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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희원 Nov 07. 2021

산책-이별-휴식

3주 후 무렵의 하루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산책을 나섰다. 어제 세븐틴이 강원도 숲 속 펜션에 놀러 간 프로그램을 봐서 일어난 일이다. 방송에 나온 숙소가 어딘 지 찾아보려다가 웬만한 호텔보다 비싸고 예약도 어렵고 대중교통으로 갈 수 없는 데다가 노키즈존에 체크인 4시 체크아웃 11시라는 감성 숲 속 펜션들을 한 무더기 보고, 근처에 새로 생긴 북한산 럭셔리 리조트 패키지 예약 페이지까지 다 보고 나서야 문득 집 뒷산이 국립공원인데 아침에 산책이라도 하자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어디까지 걸을지 생각하지 않고 커피만 내려서 집을 나왔다. 좋은 마음보다는 귀찮은 마음이 커서 집 앞 천변 딱 5분만 걷고 돌아와야지 했다.


‘여름의 자연은 여러 가지로 좀 무서워. 소리도 너무 많이 나고, 축축하고, 이파리들은 잔뜩 커져서 서로를 침범하고 있는 것 같다. 가끔 여름 숲에 가면 여기저기가 좀 간지러운 기분이 들기도 하는데 어쩌면 알러지일지도…’


이런 생각을 하며 오랜만에 도착한 집 앞 3분 거리의 천변은 그냥 아름다웠다. 흐린 날씨. 계곡엔 물이 많았고 차가운 산바람이 불 때마다 건너편 시멘트 벽면을 따라 실속 없이 쭉쭉 자란 아카시아 나무들이 물결쳤다. 그렇게 무섭진 않았다. 물론 여기는 숲 속이 아니고 산 언저리의 아파트 단지지만. 어제 그런 펜션을 예약해서 가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도심 가까이에 살려나? 백화점이나 몰이 가까운 평지의 베드타운에 살고 있으려나? 그런 얄팍한 생각을 하면서 부스스 흔들리는 것들을 구경했다. 흐린 날의 엷은 그림자, 아직 가을이 아닌데 어디선가 굴러오는 낙엽들, 바위틈에 모여들어있는 참새들. 올해 초에는 산에 갔다가 정말 구름만 빼고 다 멈춰있는 것 같은 정적에 큰 위안을 받았는데. 자연은 고요하든 소란스럽든 좋구나. 시간이 존재한다는 걸 느끼게 해 주어서인 것 같다. 그냥 그걸 실감할 때 우주의 일원이 되는 느낌인가 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는 사람.


종아리가 간지러워 쳐다보니 다리가 많고 꼬리 끝이 갈라진 벌레가 태연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차분하게 떨궈냈다. 기어 다니는 친구들. 날아다니는 친구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친구들이라고 할 수 있지. 이이는 내가 살아있다는 걸 알고 올라온 걸까 몰라서 올라온 걸까? 다음엔 무조건 긴 바지에 양말 신고 나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너와 나 모두를 위해…


오후에 오랜만에 신경정신과에 갔다. 정기진료를 한 번 놓친 뒤 어영부영 한 두 달 안 갔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이 5개월 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물어봐서 좀 당황스러웠다. 자연과 달리 인간 세상의 시간은 나를 매번 이렇게 속여먹는다. 그냥 뭐. 몇 주 전에 오래 사귄 가족 같은 남자친구로부터 예상치 못하게 헤어지자는 말을 듣는 좀 큰일이 있었는데 그것만 빼고는 그냥 뭐 잘 지내요. 이 선생님은 꽤 상냥한 선생님이지만, 그래도 늘 전문가다운 적절한 절제가 배어있었는데 오늘만큼은 나를 안쓰러워하는 마음이 흘러넘치는 것 같았다. 과연… 과연 그런 일이로구나.


하긴 뭐랄까. 이별이라는 게 매 단계 단계가 무지 통속적인데 매 순간이 어이없을 만큼 낯설다. 아무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 홀로 버려진 고아가 된 것만 같은데, 이 세상에도 내 인생에도 별 일이 없다. 연애를 차치하더라도 이별과 상실은 태어난 이상 누구든 간에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겪어야하는 너무나 보편적인 경험인 동시에 절대로 끄집어내서 교차검증을 할 수 없는 경험인 것 같다. 그로부터 발생한 감정이나 이야기에 대해서만 끝없이 말하고 또 말할 뿐이다. 외로움에 대해서, 권력에 대해서, 상처에 대해서, 그리움에 대해서, 욕망에 대해서, 친밀감에 대해서 우리는 별별 방식으로 이야기해왔지만 상실 그 자체는 그냥 겪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건 그냥 부재니까. 고통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그마저도 부수적인 것이다.


병원을 나와서는 따릉이를 타고 을지로 작업실에 들러서 후루룩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장미랑 저녁을 먹었다. 그러곤 방에 누워 키우기 쉬운 식물을 한참 검색했다. 9월 30일이 오기 전에 오늘은 2021년 3분기 끝 날이 아니라, 그냥 자신이 조금 더 자라거나 어딘가가 시들거나 새롭게 생겨나거나 물이 마르거나한 날이라는 걸 알려주는 존재를 내 방 잘 보이는 데 두고 싶었다. 하지만 이 방엔 이미 인형이 너무 많아서 마땅히 식물을 둘 자리가 없다. 그리고 걔네한텐 다 이름이 있다. 먼지, 토순이, 새미, 볼프강, 말이, 곰돌이, 양미, 짜누피, 몽몽이…  짜누피는 검은색 천에 검은색 실로 눈코입을 만들어 넣은 새까만 스누피 인형인데 얼마 전에 솔로 빗질을 해주었더니 눈코입이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자연에서 시간은 무언가를 흘러가게 하는데 인공 장소에서 시간은 무언가가 고이게 한다. 먼지가 쌓이고… 책도 쌓이고… 메일도 쌓이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줄리아 페페와 산세베리아 문샤인, 피쉬본 선인장과 보스턴 고사리가 내게 줄 위안과 휴식과 산소를 상상했다. 그중 하나를 선택해서 이 작은 방에 들인다는 게 너무 무의미해. 대체 나는 뭘 하고 싶은 걸까? 그러고 보면 휴식도 상실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무조건 독점적인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점. 아무것도 할 기운이 없을 때 휴식의 시간을 가지는 건 그래서 너무 어려운 일이다. 휴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니까.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되 일도 하지 않고 억지로 쉬지도 않으면서 대충 돈으로 웰빙이나 감성 사고 가짜 만족에 취하지도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회복을 한다는 게… 얼마나 복잡한 일인지. 우리가 매일 매일 최소 하루 중 사분의 일은 의식을 잃어야만 하는 동물이라 정말 다행이다. 상실도 휴식도 다 어렵지만 잠은 저절로 온다. 그 마저도 가끔 잘 안 오지만 아무튼 오긴 온다. 잠은 너무 복잡한 현상이라서 과학적으로 원인이 규명되지 않았다고 한다.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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