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추픽추에서 내려와서 곧장 아델라스에서 배낭을 찾았고, 페루 레일에 탑승하기 전까지 시간이 좀 남아있어 동네 카페에서 휴식하기로 했다.
고동색 목재 테이블 가운데에 꽃병이 꽂혀있고, 알록달록한 테이블 매트 위로 새하얀 냅킨이 하나하나 곱게 접혀있는 고풍스러운 카페였다. 인근 가게들 중 규모가 꽤 큰 곳이었고, 영문 메뉴판까지 있어 마음이 놓였다. 전날 저녁 식사를 망친 식당과 달리, 이곳은 크기만 한 게 아니라 서비스도 좋은 가게였는데 깜박하고 카페 이름을 찍어두지 않아 아쉽다.
나는 페루에서 먹어 본 과일 주스 중 최애로 낙점한 멜론 주스를 주문했고, 뇽은 늘 그렇듯 메뉴판을 실컷 읽고 나서 변함없이 아이스커피를 선택했다. 그리고 음료만 마시면 아쉬우니 크레이프도 추가했다. 뇽의 아이스커피 주문을 받은 직원의 표정이 일순 곤혹스러워 보였으나, 이윽고 별말 없이 주문서를 그대로 가져갔다. 과일을 기계로 갈아내는 소리, 부산스러운 움직임 소리를 들으며 이 가게는 역시 최적의 선택이었다고 우리끼리 흡족한 웃음을 지었는데, 잠시 후 나타난 음식들을 보자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주문한 음식이 다 나오기는 했다.
뽀얗게 갈아 낸 멜론 주스, 과일잼을 듬뿍 뿌리고 앙증맞게 허브로 장식한 크레이프, 그리고
커피와 설탕과 아이스로 삼단 분리된 뇽의 아이스커피.
커피에 얼음을 넣는다니, 사문난적이로다!
크레마가 풍성하게 올라온 커피는 얼핏 보기에도 맛있어 보였다. 설탕도 듬뿍 담아줬고 말이다. 따로따로 보면 완벽했는데, 이걸 컵 하나에 합쳐서 내놓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걸까? 아니면 정성껏 내린 커피 속에 얼음을 퐁당퐁당 담그는 것이 신성모독과도 같은 것일까.
뇽은 실소를 터뜨리며 커피, 설탕, 아이스 3종 세트를 카메라에 담았다. 이 집에 비하면 그나마 얼음컵을 따로 줬던 쿠스코의 제과점은 양반이었다. 이들의 커피 자부심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몇 년 뒤 다시 와서 확인하고 싶을 지경이다.
비록 뇽의 아이스커피는 '아이스와 커피'로 둔갑해서 나타났지만 나의 멜론 주스는 오늘도 합격이었다. 누가 페루 카페에서 뭘 마실 거냐고 묻는다면 나는 자다가도 멜론 주스를 외칠 것이다. 주황색, 흰색 할 것 없이 멜론 주스는 사랑입니다. 과육 가득한 잼이 듬뿍 발린 부들부들한 크레이프도 좋았다. 페루는 과일맛이 좋고, 뜨거운 커피가 일품이다. 아이스커피는 귀국해서 찾기를 권한다 - 뇽과 같은 얼죽아라면 스타벅스가 대안이 될 수 있겠다 -
크레이프를 우물우물 씹으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서로의 손을 바라보니 잉카의 태양에 바싹 구워져 있었다. 나는 긴팔 티셔츠에 판초를 걸친 상태여서 손만 집중 공격을 당했고, 뇽은 셔츠 소매를 둘둘 걷고 다녔다가 손목에 시계 자국이 남았다. 둘 다 여름철 물놀이를 기피하는 사람들이라 휴가철이 끝나고도 늘 피부색이 그대로였는데, 이번만큼은 휴가 다녀온 행세를 제대로 하겠구나 싶었다.
이 정도로 잘 놀다 왔습니다
기차역까지 가는 길에는 기념품 가게가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백 번 봐도 백 번 다 사고 싶은 러블리 알파카 인형부터 지갑, 가방 할 것 없이 내가 사고 싶었던 모든 게 그곳에 있었다. 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열차 시간에 맞춰서 나오는 바람에 시간이 많지 않았고, 왠지 쿠스코보다 여기가 더 비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때만 해도 쿠스코에서 다시 쇼핑할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순순히 쇼핑을 포기했다. 이제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쇼핑의 기회는 결코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군가 날 다시 그 시간으로 되돌려준다면, 빈 손 대신 빈 지갑을 택할 것이다.
내 사랑 알파카, 이대로 안녕히
다시 페루 레일을 타고 쿠스코로 간다. 돌아오는 열차도 4인석을 예매한 터라, 처음 보는 사람들과 뻘쭘하게 가는 시간을 어떻게 견뎌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다. 갑자기 우리 뒷자리, 2인석에 앉은 중년의 백인 여성이 우리가 앉은 4인석에 자기 일행이 있다고 하시며 혹시 자리를 바꿔줄 수 있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보셨다. 아니 이렇게 감사할 데가! 우리는 행여나 그분의 마음이 바뀔 세라 얼른 짐을 챙겨들고 일어났다.
어차피 우리는 두 명이어서 횡재한 기분이었는데 그분은 우리가 안 바꿔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지 연신 고마워하며 우리 국적을 물어보셨다. 한국인이라고 이야기하자 그분은 바로 알아듣고 배우자가 한국에서 일한다며 반색을 했다. 정말 인연이란 묘하다. 수많은 관광객들 중 남편이 한국에서 일하는 분이 같은 열차를 타고 자리까지 바꿔주는 일이 생기다니 말이다. 그분은 여기서 만난 페루 사람들처럼 우리가 한국인이라고 이야기하자마자 '안녕하세요'를 하셨다. 아, 어르신들도 이렇게 공부를 하시는데 나는 이렇게 백지상태로 다녀도 되는 건가. 지금까지 익힌 말이라고는 음… 꼬레아나, 아미고 정도 되겠다.
자리를 바꿔주신 귀인과 인사를 나눈 후, 페루 레일에서 제공하는 점심- 빵과 과일꼬치, 커피 - 을 먹고 나서 부른 배를 두드리며 평화롭게 꿀잠에 들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도무지 열차 안에서 나올 법하지 않은 쿵짝쿵짝 리드미컬한 음악 소리가 울려 퍼져서무심코 눈을 떴다. 아직 잠이 덕지덕지 붙은 내 눈앞에 불쑥 튀어나온 건,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기괴한 가면이었다.
깨어나라 승객이여
진심으로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라탐 항공 승무원이 내 눈앞에 얼굴을 디밀고 굿모닝을 외칠 때만큼 놀랐다. 자다가 이게 무슨 날벼락이람. 오색 찬란한 투피스에 황금색 뿔이 달린 가면을 쓴 정체불명의 사람이 열차 통로를 누비며 박수를 유도하고 있었는데, 하필 내 옆을 지나갈 때 눈이 번쩍 뜨인 것이다.
벌렁대는 심장을 쓸어내리는 나를 보고 뇽은 박장대소를 했고, 휘황찬란한 가면 인간의 뒤로 남녀 승무원이 스윽 나타나더니 난데없이 패션쇼가 시작되었다.'
과장하는 게 아니라 진짜 패션쇼였다. 실화인가 싶어서 나중에 페루 레일 후기를 찾아봤는데 백이면 백, 마추픽추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 열차를 탄 사람들은 패션쇼를 관람했단 말이다. 승무원들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워킹을 했고, 통로의 끝에 도착하면 본인이 들고 있는 기념품의 쓰임새에 대해 구석구석 자세히도 보여주었다. 종종 그럴싸한 아이템도 있었는데, 아우터 겸용으로도 쓸 수 있다는 숄은 굳이 여기서 뭘 사고자 마음먹는다면 살 만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아구아스 칼리엔테스의 귀염둥이 알파카들을 뒤로한 채 와 버린 내가 여기서 숄을 사기에는 동기가 충분치 않았다. 경험상 교통수단 안에서 구매하는 물건들이 결코 저렴할 리가 없기도 하고 말이다.
비록 구매 욕구는 생기지 않았지만 생각 외의 볼거리를 제공해 준 그들을 향해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줄 수 있는 게 박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분들이 고작 박수 좀 받자고 본업을 하다 말고 나와 캣워크를 걸었을 리가 없다. 흥겨운 무대가 끝나고 나니 뻘쭘한 눈치 싸움이 시작되었다. 좌석 하나하나를 꼼꼼히 훑으며 기념품을 들이미는 승무원들은 정말 뭐 하나 대충 하는 법이 없었다. 괜찮다는데도 "너에게는 필요가 없을지 몰라도 남동생이나 아버지에게 선물하면 좋단다."라며 미소를 잃지 않고 영업을 하였다. 선생님들, 제 행색을 보세요. 털어도 먼지밖에 안 나올 사람이랍니다. 이럴 때는 말귀 못 알아듣는 외국인 행세가 최고다. 구구절절한 변명 없이 저희는 괜찮아요, 하고 손사래를 거듭 친 끝에 지갑을 사수할 수 있었다.
다시 쿠스코로 돌아왔다. 여기가 쿠스코 역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 뇽의 몸이 먼저 알아챘다. 낮에 마추픽추를 날아다니던 사람은 어디로 간 건지, 급격한 두통과 호흡곤란으로 낯빛이 어두워졌다. 쿠스코 역에서 아르마스 광장까지는 택시로 이동했는데, 뇽에게 차멀미가 추가될 정도로 기사님이 속도를 냈지만 길이 좁아서인지 저녁식사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아르마스 광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자고로 몸이 아플 땐 잘 먹어야 한다. 뇽은 고산병의 공격으로 입맛을 잃었지만, 굶고는 못 사는 나를 고려하여 먼저 외식을 제안했다. 그나마 이 근방에서 먹어 본 음식 중 가장 검증된 잭스 카페에 가서 지난번에 못 먹었던 팬케이크를 먹기로 하고 힘겨운 걸음을 옮겼다.
맛있는 걸 먹으면 다시 행복이 찾아올 거라는 믿음으로 겨우 도착했건만, 이번에는 잭스 카페가 배신을 했다. 시간이 늦어서 팬케이크가 떨어졌다고 한다. 저녁식사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단칼에 거절당할 줄이야. 실망스러웠지만 그나마 영업 종료가 아닌 게 어디냐, 하며 프렌치토스트와 단호박 수프로 선회했다.
이것은 그냥 토스트가 아니여
역시 맛집은 맛집이다. 단순한 메뉴였지만 금세 뱃속이 데워지고 입안이 달달 해지는 것이, 다시 여행의 피로에서 여행의 행복으로 한 걸음 옮기는 기분이었다. 컨디션이 매우 나빠진 뇽이 갈 만한 음식점이라는 것도 다행스러웠다. 쿠스코에 더 오래 머물렀더라면 매일 한 끼를 먹으러 가는 단골집이 되었을 것이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생각보다 어둡고 흉흉했다. 낮에 관광객들로 가득했던 좁은 골목은 잡상인 혹은 취객들만이 드문드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애써 어깨를 꼿꼿이 펴고 그 어디에도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정면만 응시한 상태로 백조처럼 날래게 발을 움직였다. 아마 누군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면 그 자리에서 로켓이 되어 이륙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쫄보들이 무슨 깡으로 야간 외식을 감행했는지 원.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 체감 천 리 만 리였다.
Parroquia La Virgen Milagrosa 성당이 보우하사, 쫄보들은 무사히 코코펠리에 당도하였다. 산소캔을 들이켜고 따뜻한 물로 샤워하는 밤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추픽추 관람'이라는 최종 목표를 달성하고 돌아온 여행자들의 마지막 밤이 뒷골목에서 아슬아슬하게 아찔하게 흘러갈 뻔했으나, 결론은 해피엔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