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에 도착한 뒤 처음으로, '조식'을 먹을 생각에 눈이 번쩍 뜨이는 아침이었다. 여행지의 숙소에서 먹는 조식은 그냥 식사가 아니다. 기내식처럼, 메뉴가 특별하지 않더라도 '여행지의 아침'을 추억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인 것이다. 대부분 시리얼과 과일, 빵, 커피 등으로 메뉴 구성은 비슷하지만 플레이팅과 조리법에서 호스트의 취향이나 배려가 느껴져서 좋다.
배낭에서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티셔츠와 청바지를 꺼내 입고 식당에 들어섰다. 커다랗고 고풍스러운 갈색 테이블에 파란색 테이블 매트와 새하얀 식기, 포크, 나이프 등이 정갈하게 세팅되어 있었는데, 중앙에 색색의 과일을 소담스럽게 쌓아놓은 접시를 둔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과일 덕후는 당장 안 먹더라도 눈앞에 과일이 잔뜩 쌓여있으면 부자가 된 기분이 든다.
분위기 완전 외국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어디서 인기척을 들은 건지 호스트가 나타나 빵과 햄, 치즈, 오렌지주스를 가져다주었다. 빵도 종류와 크기가 각기 다른 걸 접시 가득 담아주었다. 비주얼 면에서는 무엇 하나 흠잡을 것이 없는 완벽한 식탁이었다. 눈앞에 있는 주스를 맛보기도 전에 호스트는 커피도 마실 건지 물었다. 아니 그런 당연한 말씀을. 조식이란 무릇 다다익선이다. 자, 이제 맛을 볼까!
치즈 있고, 햄 있고, 버터랑 잼이 있는데 빵이 맛없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그 어려운 걸 이 집이 해냈다. 이렇게 정성스러운 차림새를 두고 혹평하기가 미안하지만 - 당시에는 티 내지 않고 열심히 먹었지만 - 확실히 우리 취향은 아니었다. 방금 냉장고에서 꺼낸 것처럼 차갑고 딱딱한 빵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게스트하우스는 보통 식빵 옆에 토스터기가 있고, 달걀을 곁들여주는 경우가 많다. 밥이든 빵이든 아침에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게 들어가 줘야 속이 편안하고 기운이 솟는 법인데, 이 동네 사람들은 우리와 정반대의 체질임에 틀림없다. 빵이 차고, 치즈도 차고, 햄마저 차다.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있는 아이스커피를 여기서는 잘 팔지 않는 이유를 이때 깨달았다. 커피 본연의 맛을 즐기기 위함이기도 하거니와, 이 식단에 아이스커피는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조합인 것이다.
그나마 커피가 따뜻해서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하며 국처럼 들이켰다. 커피는 정말 맛있었다. 우유를 넣지 않은 커피를 마시면 보통 속이 쓰린데, 신기하게도 페루에서 마셨던 커피는 맛이 엄청 진하면서도 속은 쓰리지 않았다. '풍미(風味)'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맛이다. 과일 주스도 와카치나처럼 생과일을 갈아서 만든 건 아니지만 맛있었다. 음료는 내 취향, 빵은 남의 취향이었다는 결론. 나는 평소 아침식사를 거르지 않는 사람이고 빵도 즐겨 먹는 편이라, 취향이 아니어도 어찌어찌 배를 채웠는데 밥심으로 살고 위장이 약한 편인 뇽은 별로 먹지 못했다.
친절한 호스트는 음식을 갖다 준 뒤 자리를 뜨지 않고 이것저것 먹어보라며 권했다. 껍질을 까기 귀찮은 과일은 손대지 않고 있었는데, 나의 게으름을 눈치챘는지 처음 보는 과일을 손수 반을 갈라 건네주었다. 껍질 색깔은 꼭 귤이나 오렌지과 같은데 안에 씨앗이 가득 들어있다. 호스트의 추천에 따라 그 씨앗을 스푼으로 떠먹었더니, 입안에 새콤한 맛이 가득 퍼졌다. 귤처럼 새콤달콤한 게 아니라 시원 새콤한 맛.
과육 대신 씨앗 가득, 신기한 과일 그라나디야
집에 와서 찾아본 이 씨앗 부자의 이름은 '그라나디야'로, 브릭스가 높은 달콤한 과일이라는데 내 기억 속에서는 해바라기씨 같은 식감에 새콤한 과일이었다. 아마도 아직 덜 익은 녀석이 걸린 게 아닐까 싶다. 언젠가 이걸 다시 먹어볼 기회가 생긴다면 하루 이틀 상온에서 묵혔다가 잘라야겠다.
오늘의 일정은 오전에 동네 구경을 하다가 비행기를 타고 쿠스코로 넘어가는 것이다. <꽃청춘>에서는 나스카에서 쿠스코로 직행했지만, 허리가 좋지 않은 뇽이 16시간의 버스 여행을 감당하기에는 부담이 큰 데다 혹시라도 버스 이동 중 고산병이 찾아오면 대책이 없을 것 같아 안전한 루트를 택했다. 쿠스코행 비행기는 리마에서 타야 하기 때문에 와카치나 사막 체류 시간이 확 줄었고 비용도 많이 들었지만, 다시 간다고 해도 우리는 비행기를 선택할 것이다.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풍경이나 산해진미도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다 부질없다는 것을 쿠스코 체류 기간 동안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아무튼, 쿠스코행 비행기 탑승을 앞두고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간단하게 동네 산책을 하기로 했다.
두 번째로 방문하는 케네디 파크는 그새 동네 공원처럼 친숙한 느낌이었다. 고양이들은 여전히 팔자 좋게 늘어져있었고, 울긋불긋한 꽃밭도 그대로다. 다만 처음 보는 모습이 있었으니, 앵그리버드처럼 붉은색 털을 가진 작고 동글동글한 새였다. 앵그리버드의 실제 모델이라는 홍관조를 본 적이 없어서, 이때만 해도 얘가 앵그리버드인 줄 알고 보물을 찾은 애들처럼 잔뜩 흥분했었다. 페루의 조류에 대해 검색해서 알아낸 이 아이의 이름은 '진홍색 딱새(vermillion flycatcher)로, 서식지가 남미란다. 앵그리버드는 아니지만 귀여운 걸로 가치를 다했다. 나스카에서 본 부겐빌레아와 더불어 선명한 빨간색의 이 새가 태양신의 후예들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미의 태양 같은 붉은 옷의 딱새
오늘까지 비가 오지 않게 도와주신 Parroquia La Virgen Milagrosa 성당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보내며, 우리는 어젯밤 숙소에서 추천받은 24시간 마트에 가보기로 했다. 해외여행 중에 시간이 나면 꼭 가보는 곳이 동네 마트다. 마트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일 것 같지만 막상 가보면 식료품 코너만 봐도 이색적이고 흥미진진하다. 재래시장과 달리 동선이 편한 것도 장점이다.
이 동네 마트에서 가장 신기했던 건 제과 코너였다. 아침에 먹었던 빵들이 다 그 곳에 있었는데, 비닐 포장도 뚜껑도 없이 에어컨 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진열대에 쌓여있었다. 쿨내가 진동한다는 표현은 이럴 때 써야 할 것 같다. 조식을 먹지 않은 상태로 구경했더라면 주민들이 이 상태 그대로 먹는다는 사실을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저 빵을 반 갈라서 프라이팬에 한 번만 스쳐도 먹을 만할 텐데, 아니 비닐 포장만 해놔도 좋을 것 같은데 입맛이 우리랑은 정말 딴판인 모양이다. 케이크들은 개별 포장이 되어 있는데 왜 식사용 빵과 타르트는 헐벗은 채로 진열대에서 식어가게 두는 걸까? 뜨거운 커피만 있다면 해결되는 건가? 끝내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이 동네 사람들의 위장은 확실히 우리보다 튼튼할 것 같다.
빵이 시려워, 꽁!
오히려 과일 코너에는 비닐이나 플라스틱 팩으로 예쁘게 포장해놓은 것들이 꽤 있었다. 열대 과일들 틈에서 아침에 먹은 과일들도 다 여기 있는 걸 발견했다. 이렇게 보니 현지의 맛을 종합 선물세트처럼 준비해 준 아침밥상이었다. 조식으로 만나지 않았다면 일부러 사 먹었을 것 같지 않아서 한번 정도는 좋은 경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내 위장은 적응을 못했지만 말이다. 수많은 과일 틈에서 그 유명한 치리모야도 발견했다. 후숙 기간을 생각하면 이때 사는 게 좋았을 텐데 곧 쿠스코로 떠날 생각을 하니 짐이 될 것 같아 아쉽게 구매를 미뤘다.
유제품 코너도 매우 화려했다. 크기와 종류가 다른 치즈가 냉장고에 가득하고 무려 1kg짜리 과일 요구르트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과일잼도 진열장 한 줄을 꽉 채웠다. 항상 집에 두세 종류의 과일을 구비해두는 나조차도 과일을 향한 그들의 진심을 이길 수 없을 것 같다 - 물론 빵도 종류와 양으로 따지면 엄청나게 많았지만, 헐벗고 있다는 점에서 애정이 사그라든다 -
고작 마트 한 바퀴 돌았을 뿐인데 정신을 차려보니 비행기 탑승 시간이 가까워졌다. 서둘러 숙소로 돌아와 배낭을 챙겨 나오려는데 복병이 나타났다. 프린터기가 고장나서 결제 내역을 출력할 수 없다며, 호스트가 꾸물거리는 것이었다. 이카 버스터미널의 나무늘보 직원이 다시 나타난 것 같아 아찔해졌다. 필요 없다는데 굳이 내역을 확인시켜 주겠다며 프린터기를 열심히, 느릿느릿 만졌다. 와중에 다음 행선지는 어딘지, 그동안 여행은 어땠는지 등 의례적인 질문도 던졌지만 똥줄이 타는 우리는 억지웃음 외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정말 이대로 버스를 놓치고 마는 것인가! 숙박비 내역에 대체 무슨 반전이 있다고 그렇게 출력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뽑아보니 반전이 있기는 있었다.
전날 밤 근사한 세단에 꼬질이 둘을 태워 안전하게 숙소까지 데려다주셨던 친절한 운전기사님께 감사의 마음 듬뿍 담아 택시비를 냈건만, 알고 보니 그 돈은 호스트에게 결제해야 하는 것이었다. 과연 기사님이 이 사실을 모르고 받아간 건지는 알 길이 없으나, 아무리 급해도 중복으로 결제할 만한 금액이 아니었다. 기사님이 받아간 돈은 50 솔이었는데 결제 내역에서는 100 솔로 둔갑해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침착하게 전날 미리 결제를 했다고 답했고, 호스트는 기사님과 삼자대면을 하는 대신 떨떠름한 얼굴로나마 체크아웃을 허락해주었다. 어느 나라나 수도에서는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걸까? 하마터면 50 솔을 그냥 날릴 뻔한 위기를 의외로 잘 넘겼다. 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