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구아스 칼리엔테스, 오랜만에 낯선 동네에 왔다. 숙소로 이동하기 전 페루 레일을 함께 타고 온 커플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으나 - 나는 만나자마자 잠들어서 머쓱했다 - 막상 이동하면서 보니 숙소가 바로 옆이었던 터라 어색한 인사를 한번 더 했다. 마추픽추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숙소가 그쪽 라인에 밀집해있었던 모양이다.
뇽이 예약한 우리의 숙소, '아델라스'는 역에서 가깝다고 해서 곧장 걸어가려고 했는데 근처에서 "아델라스!"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비정상회담>에 나왔던 멕시코 대표 크리스티앙과 비슷한 느낌의 청년이 시니컬한 표정으로 'ADELAS'라고 씌어있는 종이를 들고 서 있었다. 백인 노부부와 우리, 딱 네 사람이 그 뒤를 따랐다.
이렇게 손수 픽업까지 나온 걸 봐선 생각보다 먼 곳에 있는가 싶었지만, 도착해보니 역시나 천천히 걸어도 10분 정도 거리였다. 정면에 거대한 산이 있고, 게스트하우스, 호텔들이 기찻길을 따라 쭉 이어져있었다. '아구아스(Aguas 물)'가 붙은 마을답게 계곡물이 졸졸 흐르는 산골짜기 마을의 풍경에서 신비로운 여행지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웬만한 여행자들에게는 숙소의 픽업 서비스가 그다지 유용하지 않겠지만 나만큼 심각한 길치가 세상에 또 없으리란 법은 없으니 - 물론 이 정도 길치가 혼자 여행을 떠날 확률이 높진 않겠지만 - 작은 배려지만 아델라스에 대한 인상이 좋아졌다.
기찻길 옆 우리 숙소, 아델라스
하지만 체크인을 마치고 방에 들어와 화장실을 발견한 순간 호감도가 곤두박질쳤다. 화장실 벽 위쪽이 직사각형 모양으로 길게, 복도 쪽으로 뻥 뚫려있는 것이었다. 물론 모기장은 당연히 없다. 환풍기를 설치하는 대신 습기가 바로 빠지게 하려고 했던 모양이다만, 이 동네는 물가에 있어서 모기가 서식하기 딱 좋은 환경인데 이래도 괜찮은 걸까. 황열병 주사를 맞지 않아 여행 시작부터 한 순간도 모기의 존재를 잊어본 적 없던 나는 바짝 긴장이 되었다.
심지어 뇽은 모기 팔찌를 쿠스코에 두고 오는 바람에 꿀잠은 다 틀린 마당이었다. 잠시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지만, 여기에 온 목적은 서바이벌 모기 게임이 아니라 마추픽추 관광이니까 마음을 가다듬고 밖으로 기어 나왔다.
페루 여행의 모든 교통수단 티켓을 선예매했으나, 마추픽추행 버스 티켓만은 현장 예매를 해야 해서 숙소 인근의 매표소부터 갔다. 밖은 어느새 어둑어둑했고 매표소 앞은 줄이 꽤 길게 늘어서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버스 탑승 줄 서기가 얼마나 치열할지 능히 짐작이 되었다. 우리의 차례가 점점 가까워져 오자, 시간 낭비를 못 참는 한국인답게 미리 돈을 꺼내놓고자 요금표를 봤는데 이럴 수가! 그곳에 순도 100%의 에스빠뇰이 가득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것은 곧 영어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판매자의 의지 아니던가.
종일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데다 매번 매표소에 갈 때마다 트러블을 겪어서 잔뜩 예민해진 뇽은 패닉 상태가 되었고, 에스빠뇰 까막눈으로 치자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최고일 나로서는 더더욱 읽어낼 재간이 없었다. 리마 메르까도 포도 가게의 악몽이 되살아나려는 찰나, 전광석화와 같이 내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으니! 제일 비싼 요금이 우리 거라는 추론이었다.
우리는 성인이자 외국인이고, 왕복으로 탈 것이기 때문에 할인 혜택을 받을 건덕지가 전혀 없으므로 당연히 가장 비쌀 것이라는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나중에 요금표 사진을 찍어놓은 걸 찬찬히 들여다보니 유일한 영어 TWO WAY나 얼추 짐작 가능한 단어 ADULTO 같은 게 눈에 들어왔지만, 결제 당시에는 급해서 뵈는 게 없었던 까막눈의 슬픔이라니 - 하필 대문자로 써 놔서 난독증이 더 심해졌다고 변명해본다 - 어쨌든 모로 가도 티켓은 예매했으니 마추픽추를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
딱 하룻밤 묵을 거라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터라, 동네 맛집을 미리 검색해놓지 않았다. 하지만 이럴 때 모험을 하는 거라며 들뜬 마음으로 음식점 수색에 나섰다. 때마침 이 날은 페루 vs 아르헨티나 축구 경기가 있는 날이어서 광장에 대형 스크린과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사람들이 설렘 가득한 얼굴로 그 앞에 우글우글 몰려있었다. 축구를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 터라 같이 구경하지는 않았지만 다들 신난 걸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아rrrrr리바 페루!!
맛있는 저녁만 먹는다면 이 좋은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갈 수 있을 텐데, 사전 검색 없이 식당 생김새만 보고 맛집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유리창에 후기가 잔뜩 붙어있는 화려하게 생긴 중식당을 보고 거의 들어갈 뻔했다가, 여행 날짜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현지 음식을 한 번이라도 더 먹는 게 낫지 않겠는가 싶어 발길을 돌렸다. 장고 끝에 고른 식당은 축구 경기가 펼쳐지는 스크린 근처에 있는, 아무런 후기도 홍보 문구도 없는 평범한 곳이었다.
메뉴판에 그림이 있고 광장이 잘 보이는 자리여서 좋았다. 음식 종류가 어찌나 많은지 먹고자 마음먹는다면 3개국의 음식을 주문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다시 말해, 딱히 현지 음식점이라 할 만한 곳은 아니었던 거지만 주문에 불편함이 없어 좋았다. 내일 최상의 컨디션을 발휘하려면 과식하지 말아야 한다며 고기 요리 하나, 카프레제 하나, 레몬에이드를 주문했다.
음식점 TV 화면에서도 축구 경기가 나오고 있었는데, 화면에 메시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뜨는 걸 보며 "내가 축구는 잘 모르지만 승부는 이미 정해진 거 아니냐?"라며 낄낄거렸다 - 하지만 놀랍게도 이 날 경기 결과를 나중에 찾아보니 무승부였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열렬히 응원하는 이유가 있었군! 몰라 뵈어 죄송합니다 -
환장의 소고기 등장
음식은 금방 나왔고, 나름대로 플레이팅도 잘 되어있었으나 놀라울 만큼 맛이 없었다. 카프레제의 맛은 그냥저냥 먹을 만했는데 메인으로 주문한 소고기가 너무나 질긴 데다 양념도 훌륭하지 않았던 것이다. 와카치나 에서 먹었던 로모살타도는 이 집 고기에 비하면 투쁠 한우라고 봐도 무방하다. 페루 소고기가 좀 질긴 편이라던 꽌또 아저씨의 말을 복기해봐도 참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돌아다녀서 고른 결과가 이거라니, 목이 타는구나… 아니 근데 레몬에이드는 왜 안 나와!
돈을 생각하며 꾸역꾸역 삼킨 고기가 거의 없어지도록 레몬에이드는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된 거 빨리 일어나고 음료는 그냥 취소해야겠다고 결정한 순간, 저 멀리서 다른 직원과 수다를 떨던 서버가 뇽과 눈이 딱 마주치더니 갑자기 아차 하는 얼굴로 주방에 달려갔다. 심증이 사실이 되는 순간, 뇽의 분노는 삽시간에 불타올랐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너무나 태연한 얼굴로 레몬에이드를 내미는 서버에게 서릿발이 내렸다.
"You are late!'
서버는 못 알아들은 양, 짐짓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음료를 디밀었으나 우리 고객님은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이런 경우를 한두 번 당한 것 같으냐! 결국 기싸움에서 밀린 서버가 음료와 함께 사라지고 계산서에서 레몬에이드도 삭제되었지만 식사를 망친 우리의 기분은 되살아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다짐하건대 식당 모험은 없다! 따로 검색한 게 아니라면 '아는 맛'이 살 길이고 잘 모를 때는 중식당이 답이다. 명심, 또 명심하자.
식당이 이렇게나 많은데 맛없는 걸 먹다니
어디선가 황열병을 장전하고 날아올 모기가 염려되어 인근 약국과 마트를 기웃거려봤지만 우리가 흔히 쓰는 플러그형 모기약이나 모기향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쿠스코 사람들에게 고산병 약이나 산소통이 필요 없는 것처럼, 이 마을 사람들에게 황열병 모기 따위는 위협적인 존재가 아닌 걸까. 그러고 보니 인근에 꽤 비싸다고 알려진 호텔조차도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쿨하지 못해 미안합니다만 우리는 이만 산책을 접고 이불속에라도 숨어야겠다.
모기가 싫어한다는 깔라만시 비누로 샤워를 하고 침대 옆 협탁에 그 비누를 올려놓은 다음, 팔찌를 찬 손을 얼굴 가까이에 두고 잠을 청했다. 나스카에서는 이 정도 조치로도 무사했는데 확실히 이 동네 모기가 센 건지, 팔찌 하나가 줄어서 방어벽이 무너진 건지 밤새 다섯 마리를 잡았다. 축제도 아니고 모기로 지새는 밤이라니, 이 또한 마추픽추를 보기 위한 위대한 여정에 포함해야 하리라. 애애앵.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