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앙 여행사 투어 세 번째 목적지, 살리네라스에 갈 차례인데 버스는 갑자기 웬 시장 인근에서 멈췄다. 무슨 행사를 하는 건지 북적북적 활기를 띤 풍경 속에서 경찰관이 나타나 다른 곳에 주차를 하도록 명령했고, 우리는 영문을 모르는 채 차에서 내렸다.
이곳도 일정에 포함되어 있었던 건지 디에고는 조금도 초조한 기색이 없이 시장 안으로 일행을 이끌었는데, 노점에는 페루에서 보낸 며칠 동안 충분히 봐 왔던 잉카 콜라와 쿠스께냐, 치차론이 가득했을 뿐 그리 특별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디에고가 발걸음을 멈춘 곳에 떡하니 자리 잡은 기념품샵은 매우 특별해 보였다.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인가! 패키지 투어를 하면서 쇼핑을 갈구하게 하다니, 이것이 파비앙 여행사의 가장 뛰어난 능력이 아닐까 싶다.
설레는 마음으로 지갑을 움켜 쥔 우리에게 디에고는 냉정하게도 15분이라는, 믿을 수 없게 짧은 시간만을 허락했지만 아쉬워할 틈도 없었다. 친체로, 모라이에서 그러했듯 살리네라스에서는 쇼핑 시간 자체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보이는 대로 미니 초콜릿과 소금 주머니를 집어 카운터에 소복하게 쌓아놓았다.
특히 살리네라스가 소금산인데, 거길 다녀오면서 소금 쇼핑을 빼먹는다면 천년의 후회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뭐가 좋은지도 모르면서 소금을 종류별로 다 집었다. 결말을 미리 얘기하자면 소금 쇼핑은 이후 귀국길에 LA공항에서 천년의 후회를 하게 만든 선택이 되었다만 말이다.
공교롭게도 우리 뒤에 서서 계산을 기다리던 사람이 와카치나 에서 모래 귀신같은 내 몰골 때문에 놀랐던 그 한국인 남자였는데, 그는 우리의 쇼핑 목록을 보고 두 번째로 놀라고 말았다. "무슨 초콜릿을 이렇게 많이 사세요?"
엥? 다들 이렇게 사는 거 아니었나?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사재기한 사람은 우리뿐이었다. 예상치 못하게 날아든 질문에 뻘쭘하게 웃으며 선물용이라고 얼버무렸지만, 사실 '시간 있을 때 사야 한다'라는 일념 하나로 미친 듯이 주워 담았을 뿐이다. 아니 쇼핑할 시간이 얼마나 귀한데, 물건을 따지는 건 사치야 이 사람아!라고 속으로 꿍얼거렸다.
잉카 문명과 기독교 문명의 사이에서
쫓기듯이 쇼핑을 마치고 나와보니 축제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기독교 성인 기념일이라고 한다. 복장이 화려해서 눈이 즐거우면서도 이 높은 곳까지 뿌리내린 스페인의 잔재가 떨떠름했다. 하필이면 그 축제 행렬을 향해 잉카인의 동상이 우뚝 서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버스를 타러 걸어가는 길에 음악대가 쿵짝쿵짝 풍악을 울리는 걸 보니 나름대로 큰 축제였던 모양이지만, 우리에게는 여유가 없다. 오직 다음 일정을 향해 달릴 뿐.
<아기 공룡 둘리> 만화 에피소드에서 지금까지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둘리와 친구들이 우주선을 타고 보석별에 도착했는데, 딛고 서 있는 땅이 온통 보석으로이루어진 별이어서 캄캄한 우주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둘리와 친구들은 욕심에 눈이 멀어 필요 이상으로 보석을 주워 담으려다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보석이 뭔지도 모르고 공기놀이를 하던 희동이만이 진짜 보석을 가지고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는 교훈 충만한 이야기.
나는 페루에서 그 보석별을 꼭 닮은 찬란한 소금산을 보았다. '산속의 염전'이라는 불가사의한 단어의 조합, 살리네라스였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 차창 밖으로 저 멀리 눈이 시리게 빛을 발하는 새하얀 산이 보였다. 만년설과는 달리 그냥 하얀 것이 아니라 반짝반짝한 광채가 정말 보석 같았다. 이때쯤부터 차츰 기운을 차린 뇽과 함께 차창에 바짝 붙어서는 저게 바로 살리네라스인가! 이렇게 멀리서부터 반짝거리다니, 비현실적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가까이에서 본 살리네라스는 상상 이상으로 드넓고 신비로운 풍경의 염전이었다. 이 날 보았던 모든 풍경 중 가장 놀라웠고 감동적이었다. 파노라마 기능을 쓰지 않으면 카메라에 담기 힘들 넓이의 땅이 선글라스를 끼지 않는다면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반짝였다. 이렇게나 찬란한 알갱이들이 우리 집 부엌 양념통에 들어있는 녀석들과 같은 놈들이란 말인가! 내 이토록 경건한 마음으로 양념통을 바라본 적이 있던가 말이다.
짠내 나는 보석, 살리네라스
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디에고가 염전 주변으로 졸졸 흘러 내려오는 물을 맛보라고 권했다. 평소 약수터 물도 안 떠먹지만 이건 뒷산 약수가 아니고 무려 30시간을 투자해야 맛볼 수 있는 레어템 소금물이니까 딱 한 방울 찍어 먹었다. 신비로운 비주얼과 달리 그냥 짰다. 아니, 좀 많이 짜긴 했다.
이렇게 소금물이 졸졸 흐르는 곳이 산이라니,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높은 곳에
지반의 특성을 이용해 염전을 일군 잉카인들의 지혜도 대단하거니와,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이 먼 옛날에는 바다였다고 생각하면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작고 유한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이곳에서 볼 만한 거라고는 오로지 염전뿐이었는데, 그것 하나를 떠날 때까지 멍하니 바라보았다.
살리네라스 진입로에도 기념품 노점들이 있었지만 여기서는 쇼핑을 위한 시간이라고는 15분도 허락되지 않았다. 급하게 사느라 선물용으로 소금 비누 하나밖에 못 챙겼지만, 그전에 들렀던 시장 기념품샵에서 소금 주머니를 한껏 쟁였던 터라 위안이 되었다.
이 사랑스런 나귀들을 데려오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로다.
파비앙 여행사 투어의 마지막 코스 오얀타이탐보에 가기 전, 우루밤바 빌리지에서 중식을 먹었다. 야외에 원두막처럼 생긴 간이식당이 마련되어 있었고, 여행사에서 준비한 뷔페가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이곳은 정말 식사 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었던 동네였고, 별일 없었다면 내 기억 속에 밥이 맛있었다 정도로 남았겠지만 하필이면 대형 사고를 쳐서 음식 대신 악몽 같은 기억이 자리 잡았다.
100% 나의 잘못이어서 솔직히 어디에도 발설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지만, 피해를 입은 분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적어 본다. 당시 나는 오전 내내 고산병으로 고생한 뇽을 자리에 앉혀놓고 알아서 음식을 챙겨 오겠다며 큰 소리를 쳤다. 뷔페에서는 1인분을 담든2인분을 담던 간에 어차피 나 혼자 제대로 들 수 있는 접시는한 개뿐이다.그럼 그냥 1인분만 먼저 담고 나중에 다시 오면되는데, 혹시나 둘이 먹다가 부족할까봐 처음부터 음식 양을 많이 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음식 종류가 많았고, 나는 사골국 이후 처음 먹는 식사니까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점점 욕심을 부렸다 - 평상시 빕스에서 쌓인 습관이 남았던 것일지도 -
크림소스로 버무려진 샐러드를 담을 때였다. 손에 힘이 빠진 건지, 집게를 잘못 잡은 건지 샐러드 일부가 내 접시를 벗어나 떨어졌는데, 하필이면 땅바닥도 아니고 내 앞에 서 있었던 어느 백인 여성 여행자의 다리에 튄 것이다. 검은색 레깅스를 입은 다리 위로 새하얀 소스가 떨어지다니, 가만히 서 있다가 그분은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안 그래도 영어를 못하는 나는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쏘리 말고는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샐러드 벼락을 맞은 피해자는 잠시 당황한 표정이었으나 어쩔 수 없다고 여겼는지 "It's okay"를 반복하며 돌아섰다. 손에는 접시가 있고, 뒤에서는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려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나는 일단 자리로 돌아와 휴지를 뽑아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휴지를 뽑고 돌아봤을 때 그분도 자리에 돌아와 레깅스 얼룩을 닦고 있었다.
음식 가지러 갔다가 왜 얼굴이 흙빛이 되어 돌아왔는지 영문을 모르는 뇽에게 급하게 사정 설명을 했다. 어떻게 사죄를 할까? 콜라라도 사다 드리면 좀 나을까? 우왕좌왕하는 나 대신 뇽이 얼른 일어나서 콜라를 사 왔더니, 이번에는 그분의 일행이 동시에 콜라를 들고 나타나서는 그분에게 건네는 것이었다.
본의 아니게 피해를 끼쳐 죄송하다. 세탁비라도 드리고 싶다. 이 말 만은 꼭 했어야 했는데, 끝내 눈치만 보다가 말하지 못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유창하지 못한 어학 능력 때문에 말을 걸 자신이 없었다. 정 할 말이 없으면 아까는 정말 미안했다는 말이라도 다시 했어야 했는데, 그걸 못해서 지금까지 우루밤바라는 단어만 보면 그분의 검은색 레깅스와, 당황한 얼굴과, 바보 같은 내 모습이 차례대로 스치며 자괴감에 빠져든다. 그렇게 민폐를 끼쳐가며 들고 온 식사의 맛이 어땠는지는 전혀 기억에 남지 않았다. 먹는 내내 목이 메었던 느낌만 생생할 뿐.
환멸의 우루밤바 식당
민폐와 후회만 남은 우루밤바 빌리지를 등진 채 다시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마지막 코스 오얀타이탐보였다. 친체로처럼 현재까지 잉카의 후예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라는데, 이 투어에서는 마추픽추가 있는 아구아스 칼리엔테스로 건너가는 정거장 역할을 했다.
해산하기 전에 디에고가 마지막으로 일행들을 이끌고 간 곳은 사원이었는데, 고산병과 사투를 벌이느라 체력을 다 쓴 뇽과 우루밤바에서 넋을 잃어버린 내가 동행하기에는 지나치게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쯤 되면 잉카인의 지혜가 아니라 잉카인의 취향 같다. 어쩜 이렇게 높은 곳만 골라서 사랑할까나. 우리는 일행들이 출발할 때 한 줄, 두 줄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서는 등반 줄에서 쏙 빠져나왔다.
둘이 나란히 앉아 간간히 셀피나 찍으며 쉬었는데, 웬만큼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약속 장소에 일행들이 나타나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체력이 넘쳐나는 우리 가이드, 디에고 대신 입구에 서 있는 다른 여행사의 가이드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왜 안 올라가고 여기 있느냐고 물어서 "우리 가이드가 안 보인다, 혹시 디에고라는 사람을 아느냐"라며 짧은 대화를 근근이 이어갔다.
한참을 기다리다 보니 산 위에서 체력이 탈탈 털린 일행들이 하나둘 흩어진 채로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감동 대신 피로가 가득해서, 안 따라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쇼핑은 빼고 일정은 넘치게 채운, 파비앙 여행사의 정직한 패키지 투어가 이렇게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