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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뇽알 Oct 12. 2021

만년설을 마주하는 다랑이 밭, 계단식 영농!

페루의 계단식 논의 흔적, 모라이.

 어렸을 때 교과서에서만 보던 계단식 영농법. 페루는 지리적 특성상 고도가 낮은 곳은 사막화가 되어 있고 그나마 비가 오는 곳은 안데스 산맥을 따라 형성된 산지이니 좁고 비탈진 땅을 보다 넓고 경제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계단신 영농은 필수 불가결한 문제였을 것이다. 평야보다 산지가 더 많은 우리나라, 특히 강원도 지역에서도 널리 활용했던 흔적을 볼 수 있는 것을 보면 '농경생활'을 선택하여 집단을 이루기 시작한 인류의 본능적인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중간하게 해발 2,000m쯤도 아니고 왜 해발 3,400m나 되는 고지대에 그 다랑이 밭을 만들 만들었을까? 




얼마나 고지대 인지 만년설이 눈앞에


 친체로에서 모라이까지 가는 길은 꽤 걸렸다. 이게 멀미인지 고산병인지 모를 알 수 없는 고통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창가 자리에 앉은 알이 밖으로 무슨 설산이 보이고, 어떤 원주민이 보이고, 어떤 귀여운 라마가 보이는지 설명해줬지만 나는 거의 본 것이 없었다. 멋진 자연 풍광과 흔히 볼 수 없는 설산을 볼 때마다 나도 같이 보라며 손짓을 했지만 이미 제정신이 아닌 상황이라 고개를 돌릴 힘조차 없었다고 해야 할까. 정신을 차리고 싶어 이쪽저쪽 틈으로 보이는 창밖을 보다 보니 미니버스 앞쪽 창가 옆 1인석에 홀로 앉은 한 청년도 고산병에 시달리며 풍경이고 뭐고 볼 기력이 없어 보였다. 힘내세요. 당신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패키지 티켓의 재등장


 모라이에 도착하면 조금 전 친체로에서 구매했던 티켓을 다시 보여줘야 한다. 친체로, 모라이, 피삭, 오얀타이탐보를 포함한 패키지 입장권 구매를 권장해서 그것으로 구매했는데 요금은 한 사람당 70 솔(약 2만 원). 패키지로 묶여있는 것치곤 조금 비싼 편이지만 장소당 5천 원이라고 생각하면 '뭐 그 정도면 괜찮지' 하는 생각이 든다. - 물론, 다음날로 예약된 마추픽추는 아주 비싸다 -


 조촐한 입장 게이트를 통과하면 바로 커다란 구덩이, 계단식으로 정리된 테두리가 없었다면 운석이라도 떨어졌을법한 커다란 구덩이가 우리 앞에 바로 모습을 나타낸다. 이름도 귀여운 모라이. 동글동글 예쁘게도 생긴 페루의 계단식 농경지. 여기서 잉카인들이 농작물 재배 실험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 층마다 각기 다른 종의 씨앗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 재단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용도가 무엇인지 정확하지 않다 보니 설명할 소재가 끊어진 탓이었는지 우리들의 안내자 디에고는 대뜸 자신의 바로 옆에 난 알로에 같이 생긴 풀을 가리키며 '아가베'라고 알려주기 시작했다. 멕시코에서 테킬라 재료로 쓰는데 페루에 지천에 깔려있다는 설명을 덧붙이면서. 나는 이 모라이의 정체가 조금 더 궁금했는데 말이다. 



층마다 조그맣게 튀어나온 것들의 용도는 계단이 확실한 듯하다


 모라이를 비롯해 마추픽추, 나스카 라인 등 지금까지 내려오는 미스터리하고 장엄한 잉카의 유적들은 전해지는 뚜렷한 문자 기록이 없어 후손들은 여전히 갖은 추측을 이끌어낼 뿐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상황이 이와 같으니 '외계인 강림설'이 찰떡같이 달라붙는 것은 어쩌면 인지상정. 


 흔히 '잉카에는 후대에 남길 문자가 없었다'라고 알려져 있는데 안데스 산맥에 존재했던 많은 문명국가들에게 문자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에겐 조금 생소한 '결승 문자'라고 하는 색색의 끈을 매듭짓는 방법으로 숫자나 의미를 표현하곤 했는데 이 불완전한 문자 체계를 쓰면서도 불편을 느끼지 않았기에 구대륙의 정교화되고 가벼운 방법으로 - 종이에 먹으로 글을 쓰는 등 - 의사를 전달할 정도로 고도화시키지를 못했을 뿐이다. 다만, 그들의 결승 문자는 숫자를 기록하는데 최적화되어 있어 세금 징수나 재산 소유권 같은 대량의 수학적 데이터를 모을 수 있었다고 하니 그처럼 거대한 제국에 필요한 복잡한 행정기구를 유지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어쩌면 더 정교한 표현법이 있었지만 스페인 정복기 시기에 말살되어 해독할 수 있는 자도 전하는 이도 사라지게 된 것일 수 있다. 나의 눈에도 결승 문자는 그저 예쁜 매듭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잉카의 결승 문자 (라르코 박물관 소장)


 미쳐 용도를 알 수 없다는 이 모라이를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싶었다만 패키지로 인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30여분이었고 나는 여전히 두통에 시달렸다. 친체로보다는 조금이나마 낮은 지대로 온 영향인지, 고산병 증세가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이 움직일 수 없었다. 멀리 내려가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시간 안에 다시 올라올 자신이 없어서 내려가지 않았는데 내 옆을 지키고 나를 다독이는 알에게 역동적으로 움직이지 못해 미안하다 하니 자기는 안 내려가도 상관없다며 오히려 나를 다독여준다. 


"어휴. 저길 왜 내려가. 올라오다 죽어." 


 이렇게나 번잡스럽게 골골대는 나를 가장 먼저 챙기는 친구와 이 먼 곳에서 함께하니 나에겐 너무 다행이었는데 역시 미안한 마음은 감출 수가 없다. 언젠가 다시 남미에 가게 되면 그땐 반드시 건강을 조금이라도 회복해놔야겠다고 했지만 몇 년 사이 나이 먹고 더 병약해졌으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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