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뇽알 May 07. 2022

마추픽추 - 모험과 신비가 가득한 공중도시

안개가 걷힌 뒤 드러나는 새로운 세상

 모기 때문에 자다가 최소 세 번은 깼던 밤이다. 왱왱 소리에 놀라 눈을 떠보면 천장에서 흉흉하게 매복하고 있었던 놈들… 그래도 모기 팔찌 덕인지 의외로 물린 데는 없었다.  

 마추픽추행 버스 대기줄이 매우 길 것으로 예상되어 서둘러 짐을 정리하고 조식을 먹으러 내려왔다. 뻥 뚫린 침실에서 잠을 설친 관계로 조식 컨디션에 대해서도 큰 기대는 없었지만, 그저 허기만 면하자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계단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풍성한 아침식사였다.


이 구역 조식 맛집, 아델라스

 

 납작 빵과 잘 익은 바나나, 동글동글 탐스러운 버터, 따뜻한 커피와 주스, 각종 티백이 준비된 식탁이었다. 빵도 리마에서 먹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적당히 미지근한 온도에 결대로 사라락 찢어지는 부드러운 식감으로, 동글이 버터를 듬뿍 발라 커피와 함께 호록 삼키니 천상의 맛이로다. 찻잔 두 개 중 하나에는 남은 사골국까지 부었더니 더욱 든든했다. 전날 시원찮았던 저녁식사로 고통받았다가 갑자기 호사를 누리니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감격으로 입이 쩍 벌어진 우리 앞에 어제 역으로 픽업 나왔었던, 냉소적인 인상의 그 직원이 다가왔다. 뭐라 뭐라 물어보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 이 또한 에스빠뇰 이리라. 방 정리 다 했고, 배낭도 맡겨놨는데 뭐가 문제일까? 열쇠를 달라는 건가? 싶어서 주머니를 뒤적거려 보여줬으나 도리도리. 끝내 알아들을 수가 없어 서로 휴대폰을 켰다. 우리가 번역기를 미처 돌리기도 전에 청년이 먼저 자기 휴대폰을 내밀었는데, 놀랍게도 그가 그토록 말하고 싶어 했던 단어는 'Egg'였다.

 계란은 그 비싼 리마 숙소에서도 구경하지 못했던 희귀템이라, 설마 그걸 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전날에 페루 레일 안에서 뇽과  장시간 담소를 나눈 남자 의견이 일치했던 것이 이거였단 말이다. 계란 하나만 있어도 식사가 이렇게 힘들지는 않겠다!라고. 그 계란이 지금 눈앞에 나타나다니.


 청년은 미션 성공 후 홀연히 사라졌고, 뒤이어 나타난 젊은 여성이 친절한 미소를 띠고 스크램블을 원하는지, 프라이가 좋은지 물었다. 뭐든 좋습니다! 심지어 쌍란이라니요! 계란 하나로 식사의 질이 이렇게 달라질 줄은 몰랐다. 난처럼 부드러운 식감의 빵에 계란을 싸서 먹으니 속이 뜨끈뜨끈 행복으로 충만해졌다. 기어이 뇽이 그만 먹고 일어나자고 재촉할 때까지 식사를 멈추지 못했고, 아쉽게 일어나는 와중에도 남은 바나나를 쇼핑백에 쑤셔 넣기 바빴다. 이걸 어디서 꺼내먹겠나 싶지만 언제 식량난이 도래할지 모르니 챙기고 보자.


기적의 쌍란이시여


 바나나로 묵직해진 쇼핑백을 안고 밖에 나와보니, 마추픽추행 버스 줄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내가 식사에 미쳐있는 사이 한참 뒤처지게 된 것 같아 슬금슬금 뇽의 눈치를 보았다. 뇽은 딱히 나를 책망하지는 않았지만 만면에 불안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버스 배차가 짧은 편이었다는 것이다. 버스 몇 대가 지나가나, 싶더니 줄도 쑥쑥 줄어들었다.

 앞으로 앞으로 향하다 보니,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우리 앞에 마치 돌부리처럼 자연스럽게 널브러져 자는 동네 개가 있었다. 옆에서 발을 굴러도 꼼짝하지 않는 것이 얘도 이 동네 토박이인  모양이다. 정말 이 동네 개들에게 고민거리라고는 스페셜한 간식이 없다는 것 말고는 없을 듯하다.

 

이 녀석, 외지인이 두렵지 않느냐


 대기줄이 잡화점 앞에 이르렀을 때, 안에서 젊은 여성이 나와 매우 설득력 있는 몸짓으로 모기 퇴치 스프레이를 홍보하기 시작했다. '매우 설득력 있는 몸짓'은 순전히 내 관점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현장에서 그걸 산 사람은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마추픽추는 산이고, 산에는 당연히 산모기가 살지 않겠는가? 이 동네에서 만든 모기약이 잘 통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물론 스프레이 제조원이 어딘지는 알 길이 없지만 -  이 좋은 걸 왜 아무도 안 사는 걸까. 흠. 


이 아이는 몇 시간 뒤 엄청난 활약을 합니다.


 줄이 우리 앞에서 딱 끊기려는 위기에서 애매하게 두 자리가 남는 바람에 우리는 따로 앉아서 가게 되었다. 페루 와서 벤츠를 참 많이 탔는데, 버스가 죄다 벤츠였기 때문이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거침없이 달리는 용맹한 벤츠 버스 안에서, 앞자리를 양보해준 뇽 덕분에 경치 구경은 실컷 했다. 특히 날씨가 얼마나 좋았는지 도착하기도 전에 저 멀리 마추픽추의 실루엣이 프롤로그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오늘 관광은 틀림없이 대박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친체로에서 지독한 고산병을 겪었던 뇽도 그 덕에 면역력이 생긴 건지 여기서는 거의 날아갈 듯한 컨디션이었다. 완벽하게 길일이로구나!

 

 버스가 멈췄고, 마추픽추를 보려면 산길을 더 올라가야 하는데 우리는 패키지로 온 게 아니어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럴 때는 그저 다수를 따라가는 게 답이다. 거의 다 와서는 사람들이 양 갈래로 갈라져서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기민한 뇽의 판단으로 마침내 마추픽추가 내려다보이는 포토 스팟 앞에 설 수 있었다.


마추픽추여, 모습을 드러내소서

 

 유적을 보고 '신비롭다'라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은 건 서산 마애삼존불 이후 처음이었다. 대학교 답사 때 본 서산 마애삼존불은 비록 인공조명을 통해 본 것이지만 빛의 움직임에 따라 변하는 불상의 미소가 더할 나위 없이 신비로웠다. 모든 유적은 아름답고 감동적이지만, 개발을 거듭하면서 주변 경관이 현대적으로 바뀌어 신비감이 줄어들기 마련이다. 높은 산 위에 호젓하게 자리 잡은 잉카 문명의 흔적은 긴 세월 보수를 거쳐 본래의 색을 간직한 건 아니었지만 경이롭기 그지없었다.

 특히 마추픽추 위를 덮고 있던 안개가 서서히 걷혀가면서 햇빛이 그 뒤를 따라 내리쬐는 장면은 말문이 막힐 만큼 감동적이었다. 직접 그곳에 내려가서 오래된 땅을 딛고, 녹음을 병풍처럼 두른 채 서 있는 석조 건물을 가까이에서 본 것도 좋았지만 멀리서 마추픽추를 처음 맞닥뜨렸던 순간의 강렬한 감동은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을 것이다. 뇽의 눈시울이 붉어졌고, 우리는 한동안 그 앞에 앉아있었다.


태양 아래 빛을 발하는 잉카의 보석


 가슴속이 뻐근할 만큼 감동을 누렸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내려가 보실까! 우선 쇼핑백에 들어있는 판초부터 꺼내야겠다. 산이니까 추울 거라는 핑계로 장만한 판초인데 막상 입으려고 보니 춥기는 개뿔… 이곳은 쿠스코보다 저지대인 데다가 뙤약볕이 내리쬐고 있어 티셔츠 한 장만 입어도 더운 날씨였다. 하지만 고작 더위 때문에 이 날 하루를 위해 준비한 판초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미 우리 말고도 숱한 한국인들이 판초와 야마 인형 풀착장을 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뽐내고 있었다. 꽃청춘 효과가 이 정도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하지만 판초는 이렇게 푸른 자연 배경에서 가장 잘 어울리기 때문에, 여행지에서 예쁜 사진을 많이 남기고 싶다면 더위를 이겨내고 구매하는 것을 추천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팁을 추가하자면, 마추픽추에서는 반드시 모자를 써야 한다. 나는 여행 준비할 때 장만한 탐험가 모자를 눌러써서 화상을 모면했으나 뇽은 헐벗은 머리로 나왔다가 두피가 새빨갛게 익어버렸으니 말이다.


 가까이에서 본 마추픽추는 반듯반듯하게 끼워진 돌과 각이 진 계단식 경작지로 결백한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철기 문명이 없던 시절이고 거의 자연석 그대로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곳을 조성하는데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을지, 특히 노동자들이 얼마나 죽어났을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보는 거야 좋지만 만들었을 당시 사람들의 고생을 생각하면 이곳을 만든 존재가 그냥 외계인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설에 따르면 사실 잉카 이전의 인류가 만들어놓은 곳에 잉카인들이 정착한 것이라고도 하던데, 누가 만들었든 간에 그 정성과 집념에서 비롯된 가치는 변함없을 것이다. 쿠스코에서도 든 생각이었지만 이토록 하늘과 가까운 곳에 번성했던 인류라니, 선민의식이 남달랐을 것 같다.

 돌아다니는 동안 해시계와 나침반을 바라보며 설명을 듣고 있는 패키지 여행자들과 마주쳐 귀동냥도 했다. 솔직히 나는 측정하는 방법에 대해 듣는 순간 실시간으로 싹 잊어버렸으나 뇽이 잘 들었다면 되었다. 그 순간 뇽의 눈은 아주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으니 말이다.

                                                 

참 반듯하게 살았네요, 마추픽추 님
귀동냥한 해시계


 마추픽추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존재는 단연 야마라고 생각한다. 쿠스코의 기념품샵에서 알바를 하고 있던 알파카들과는 차원이 다른 자유로운 영혼들이었다. 아무 데나 자기들 마음대로 휘젓고 돌아다니기 때문에, 마음을 비우고 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만나지만 야마를 보는 것을 목표로 찾아다니면 만남을 기약할 수 없을지 모른다. 우리는 운 좋게 가까이에서 두 번이나 볼 수 있었다.


 한 번은 식사 중인 녀석을 만났는데, 다 똑같아 보이는 잡초 속에서 일일이 신선한 풀을 골라서 먹는 미식가였다. 근처에 사람이 있든지 말든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흐느적흐느적 풀을 뜯으러 다녔고, 우리는 차마 손도 못 댄 채로 "야마님, 야마 느님…." 하며 찌질하게 꽁무니를 졸졸 쫓았다.

 야마는 대체 뭘로 꼬셔야 하는 걸까, 야마를 위한 츄르 같은 건 없는 건가! 하며 좌절할 때쯤 어디선가 등판한 백인 꼬마가 야마에게 불쑥 다가가더니 너무도 당당하게 등을 쓰다듬었다. 야마는 낯선 이의 손길 따위 일상인 건지 쳐다도 보지 않은 채 식사를 이어갔고, 꼬마가 사라진 뒤 우리도 주춤주춤 다가가 등에 손을 얹어봤다. 마추픽추에 관광을 온 게 아니라 야마 서식지에 잠입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쿨내 나는 야마. 눈이 너무 예뻤다.

 

야마님, 그만 먹고 저 한번만 봐주세요


 물론 이렇게 쿨한 녀석만 있는 건 아니다. 두 번째로 만난 야마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길목에 일부러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사진을 찍으라는 듯 자세까지 잡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포토존이 형성되어, 사람들이 발길을 멈추고 줄을 서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페루 여행을 계획할 때만 해도 야마가 있다는 사실만 알았지 어디서 볼 수 있는지는 몰라서 막연하게 꿈만 꿨는데,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게 되어 너무 기뻤다. 물론 과거 내 직장 동료가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침을 찍찍 뱉고 콧김을 뿜는 야마'는 못 봤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여기 애들도 관광지 알바에 너무 적응해서 순해졌나 싶기도.

 

프로 야마의 베스트 포즈


 짙푸른 하늘과 녹음이 우거진 산은 어떻게 찍어도 사진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되, 어디를 찍어도 명작이 탄생한다. 쿠스코가 그랬던 것처럼, 마추픽추의 색깔도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뇽과 나는 "여긴 원래 이렇게 날씨가 좋은가 봐. 비가 잘 안 오나 봐."하고 허튼소리를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날씨 때문에 망했던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이 철없는 것들이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도와주신 하늘에 감사하며, 역시 여행 초반에 헌금을 하는 의식은 옳다. 어디든 좋습니다. 내 돈을 가져가세요, 사찰이여, 성당이여, 교회여.


인생샷은 헌금으로부터

 

 저 멀리서 형형색색의 등산복을 갖춰 입고 몰려다니는 한국인 관광객들을 보니 갑자기 이국적인 느낌이 반감되는 듯했으나, 뭉게구름 속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은 틀림없이 페루다. 공중도시란 이런 것! 누구나 구름 속을 누비고 새와 함께 걸을 수 있다. 이곳에서 숨을 몰아쉬지 않고 즐겁게 뛰어다니는 우리도 공중도시에 점점 섞여 드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이곳의 모기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지. 버스 타기 전에 급하게 샀던 모기 퇴치 스프레이는 기대 이상으로 유용한 물건이었다. 예상대로 산모기가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걸 뿌리고 나면 모기가 가까이 오지 않았고, 냄새도 방향제처럼 상쾌했다. 땀냄새나는 판초에 탈취제로 뿌려도 손색이 없다. 나시에 반바지 차림의 젊은 여행자가 온몸에 훈장처럼 모기 물린 자국을 달고 다니는 걸 보고 더더욱 아낌없이 뿌려댔다 - 기념할 게 따로 있지, 모기로 마추픽추를 기념할 수는 없다 - 이런 스프레이가 있다는 걸 진작에 알았으면 지난밤 숙면할 수 있었을 텐데 고것이 아쉽다.


구름 속을 누비는 여행자들

 

 모자를 쓰지 않은 뇽의 두피가 홧홧하게 달아오를 만큼, 판초 밖으로 빠져나온 내 손이 통구이가 될 만큼 햇볕을 쬐고 무릎과 허리가 뻐근해지도록 걷고 또 걸었지만 그래도 나오는 길은 역시 아쉽다. 여길 또 언제 올 수 있을까 싶은 생각에 벌써부터 울컥하고 만다. 마추픽추 내부에는 화장실이 없어서 뇽은 나오자마자 출구에 있는 유료 화장실로 직행했고, 나는 기다리는 동안 여권에 마추픽추 도장을 찍었다. 화장실 위생 상태에 대한 기준이 매우 까다로운 뇽에게 합격점을 받을 만큼 유료 화장실의 상태는 좋았다고 한다. 역시 돈이 최고다. 관광지들이여, 제발 돈을 받고 좋은 화장실을 내려주소서.


차마 발걸음을 뗄 수 없는 광경


  건물 2층 카페테리아에서 정면으로 탁 트인 산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샌드위치를 씹으며 여행 말미의 여운을 즐겼다. 최고의 날씨에 최상의 컨디션으로 마추픽추를 감상한 것에 감사하며,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다 좋았다고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비록 더 높은 곳에 있는 와이나픽추는 못 봤지만, 그곳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멀리서 바라보고 빠르게 포기했다. 우리로서는 마추픽추를 이만큼 봤다는 사실도 기적일 뿐이다.


모든 것이 좋았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떠돌이 개가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며 불쌍한 척을 하며 음식을 갈구했지만, "너 줄 거 없어"하고 손을 흔들었더니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길바닥이며 식당이며 가리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댕댕이 이웃들을 보는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아아, 정말 너무나 좋았고 너무나 아쉬웠다.



<알>  







        

매거진의 이전글 뜨거운 물과 모기의 도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