬픔이 고통으로 변질되지 않는다. 고통으로 변질되는 추억은 상처가 되고 상처는 마음에 깊은 흠집을 낸다. 흠집이 나면 스칠 때마다 닿을 때마다 아파서 매 순간 떠오르겠지만, 더 이상 곁에서 새로운 추억을 쌓을 수 없는 이들이라면 쓰라려하며 매일을 추모하는 것보다 나날이 쌓이는 새로운 기억들 속에 같이 흘러 들어가게 두었다가 이따금 꺼내어 보는 것이 낫다.



서른의 겨울, 아직 어른이 되기에는 먼 나이에,

줄곧 구구절절 이야기했지만은 그래도 기왕이면.


우리는 봄이 오기 전에 한 번,

볼 수 있었다면 좋았겠다, 한다.


날이 밝기 전에 모두 잠들었을 때,

꿈에 한 번 나와 꽃밭에서의 삶은 따뜻하다고 이야기해준다면 좋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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