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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손이 Jun 24. 2021

엄마는 소심하면 안 되나요

- 소심쟁이 엄마의 고충

6살 아들을 키우고 있다. 친구들이랑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걸 너무나 좋아해 유치원이 끝나면 무조건 놀이터로 향한다. 놀이터만 들어서면 잡고 있던 내 손을 무심히도 놓아버리곤 미끄럼틀로 돌진한다. 나 또한 웃는 얼굴을 띄우며(요즘 마스크를 써서 잘 보이지 않더라도) 아는 엄마가 없는지 눈으로 살핀다. 그러곤 눈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본격적으로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사실 그때부터 나의 불편함이 시작된다. 


6살쯤 되면 엄마가 노는 아이를 졸졸 따라다니진 않아도 된다. 놀이터 밖으로 나가진 않는지, 미끄럼틀을 거꾸로 혹은 엎드려서 타진 않는지, 차례를 지켜 그네를 타는지 등 살펴봐주면 된다. 그래서 많은 엄마들이 눈으로 아이를 좇으며 수많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 오늘 유치원 생활부터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 아이가 힘들게 하는 것들, 시댁 이야기, 동네 새로 생긴 상가 등 주제는 무궁무진하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공통된 주제는 굉장히 위대하다. 몇 명의 아이를 키우든 간에 지금 그 아이는 유일하다. 같은 엄마의 뱃속에서 태어났지만 각자의 성향이 너무나 다르다. 지금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는 모두가 처음인거다. 모두가 유일하고 특수한 육아 상황에 놓인 만큼 궁금함도 많을 수 밖에. 서로 아이에 대한 특성을 이야기하며 서로 맞춰보고 확인하며, 새로운 정보를 얻어간다. 그리곤 '힘들지''괜찮아''잘하고 있어' 서로 위로를 건네고 응원을 한다. 


나도 다 알겠다. 나 역시 '우리 애가 왜 그럴까요?'하는 질문을 처음 만난 엄마에게 해본적 있다. 처음 만나 육아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위안을 받기도 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끝이라는 것. 

하루하루 아이를 돌보는 것만으로도, 난생 처음 엄마 노릇을 하는 게 힘에 겨워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엄마들의 관계 또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난 이미 학창시절과 사회생활 속에서 만난 사람들로 충분했다. 그런 줄 알았다. 


결혼을 하면서 태어나고 30년 동안 자란 고향을 떠났다. 고향에서 2시간 가량 떨어진 곳이고, 그래봤자 대한민국 땅일 뿐인데. 마치 바다한가운데의 섬, 우주의 작은 행성, 이름모를 다른 나라에 놓여있는 듯 했다.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남들보다 어렵고 힘들게 아이를 만났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아이가 없었다면 나와는 전혀 접점이 없이 살아갔을 법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시작됐다. 쉽지 않았다. 어려웠다. 

 

엄마가 되면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처음 만난 사람과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수줍음 따위 낯가림 따위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됐다. 제왕절개 후 배를 부여잡고 링거를 꽂은 채 들어간 병원 수유실부터 그랬다. 서슴없이 젖가슴을 드러내고 내 유두의 생김새며 크기 등이 수유에 적합한지 평가를 들었다. 뭐 엄마니까. 사실 그때는 수유만 할 수 있다면, 아이가 내 모유를 먹을 수만 있다면, 염원과 열정이 가득할 때였으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본격적인 시작은 산후조리원 수유실이었다. 그저 그즈음에 갓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 하나로 모여 이름 대신 아이의 태명을 부르며 이야기를 나누는 곳. 아주 자연스럽게. 몇 년을 만난 사이처럼 말이다. 낯설기만한 육아라는 세계 속에 놓여 방황하는 나에겐 너무나 유익하고 유쾌했다. 하지만 모유수유의 어려움으로 첫 번째 육아 위기를 겪었던 탓이었을까, 너무 빨리 와버린 산후우울증 때문이었을까. 어느 순간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강박이 커져갔다. 이 화기애애한 대화에 끼지 않으면 안 될 거 같고, 금세 친해진 엄마들을 보며 소외감도 느꼈다. 나도 어디 가서 성격 좋다는 얘기 많이 들었는데.... 이건 뭐지 싶었다. 


요즘 놀이터에서 나누는 엄마들과의 수다가 그렇다. 흥미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지만 '아 그래요? 정말요?'영혼없는 리액션이 나간다. 아이로 가까워진 이 엄마와의 대화의 깊이는 어느 정도여야 할지 모호해진다. 가끔은 대화의 깊이가 너무나 얕고 가벼워서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훅 사라져 버릴 거 같다. 또 대화의 빈틈은 너무나 어색해 용납할 수 없다. 기어이, 굳이, 대화거리를 찾아내서 끌어내고 만다. 그러면 내 모든 기운이 소진해버리면서 지친다. 물론 말 한마디마다 의미와 생각을 담을 필요도 없고 목적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적어도 나와 나눈 이야기들이 그저 바람처럼 흘러가버리진 않았으면 하나보다. 


그럼 마음 깊은 곳까지 헤아려주고 깊은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들면 되지 않냐 할지도 모른다. 슬프게도 누구에게 먼저 손 내밀지 못한다. 나의 호감이 상대방도 같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괜히 내가 귀찮게 하는 건 아닐까하는 걱정까지 이어진다.


그래!!! 난 소심쟁이다!

수줍음도 많고, 낯도 가린다. 처음 만난 사람과 쉽게 이야기 나누지 못하고 나보다 나이가 어려도 쉽게 말을 놓지 못한다. 사람들이 싫은 게 아니라 어려운 거다. 만나는 사람마다 말투와 표정에도 하나씩 반응하며 내가 혹여나 좋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봐,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하고 염려한다. 겉으로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 사람 좋은 웃음으로 날 감춘다. 아들이 땀 흘리며 신나게 놀고 있는 동안 난 진이 빠지고 억지웃음에 표정이 굳는다 그리곤 또 되씹는다. 내가 잘못한 말은 없는가, 실수하진 않았나 나에 대한 호감이 어느 정도였나, 나를 별로라고 생각하지 않나 등등  

내가 생각해도 바보 같은 짓을......... 40살이 된 올해도 하고 있다.  

아이를 낳은 엄마도, 40살을 먹어도, 아줌마도 소심할 수 있는 거잖아요~ 

뭐 아줌마라고 다 수더분하고 털털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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