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희원 Jul 03. 2022

언어라는 안전망

난… 슬플 땐 글을 써 ^^

철 든 뒤로 자신의 우울과 슬픔에 대해 마음껏 써 본 적이 있나? 없는 것 같다. 마음 한 구석에서 그런건 추잡한 글쓰기라고 말한다. 전시되는 슬픔은 가짜 슬픔이라고. 그리고 일말의 책임회피라고. 촌스러운 태도라는 비아냥도 들린다. 우울과 슬픔을 전면에 드러내면 부담스럽다. 감성이나 신파가 되어버릴 것 같다. 글을 쓰는 사람은 예민하고 우울하다는 스테레오타입도 거슬려. 게다가 나는 스스로를 약간 의심하고 있다. 어린 시절 기억 중 죽음이나 배제, 수치심과 관련된 것들이 너무 많다. 즐거운 순간도 많았을텐데 왜 이런 것들만 기억하는지. 혹시 자기연민적인 성향을 타고난 건 아닐까? 그래서 공연히 슬픔에 더 집중하는 거라면… 그저 자아에 장식적인 깊이를 더하고 싶어서?


근데 뭐 그렇다한들 별로 심각한 결함은 아니다. 나는 자기연민으로 인해 타인에게 위해나 폭력을 가한 적이 없고, 자신을 위해 글을 쓸 때 대체로 슬픔을 어찌저찌 수습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을 뿐이다. 아마 토로되어야 하는 감정이 있지만 차마 입은 안 떨어질 때, 눈물은 너무 극단적일 때 손이 대신 움직여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것 같다. 슬픔 말고 다른 감정에 대해선 그럴 일이 별로 없다. 분노는 글로 수습된다기보다 오히려 표출되고, 기쁨은… 그때 그때 표현하는가 보지? 솔직하게 웃으며 살고 있다면 그건 좋은 일인데 다만 자꾸 글로 단단하게 남는 건 슬픔이다보니 삶에서 슬픔을 더 많이 기억하게 되어버린다는 부작용이 있다. 그렇게 서글픈 인생만은 아니었는데도. 이러다 살면 살 수록 슬픔만 눈덩이처럼 불어나면 어쩌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요새는 뭔가 즐거우면 메모해두고 있다. 끝내주는 산책, 대화, 음악감상, 케이팝 따위가 있는 나날들이더라고. 조금 지루한가? 아무튼.


슬픔으로 인해 글을 쓸 때는 슬픔이 스스로 입을 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다른 것에 대해 적는 게 중요하다. 예컨대 고통과 성숙, 아픔과 치유, 권태와 농담, 상실과 무감각 등… 그리고 감정 바깥의 어떤 구체적인 순간과 장면들에 대해서. 특히 중요한 건 글의 동인을 감추면서도 말이 되게끔 쓰는 것이다. 단어들이 나름의 내적 질서를 지켜야 한다. 질서를 지키는 글은 통곡하거나 무너질 수 없다. 이럴 때 언어는 전 인류의 안전망 같다. 글을 한 줄씩 써내려감으로써 언어의 안전망 너머로 마음을 바라볼 때 나는 나의 어른, 나의 보호자다. 나는 슬픔을 이해하려고 마음의 바닥까지 곧장 떨어지지 않아도 되고, 그냥 무언가 적으며 슬퍼하는 나의 곁에 있어줄 수 있다. 언어를 통해서, 생각하면서. 슬픔이 삶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게 실은 무엇인지에 대해.


만약 신이 나타나 한 가지 소원을 묻는다면 나를 이 우주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해달라고 할 것이다. 이 생각은 우울증 증상이 아니다. 열 다섯 살의 마음도 아니다. 해묵은 지혜다. 의심과 수치심, 두려움은 인간으로 사는 이상 운명을 넘어 중력같은 것이고 나는 이것들로부터 어떤 의미도 찾을 수가 없다. 서사가 되든, 시가 되든, 역사가 되든, 사랑이 되든, 신이 되든 아무리 아름답고 숭고한 것이 되어도 너무 원초적이기만 하다. 그러니까 기왕이면 애초에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죽고싶다는 얘기는 아님. 태어난 이상 일단 죽기 싫다. 아니 잘 죽고 싶다.) 근데 언어가 있다. 모두가 모두와 함께 쓰는 공공재. 태어나서 엄마, 아빠, 이 세상에게 공짜로 받았다. 너무 크고, 또 고작 나만하고, 몸에 미달하고, 마음을 초과하는 이 믿음직한 유기체와 나, 우리는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래는 실패의 흔적들로부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