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황색 멜론 주스의 환상적인 단맛을 곱씹으며 버기카 탑승장에 왔다. 10인승 버기카에 다른 예약 승객들과 함께 탑승했는데, 식당에서 만난 한국인들은 다 어디 간 건지 이 차에 한국인은 우리뿐이었다. 나는 유원지 놀이기구도 옆이 뚫려있으면 불안정하다는 느낌을 받는데, 버기카가 딱 그렇게 생겼다. 가벼운 차체에 의지할 거라곤 느슨한 안전벨트와 문짝 대신 달려있는 기둥뿐인 데다, 탑승한 인원이 대여섯 명 밖에 안 되어서 차가 조금만 흔들려도 굴러다니기 좋은 환경이었다. 4인석에 달랑 둘이 앉는 바람에 둘 다 양쪽 끝에 앉아 기둥을 붙잡고 있었다. 그래도 근거리인데 별일 있겠나, 넋 놓고 달달달 가다 보면 사막 나오겠지 - 경운기 같은 승차감을 기대했던 나였다 -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출발한 지 10분도 되지 않아, 살려주세요! 를 외치는 두 사람이었다.
버기카 : 깜찍한 비주얼에 그렇지 못한 속도
TV에서 사람들이 버기카를 타고 달리는 장면을 봤을 때는 마냥 신나 보였다. 눈부신 하늘, 적당히 살랑이는 바람,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사막을 감상하는 여유 같은 게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실제로 버기카를 타고 사막을 달린 나의 감상은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는 이카로스가 된 것 같았다. 모험심, 동경, 이상향 이런 거 말고 위험을 향한 무모한 질주 말이다.
버기카는 '달달달달'이 아닌 '쿠콰콰콰' 소리를 내며 내달렸고 정면에서는 바람이 무서운 기세로 휘오오옥 푸다다닥 불어닥쳤다. 모래 알갱이와 내 머리카락이 사정없이 따귀를 때리고, 바람이 콧구멍을 후벼 파서 숨을 쉴 수 없었다. 관광이 아니라 모래 폭풍 속에서 문짝이 날아간 차를 타고 탈출하는 느낌이었다.
정면을 향해 앉아서는 도저히 숨을 쉴 수 없어 옆으로 돌아앉은 채, 한 손으로 기둥을 잡고 나머지 손으로 모자를 쥐며 실눈으로 주변을 힐끔거리는데 문득 기사님 얼굴에 단단히 씌워진 마스크가 보였다. 뭐야, 혼자만 대비하고 있었어! 기사님이 무사해야 우리의 안전도 보장받으니 다행이긴 한데, 난리통 속에 홀로 여유 있는 모습을 보니 조금 얄밉다. 대체 이 길은 언제 끝나는 거야? 쿠콰콰콰콰콰! 살려주세요! 휘오오오오!
모두의 스타일링을 공평하게 망친 광란의 질주 끝에 '진짜 사막'이 나타났다.
진짜 사막
짙푸른 하늘 아래 손으로 움켜쥐면 솔솔 소리를 내며 빠져나가는 고운 모래가 끝도 없이 펼쳐져있다. 하늘과 땅, 그게 전부다. 나는 나스카 로망도 그렇거니와 사막 로망도 별로 없었던 사람이었는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이렇게 절실하게 와닿은 적이 없었다. 내 상상 속의 사막은 하늘 아래 건물도, 나무도 없이 길게 이어진 땅이 막막하고 황량한 느낌이었는데, 사람들과 함께 있어서 그랬는지 햇살이 좋아서 그랬는지 마냥 신비롭고 아름답기만 했다. 이게 사막이고, '땅'이구나. 하늘이 뻥 뚫려있는 건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어떤 문명도, 생명체도 존재하지 않는 원초적인 땅의 모습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던 게 스스로 의아할 정도였다.
아무 생각 없이 찾아온 나의 감상이 이 정도인데 사막 로망이 있었던 뇽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늘과 사막에 온통 정신을 뺏긴 뇽의 천진난만한 뒷모습을 보고, 나는 서둘러 카메라를 꺼냈다. 그리고 그때부터 현재까지 뇽의 휴대폰 배경화면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인생샷을 찍었다. 보통 같이 여행 가서 내가 찍어 준 뇽의 사진은 팔 할이 망작이었는데, 이 사진 하나로 다 갚았다. 와카치나 사막과 함께라면 "야, 너두 인생 사진 찍을 수 있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하늘과 바람과 사막과 뇽
꽃청춘 멤버들처럼 고프로를 든 채로 와카치나를 외치며 빙글빙글 돌았다. 여기는 진짜 그럴 만한 곳이다. 100%는 고사하고 일부라도 이 풍경을 담아가고 싶으면 한 바퀴 돌아야만 한다. 이게 사막이었어! 모래 좀 봐, 세상에 너무 고와서 바닥이 푹신푹신해! 여기 주저앉아서 멍 때리다가 돌아가도 더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 버기카 투어의 핵심은 샌드 보딩이었기 때문에, 기사님은 감격의 순간을 대충 끊어버리고 모래 언덕으로 모두를 끌고 갔다.
샌드 보딩은 스켈레톤처럼 보드에 엎드린 채 모래 언덕을 활강하는 레포츠다. 솔직히 버기카 투어를 예약하면서 샌드 보딩을 할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TV로 볼 때도 이것만큼은 재미있어 보이지 않았다. '모험심', '운동 신경', '스릴' 같은 단어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인간으로서, 나만 빼고 모든 인류가 즐기는 레포츠라고 해도 포기했을 때 전혀 아쉬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생각일 뿐, 기사님은 직업의식이 필요 이상으로 투철한 분이어서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용납하지 않았다. 때마침 나는 에스빠뇰을 못하고, 주변은 숨을 만한 나무 한 그루 조차 없는 뻥 뚫린 사막이다. 가파른 언덕 아래로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는 모습을 불안하게 지켜보던 나는 끝내 보드 앞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모래 언덕의 경사는 보드에 엎드려서 내려다보니 더욱 가팔라 보였다. 아무래도 무사하지 못할 것 같은데 도무지 이 상황을 벗어날 방도는 없고, 아차 하는 사이 보드는 출발해버렸다. 급경사에 모래는 빙판처럼 부드러워, 보드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질주했다. 버기카 이후 다시 재난 영화를 찍는 기분이다. 눈을 감아버리자니 위험할 것 같고, 속도가 너무 빨라서 무거운 몸뚱이가 휘청휘청했다. 왠지 보드에서 몸이 점점 벗어나는 느낌이 들어서 자세를 살짝 고쳐 잡으려고 하는 순간, 내 몸은 보드와 이별한 채 각자 데굴데굴 굴러 목적지에 콱 소리를 내며 처박혔다.
머리가 얼얼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다행히 피 나는 데는 없었다.버기카에서 한껏 바람을 맞고 뒤집혔던긴 머리카락에 모래까지 뒤엉켜, '와카치나의 망령' 비주얼 완성이다. 이 사막에서 매일 밤 귀신이 나타난다면 딱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온몸 구석구석에서 모래가 사르륵사르륵 떨어졌다. 어렸을 때 해수욕장에서 모래 놀이할 때도 이 지경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딱 세 장 챙겨 온 티셔츠 중 한 장을 이렇게 끝장내버렸다.
가랏! 쫄보
먼저 내려간 사람들이 괜찮냐고 물어보는데, 안 괜찮았지만 혼자만 처박힌 게 창피해서 괜찮은 척했다. 내 뒤로 내려온 뇽도 별일 없었다. 기분이 영 별로였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겠나, 잊어버리자.
그렇게 마무리하려는데 왜 또 저를 태우시나요, 기사님! 심지어 이번 코스는 2단 언덕이다. 멀리서 사람이 두 번이나 덜컥덜컥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니 더 타기 싫어졌다. 아까 장렬하게 처박히는 모습을 봤으니까 권하지 않을 줄 알았건만, 이 분의 근성이 유난인 건지 페루 사람들이 집념이 강한 건지 도대체 예외가 없다. 나는 안 타도 될 것 같다고 손사래를 치는데, 기사님은 조금도 물러섬이 없이 "네가 아까 몸을 흔들어서 그렇게 된 거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 문제없다"라고 바디랭귀지를 섞은 잔소리를 하며 기어이 또 태웠다. 이번에는 정말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죽은 듯이 붙어있었더니 무사히 도착했지만, 보드 위에서 뭘 본 기억은 없다. 인생에서 절대 해볼 것 같지 않은 경험을 하게 해 준 점에서는 기사님께 감사하지만, 훗날 와카치나에 다시 오게 되어 샌드 보딩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든 피하고 싶다. "건강이 좋지 않아 샌드 보딩은 생략하겠습니다"라는 문장을 에스빠뇰로 꼭 익혀놔야지.
온몸가득 모래를 품은 채 다시 버기카에 실려 쿠콰콰콰 달려가다가 도착한 최종 목적지는 오아시스가 보이는 뷰포인트였다. 광활한 사막 한가운데에 하늘을 닮은 샘이 있고, 나무와 건물들이 둥글게 주변을 감싼 모습이 완벽한 그림이었다. 아까 점심식사를 하고 돌아다니며 구경했던 그곳이 멀리 점처럼 보인다.
사막의 꿈, 오아시스
사람 사는 마을이 사막에서는 이렇게나 작은 부분이라는 사실에,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절로 샘솟았다. 이런 건 오래도록 보고 눈에 담아 가고 싶은데, 시간이 없다는 사실이 속상했다. 석양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별이 가득한 밤하늘도 장관일 텐데. 아쉬운 걸 꼽아보면 끝도 없다. 짧게 머물렀지만 페루 여행을 떠올렸을 때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장면이 와카치나의 사막, 오아시스다. 여긴 반드시 일박을 계획하고 와야겠다.
크루즈 델 수르 사무소로 돌아와 주섬주섬 배낭을 챙기는데, 처음 이 사무소에 도착했을 때 봤던 한국인 남자가 그곳에 혼자 있었다. 페루 여행 시작부터 지금까지 일관성 있게 꾀죄죄한 차림새의 나와 달리, 어떻게 챙겨 온 건지 옷이 너무 깔끔해서 기억이 났다. 그분도 아까 우리를 봤었던 모양인지, 다시 '타국에서 만난 고향 사람' 모드로 인사를 나누었다.
서로 여행 잘하라고 덕담을 하던 중, 그가 문득 내 행색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샌드 보딩이 꽤 험악한가 봐요. 다 이렇게 되나요?"
"아뇨, 저만 그랬어요. 걱정 마세요."
다시 한번 결심했다. 와카치나에 또 온다면 '샌드 보딩은 생략하겠습니다'라는 문장을 반드시 외워 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