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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희원 Jan 25. 2022

소거법으로 찾는 협력의 기술

거래도 동맹도 복종도 아닌

1.

‘협력’으로 메모장을 검색해봤는데 의외로 살면서 협력과 인연이 많았다는 걸 깨달았다. 직전 직장에서는 연구’협력’실장이라는 직을 맡았었고, 석사 논문의 주제는 사회적경제조직과 비영리 조직의 ‘협력’적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지금 일하고 있는 듣는연구소에서는 커뮤니티 기반 참여 연구(CBPR)라는 연구방법을 통해 연구’협력’자들과 함께 연구를 실행하기도 했다. 이쯤되면 협력에 대해 무엇이든 이야기를 해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왠지 이 주제 앞에서 문장이 도통 출발하지 못하고 있다. 왜일까? 긍정적 가치를 담은 단어를 중심으로 무언가를 시작하면 동상이몽에 비롯한 파국에 이르러 버릴 것 같다는 학습된 비관 탓인 것 같다.


2

협력을 하려면 일단 그 의미에 대한 합의부터 해야 한다. 안 그러면 사단이 난다. 예컨대 어떤 사람들은 협력을 ‘비즈니스’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프로’라는 말도 곧잘 사용하는 것 같다. 또 다른 사람들은 ‘협력’을 의리나 동맹이라고 여겨서 무조건적인 도움을 기대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생각들이 만나 협력을 하려들면 사기꾼과 냉혈한의 충돌이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정말로 협력을 하려거든 재학습이 필요하다. 내가 지켜온 규칙의 특수성을 자각하고, 상대는 지금까지 어떤 규칙의 협력을 해왔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해야 하는데 이걸 명시적으로 주고 받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아마 그 규칙은 각자에게 의심의 여지 없는 ‘상식’으로 자리 잡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상식의 윤곽은 불협화음을 통해서만 그려볼 수 있다. 불협화음을 들어보기라도 하려면 말 같지 않게 들리는 말도 어떤 맥락 안에서는 말이 될 것이라고 믿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즉, 의심이 가는 상황에서도 의심하지 않기. 일단 믿어보기. 이때 믿는다는 것은 ‘이 몸이 한 번 믿어 볼테니 증명해보시지’가 아니라 그 믿음으로 인해 내가 손해를 입을 수 있다는 것까지 감수하는, 적극적인 신뢰를 의미한다. 그에 더불어 적절한 사과와 화해, 용서의 상황과 스킬도 염두해두는 게 좋다. 불협화음은 나도 함께 내는 것이니까.


3

사전에 공동의 언어로 목표와 규칙을 함께 다져나가는 것은 언제나 추천되는 교과서적인 협력의 기술이다. 법 중에 가장 강력한 법은 ‘내가 승인한 법’이기 마련이어서, 협력의 공간에서 직접 공동의 룰을 만들어 두면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상식적인 믿는 구석’이 만들어진다. 그런 것들이 때로 아주 결정적이고 중요한 지푸라기나 맞댄 백지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방법을 무력화하는 K-주문이 있으니 그건 바로 “바빠 죽겠는데”다. 바빠 죽겠는데, 이런 허울좋은 소리나 주고 받는 데 시간을 낭비하다니. 속으로만 생각하면 괜찮은데 말이 되어 돌기 시작하면, 목표도 규칙도 아무도 다시 돌아보지 않는 휴지조각이 되고 만다. 애초에 바빠 죽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면 좋겠지만 그게 어렵다면 바빠 죽겠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시간을 내어 만든 고귀하고 소중한 공동의 자원임을 상기할 수 있도록 애써보자.


4

사실 목적지를 명확하게 합의하고, 서로의 거리와 위치를 잘 설정하는 게 협력의 거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기술들이 필요한 지는 아직 모르겠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정말로 실행할 수 있을만큼 알고 있는지는 확신이 없다.


5

나는 협력 하고 싶은 일에만 협력해도 된다. 그래서 그렇게 하고 있다. 예전에는 어떤 협력 제안에든 기껍게 함께 했었다. 더해서 늘 ‘민폐는 되지 말자’는 마음을 먹었다. 나의 상담 선생님은 내게 그런 마음이 좀 가혹하다고 말했기 때문에 왜 가혹한 마음을 먹게 되었나 생각해 본다. 어릴 때는 운동장에서 전교생과 동시에 하나의 자세로 협력하는 법을 훈련받았다. 나는 그 협력이 참 어려웠다. 산으로 체험학습을 가면 같은 속도로 협력해야 했는데 늘 맨 마지막에 뒤쳐져 선생님에게 이끌려 올라가고는 했다. 지금까지 그런 순간들을 기억하는 걸 보면 나 때문에 모두가 피해를 본다는 게 좀 괴로웠던 모양이다. 다시는 민폐가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은 그때보다는 복잡한 협력을 필요로 하는 어른이 되면서 수용적이라는 장점으로 승화(?)되었지만 그러다가 조금은 상처를 받기도 했다. 그래서 새롭게 익히고 있는 기술은 의심이다. 예전에 함께 일했던 이로부터 다시 같이 일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듣는 건 기쁜 일이지만 나는 이제 그때만큼 수월한 협력자는 아닐지도 모른다.


6

살다보면 상대의 복종만이 협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만나게 되기도 한다. 그런 협력에는 명확한 규칙이 없다. 대신 위와 아래, 그리고 나중과 먼저라는 질서는 있다. 내게 복종은 협력이 아니라 아래에 대한 착취고 위의 의존이기 때문에 그런 협력에는 참여할 수 없다. 의심이라는 기술에 대해서는 아직 할 수 있는 말이 이 정도 뿐이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협력은 무엇일까? 정리된 말은 없지만 아무튼 내가 보이는, 또 보이지 않는 수 많은 협력 덕분에 살아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 사실로부터 말미암아 사람은 개별적이고, 대체될 수 없으며,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일단 이것을 잊지 않고자 한다. 나에 대해서도. 남에 대해서도.



제주대 사회학과 대학원생 5인이 만든 팀 [스팸은 아니지만]의 뉴스레터 [과제는 아니지만] 1호 '협력의 기술'(2021.9.28)에 초대받아서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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