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고산병으로 시름시름 앓던 뇽은 산소통 덕분에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물론 나스카, 와카치나 에서처럼 활기찬 건 아니지만, 천천히 동네 구경을 할 만한 체력은 회복했다. 코코펠리에는 난방기기가 없어 밤공기가 약간 썰렁한 편이었다. 잘 때 체온이 뚝 떨어지는 뇽이 춥다고 해서 일부러 바짝 붙어서 잤건만, 바로 옆에서 산소를 빼앗아가서 그런지 오히려 숨 쉬기는 더 힘들었단다. 산소마저도 더 먹는 내가 씻으러 간 사이 겨우 제대로 잤다고 하니, 고산병 환자는 산소통과 핫팩, 혼자만의 산소 공간을 확보해 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뇽은 많이 나아졌다고 큰 소리를 쳤지만 안심이 되지 않아 내 가방에 산소통을 챙겼다.
오늘의 아침 식사는 여행 계획 짤 때 미리 알아본 '잭스 카페'에서 먹기로 했다. 쿠스코까지 와서 '호주식 브런치' 식당이 웬 말인가 싶지만, 여기는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를 대비하여 미리 알아봤던 '따뜻한 수프가 있는' 음식점이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국물이 생각나는 날!
숙소에 누워있다면 너무 아까울 만큼 날씨가 좋은 아침이었다. 하늘은 파랗고, 몽글몽글 큰 구름이 지평선 가까이 내려와 있었다. 관광지 인근의 숙소여서 그런지 거리에는 출근 인파보다는 노점과 관광객이 많았다. 잭스 카페로 가려면 이 동네의 중심부, 아르마스 광장을 지나 그 유명한 '12각돌'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야 한다. 아침 먹으러 가는 길이 아주 으리으리하겠군!
고지대 위의 고산에 사는 잉카인들의 위엄
산소통을 찾아 헤맸던 지난밤에 그냥 지나쳤던 모든 것들이 새롭게 보였다. 보도의 양 옆으로 곱게 채색한 낮은 건물들이 줄지어 있고, 정면에는 산이 있었는데 초록색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하게 마을이 들어서 있었다. 산은 고사하고 쿠스코 땅을 밟자마자 숨통이 막힌 외국인의 눈에 매우 경이로운 광경이다.
아르마스 광장은 탁 트인 전망의 중심에 잉카제국을 일으킨 파차쿠티 황제의 황금빛 동상이 우뚝 솟아있는 분수가 있고 그 주변으로 잘 정돈된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었다. 가장자리는 아치형 회랑으로 빙 둘러싸여 있으며 2층으로 들어선 상점들은 주변 유적들과 톤을 맞춰서 칠해 통일감이 있었다. 주황색 기와에 검은 세이렌 로고가 있는 스타벅스라니, 이 분위기는 못 참지. 오늘의 커피는 여기다!
카메라 화면에 몰아넣기 힘들 만큼 규모가 큰 광장이어서 역시 식후경으로 미뤘다. 잭스 카페 방향으로 좁다란 자갈길을 따라 걷다 보면 거대한 석벽을 만나게 되는데, 그 안에 12각돌이 있다.
숨은 12각돌 찾기
사실 나 혼자 찾으라면 못 찾았을 것이다. 아무리 방송에서 미리 봤다지만 이 많은 돌 중에서 한 번에 그걸 찾는 뇽의 눈썰미가 대단하다. 이 석벽은 12각돌 외에도 제각각의 크기와 각도를 가진 돌의 조합 전체가 인상적이었다. 생김새도 신기하지만 무엇보다 대지진도 이겨낼 정도의 견고함이라니. 경주의 첨성대와 석굴암도 그렇고, 현재 재현하기 힘든 과거의 흔적들을 보면 인류가 점점 진보하고 있는 게 맞는 건가 싶을 정도다.
누구는 근처에 13각돌이 있다고 하고, 심지어 14각돌의 사진도 돌아다닌다는데, 12각돌도 뇽이 알려주지 않으면 못 찾았을 나는 그냥 12각돌 인증샷을 찍고, 석벽을 풀샷으로 감상하고, 엄지 척하고 끝. 밥 먹으러 갔다.
따뜻한 식사가 그리울 때, 잭스카페
잭스 카페는 맛집으로 소문난 곳답게 관광객들이 제법 있었고, 청결했으며 영문 메뉴판을 갖추고 있어 편안했다. 따뜻한 단호박 수프로 속을 데우고, 쭉쭉 찢어지는 부들부들한 빵을 소스에 푹 찍어 신선한 샐러드와 함께 먹으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과일 주스도 빼먹으면 섭섭하니 각자 한 잔씩. 바나나 주스는 갈아 만든 거라 역시 생과일의 풍미가 좋았다. 배부르게 먹어놓고도 남의 테이블의 팬케이크와 커피에서 눈을 못 뗄 정도로 이 집 음식은 죄다 탐스럽게 생겼다. 아직 구경할 것도, 먹어야 할 것도 많이 남아있으니 다음에 팬케이크 먹으러 꼭 다시 오자고 약속하고 아쉽게 일어섰다.
식후 커피 한 잔 하러 바로 스타벅스로 향했다. 프랜차이즈의 무차별적인 침투를 반기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현지화 인테리어를 놓치고 싶지 않은 이 관광객의 모순된 마음이란. 상아색 벽면에 나무 난간이 달린 고풍스러운 자태가, 문 열기 전까지 제법 쿠스코 분위기를 풍긴다. 바깥 계단을 통해 2층 입구로 들어갔다. 창가에 앉아 아르마스 광장을 바라보며 커피 한잔을 할 수 있는 좋은 위치인데, 그놈의 계단이 말썽이었던가. 뇽의 고산병이 다시 도졌다. 정말 대비할 수 없는 질환답게 커피 주문하고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호흡 곤란이 밀려와 산소캔을 꺼냈다. 계단을 올라와서 숨이 찬 건지 아니면 실내로 들어오는 바람에 산소가 급격하게 줄어들어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자리에서 버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어서 신선한 공기를 찾아 도로 밖으로 나왔다.
잠시나마 아름다웠다, 쿠스코 스타벅스
여행 전 예방 접종을 하러 병원에 갔을 때 고산병 약 처방을 요청했으나 당시 의사 선생님은 처방을 해 주지 않았고, 나보다 먼저 페루, 볼리비아에 다녀왔던 오빠와 사촌 동생은 기껏 추천해 준 방법이 코카차를 마시고 휴식하는 것이었다 - 코카차의 효능에 대해서는 많은 여행 후기에도 나와있어서 나는 정말 약처럼 효과가 좋은 줄 알았다 - 혈기왕성할 때 여행을 다녀온 건장한 남자들의 민간요법을 30대 후반에 허약한 육신으로 여행을 나선 뇽에게 써먹으려고 했던 나는 반성한다. 오리온 마트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사람 잡을 뻔했지 뭔가. 나는 처음 쿠스코 땅을 밟았을 때 약간 호흡이 불편한 느낌을 받았으나 금방 적응했는데, 뇽은 쿠스코에 있는 내내 틈틈이 산소캔을 들이켜고 천천히 걸어야 했다. 고산병이 염려되는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기 전, 하다못해 비아그라라도 꼭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
아무튼, 고산병이라는 불청객이 언제 떠날지는 모르겠으나 이대로 쿠스코 관광을 포기할 만큼 일정이 넉넉한 우리가 아니다. 평상시 여행 패턴대로라면 새벽같이 나와서 광장에 있는 성당들 혹은 태양의 신전을 살펴보러 부지런히돌아다녔겠지만, 모처럼 '해외 뷰'를 바라보며 무계획적인 힐링의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다. 볕 좋은 날에 광장 벤치에 앉아 커피를 홀짝였던 그 시간이 의외로 좋았다. 비록 몸 상태는 시원찮지만 오늘만큼은 버스나 비행기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다. 이곳에서 마시는 공기도 페루 공기, 눈에 들어오는 산이며 회랑에 드러누운 개도 페루 개인데 이런 게 참 여행이지. 멀찌감치 보이는 기와지붕위의 수리공도 페도라를 쓰고 빨간 옷을 입은 모습이 그림을 보는 것 같다.
하늘을 누비는 기와 수리공
뇽은 본인의 컨디션이 맘 같지 않아 스타벅스에 머무르지 못하고 마음껏 돌아다니지도 못한다며 나에게 미안해했지만, 나로서는 티켓팅이며 길 찾기며 하다못해 컴플레인까지 도맡는 바람에 뇽의 건강이 나빠진 것 같아서 염려스러웠다. 고산병도 그렇지만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 아니던가. 병약하고 지혜로운 집사 뇽과 건강하고 어리바리한 반려견인 나는 오늘도 서로에게 의지하며 여행을 지속한다. 우리는 각자 치명적인 약점이 있지만 덕분에 감사할 줄 알고 기꺼이 양보할 수 있으니, 그 약점이 의좋게 지낼 수 있는 동력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다만 나중에 쿠스코에 꼭 다시 오고, 볼리비아로 건너가 우유니 사막도 보자고 약속했는데, 끝나지 않는 코로나도 문제지만 이때보다 훨씬 늙고 살찐 몸으로 과연 고산병 극복이 가능할 것인가 벌써부터 걱정스럽다. 노는 순간에 체력의 제약을 받을 때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노래가 절로 떠오른다. <꽃보다 할배>의 이순재 선생님처럼 고령에도 불구하고 파워 직진이 가능한 케이스가 있지만, 대부분은 세월의 공격을 피하기 힘든 것. 젊고 건강할 때 많이 보고, 많이 돌아다닐 수 있다면 좋겠다. 물론 젊고 건강할 때 보통 돈이 부족하다는 것이 함정이지만 말이다.
벤치에서 체력을 50% 정도 충전한 다음 천천히 광장을 배회했다. 쿠스코 대성당은 방문했을 때 예배 중이어서 사람들이 꽤 많았고, 정숙해야 하는 분위기라 내부를 자세히 관람하지 못했다. '최후의 만찬' 그림은 아예 보지 못했고 '검은 얼굴의 예수상'도 스치듯 본 기억이 난다. 이 성당에서 유명한 두 가지를 놓쳤지만, 대신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검색되지 않는 '악마를 때려잡는 천사상'은 인상 깊게 감상했다. 악을 처단함에 한치의 망설임 없는 저 냉정한 얼굴을 보라. 저렇게 혼나고 싶지 않은 인간들은 마땅히 착하게 살 지어다.
용서는 없다
무려 100년에 걸쳐 지었다는 이 멋진 건물이 잉카 문명의 위대한 창조신, 비라코차의 신전 위에 지어졌다고 하니, 성당의 웅장한 자태에 감탄하다가도 한편 씁쓸해지는 마음을 떨칠 수 없다. 아르마스 광장 안에 있는 유적들은 전부 잉카의 궁, 신전 위로 지어진 스페인 정복자들의 작품이라고 한다. 외세의 침략이 빈번했던 나라 사람으로서 '콜로니얼 건축(식민지의 주민이 모국의 건축을 본떠 세운 건축양식)'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불편하게 다가오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떨떠름한 기분은 파차쿠티 동상을 가까이에서 보고 난 후에야 조금씩 녹아내렸다.
광장의 중심에 우뚝 서서 찬란한 햇빛을 받고 있는 파차쿠티의 시선의 끝에 절묘하게 '쿠스코 예수상(Cristo Blanco)이 서 있다. 뇽이 사진을 찍다가 우연히 발견한 장면으로, 어느 쪽이 우세랄 것도 없이 각자의 자리에서 당당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잉카 제국의 영광의 흔적을 거의 찾아보기 힘든 옛 수도지만, 가장 위대했던 사파 잉카(유일한 잉카/지배자)가 그 자리를 지키고 서서 새로운 문명을 바라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대지를 뒤흔드는 자와 예수님의 만남
점심식사와 쇼핑을 나서기 전 비상용 산소통을 쟁여두기 위해 다시 오리온 마트에 들렀다. 지난밤 생명의 은인이었던 위대한 오리온 마트는 오늘도 산소통을 가득 품에 안은 채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치리모야도 있다! 이번에야말로 맛을 볼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두 알이나 집었는데, 문제는 이 두꺼운 껍질을 깔 만한 과도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치리모야 시식을 다음 기회로 또 미루자니 남은 일정이 종일 차를 타고 이동하는 패키지 투어와 마추픽추뿐이라 난감하다. 정 안 되면 코코펠리에 읍소해보기로 하고 일단 장바구니로 퐁당. 쿠스께냐 맥주도 발견했지만 묶음으로밖에 팔지 않아서 한참을 망설이다 포기했다. 대신 쿠스코에서 유명하다는 커피, '찬차마요' 원두가 눈에 띄어 같이 결제했다.
이제 막 길을 나서는 여행자들을 뒤로한 채, 코코펠리로 들어온 우리는 치리모야 봉지를 들고 대책 없이 식당에 올라갔다. 다행히 조식 때 제공하는 나이프가 아직 비치되어 있어, 에스빠뇰 모험 없이 싱겁게 일이 풀렸다. 치리모야를 절반으로 동강 내보니 하트 모양인 게 귀엽다. 새하얀 과육이며 까맣고 큰 씨앗이 정말 석가를 닮았다.
치리모야: 아직 때가 아니야
하지만 석가처럼 단맛을 기대하고 마중 나온 내 입에 당도가 그리 높지 않고 약간 퍽퍽한 과육이 불쑥 들어와 당황스러웠다. 세계 3대 미과라더니 이게 뭐람? 단지 취향 차이인가? 석가는 제법 잘 먹었던 뇽이 나에게 전부 양보하는 걸 보니 당도에서 실패한 게 확실하다. 분명 멜론 주스, 바나나 주스로 체험한 페루의 과일들은 달달했건만, 훨씬 칭송받는 치리모야가 어째서 실패란 말인가.
정답은 후숙에 있었다. 나중에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잘 익은 치리모야는 손으로 쪼개질 정도로 흐물흐물하단다. 사실상 과도도 필요 없었던 것. 맛있는 과일을 검색해 놓고 맛있게 먹는 법은 확인하지 않은 스스로의 게으름을 반성한다. 하마터면 내 인생의 과일들 중 맛없음의 카테고리로 내던져질 뻔한 치리모야. 그 설익은 맛이 처음으로 페루에 놀러 와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샌드 보딩에서 나가떨어지고, 남들 다 본 유적도 놓친 어설픈 여행자인 내 모습 같다. 아무렴 어떠랴, 설익었어도 치리모야고, 잘 몰라도 딛고 서 있는 땅이 페루다. 이 글을 쓰는 현재에 비해 '젊어서 노세'를 불렀던 우리는 이런들 즐거웠고 저런들 또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