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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레네 Feb 03. 2023

위인전기를 선물한 남자

59년생 돼지띠 김준수에 관하여 


*표지사진: 사진: UnsplashDavid Lezcano



59년생 돼지띠 김준수는 둥글둥글한 얼굴에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는 평범한 가장이다. 또한 가방끈을 스스로 싹둑 자르고 일찍 일을 시작한 오남매의 맏형이자- 조금 게으른 노동자, 당근마켓 중독자, 그리고 나의 아빠이기도 하다. 그를 떠올리면 미운 감정과 약간의 한심함이 가장 먼저 피어나다, 종국엔 알 수 없는 애틋함이 남는다. 이 애틋함의 기원엔 내가 아주 어렸을 적, 그러니까 막 국민학교-초등학교가 아니었다!-를 입학했을 무렵의 어느 날이 자리잡고 있다.


"너는 사람이 뭘루 만들어 지는지 알어?"


예상치 못한 심오한 질문에 내가 눈을 껌뻑이자 아빠는 오동통한 팔을 꼬며 말을 이었다.


"나랑 니 엄마가 너에게 육체를 만들어 줬지만은, 엉? 그렇지만 이 정신만큼은 말이야, 우리가 어쩔 수가 없는거거덩. "


아빠의 진지한 표정에 나는 코를 후비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책장에 시선을 던졌다. 책 이외의 모든 것이 놓여 있던 책장에, 처음으로 약 예순 두 권의 책이 꽂혀 있었다.


"그거는 말이야, 이 책으로 채울 수 있는 거거덩. 엉?"


붉은 빛이 나는 나무 책장에 기대서며 아빠가 대답했다.

이런 경우, 보통은 세계 명작이라든가 아이들이 읽어야 할 필수 동화, 혹은 디즈니 전집 따위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아빠의 선택은 참으로 남달랐다.육십 두 권의 책 중 중 육 십 권은 위인전이었으며, 나머지 두 권은 인명 사전이었다.


출처: 알라딘 중고서점 검색


아빠의 선택이 먼 친척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결과라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그러나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나는 위인전을 닳도록 읽었으며 심지어 인명 사전은 줄까지 쳐가며 외워댔다. 그 곁엔 종종 아빠가 있었다.


"야, 이 노구치 히데요는. 팔이 이렇게, 이렇게 오그라들었는데도 말이야. 엉? 배앰-연구를 해가지고 말이야. 그 노벨상 후보까지 오른 인물인데 말야. 너는 사지가 멀쩡해가지구서는 공부를 게을리하면 되겠어, 안되겠어?"


아빠는 나의 훌륭한 위인전 메이트였다. 우리는 벽에 기대거나 방바닥에 엎드려 책을 읽고, 서로가 읽은 위인이 얼마나 대단한지 말하며 근거 없이 우쭐댔다. 결코 평탄했다고만은 볼 수 없었던 이 후 가정환경에서도 내가 아빠를 애틋해할 수 있었던 건 이 때의 기억 때문이다.


국민학교 1학년 1학기를 채 마치기도 전, 아빠의 사업 실패와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해 우리 가족은 찢기고 으깨졌다. 엄마 없이 단 둘이 집을 떠나던 날, 아빠는 인명사전을 몽땅 버렸다. 위대한 인생들은 우리의 손을 떠나 모두 남이 주워갔을 것이다.


아빠는 열심히 살았다. 코에 기름 때 묻혀가며 한푼 두 푼 모아 집을 사고, 그러다 또 날리고, 두번째 사랑을 만나 결혼하고, 지지고 볶고 데치고 무치며 살면서 자식 셋을 두었다. 위대하기 보다는 평범하기를, 행복하기 보다는 무탈하기를 바라는 소시민으로서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


이젠 나도 마흔을 앞두고 있다. 내가 알던 그 위인들이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아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다만 나에겐 자신의 인생을 묵묵히 어깨에 짊어매고 살아온, 가끔은 넘어지고 가끔은 미끄러지며, 또 다시 일어나 느릿하게 걸어온 아빠가 있다. 위인 전기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지만, 아빠는 세월이 흐를수록 나의 마음 속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다. 

내가 만일 위인전을 낸다면 그건 어쩜 아빠에 관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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