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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gjeje Feb 27. 2024

눈 속에 잠시 시간이 머물다 흘러내렸다.

에세이

닫혀 있는 블라인드 사이로 왠지 달콤할 것 같은 눈설탕 나무가  새벽 어둠속에서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혹시나 해서 버튼을 누르니 마치 무대의 커튼콜처럼 블라인드가 열리며 흰 눈 덮인 세상이 무대의 배경처럼 시야에 들어온다.

아직은 해가 가려진 여명의 길가 가로등은 무대의 조명처럼 은은하고 그 아래 쌓인 흰눈은 더욱 희고 맑다.


얼마 만에 맞이하는 눈 풍경인가.

흰눈이 좋아 겨울의 추위마저  싫지않았던  지난시절은 그 언제였던가.

기억마저 아련한데  작은 바람에도 몸을 떨던  전나(나신)의 나뭇가지가 흰 옷을 입고 새벽바람에도  흔들림 없이 서 있다.

세차던 밤바람이 잦아든 것 같아 털신을 꺼내 신고 아직 인적이 드문 동네 마중길로 누군가를 찾아 나서는 사람처럼 바삐 집을 나서본다.

나무에 머문  눈은 꽃이 되어 흩날리고 겨울 새벽은 아직도 꽃샘추위처럼 차고 시리다.


어느새 새벽을 먼저 밟은 이웃집 사람들이 자국 없는 눈 위에 흔적을 남기며 사라지고 난 그 발자국을 피해 흠 없는 눈 위에 나를 얹어본다.

하늘을 향해 빈 몸으로 민망해하던 숲길의 키 큰 나무들이  흰 눈으로 하늘을 가리고 바람을 막아주며 나와 동행한다.

얼마나 그리웠던 풍경인가.  

눈 덮인 밤길을 추위도 잊은 채 한없이 걷고 또 걸었던  그  젊은 날은 얼마나 뜨거웠던 날들이었는가.

나는 순백의 여백에 비틀거리는 갈지자 걸음걸이로   볼품없는 무늬를  남기며  한 동안 마중길을 반복해서 걸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길에 나의 발자국을 틈새 없이 남길 때 마다

이상한 희열감이 미안함과 함께 올라온다.


틈 없이 세상을 메운 흰 눈의 유혹으로 호기있게 나선 새벽 길이 어느새 몸은 추위에 움추러들고 눈이 녹아 발목을 적셔오는 물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질퍽해지는 길을 피해 출근길을 재촉하는  사람들의 발자국소리와 녹기 시작하는 질퍽한 눈길에  불평대신  혀를  차는 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리기 시작할 무렵

이미 인내심을 잃고 녹아내리는 눈처럼  잠시 소환되었던   내 옛 시절 또한 아침 산책길에서 녹아 사라진다.


아침 햇살은 순백의 우아한 나뭇가지의 옷매무새를  흩트러 놓고 오랫만에 새벽 산책에 나선 나의 발길을 제촉 한다.

눈이 배경이 되었던 과거의 젊은 날은 사라지고 지금 추위를 몸에 걸치고 있는 나는 다시 드러나는 나무의 나신처럼  작은 바람에도 몸을 떨고 있다.

어서 젖은 옷을  벗어 던지고 뜨거운 욕조에 들어가 몸을 녹일  잠시 후의 시간은, 지금 걷고 있는 이 순간마저 더 이상 머물게 하질 않는다.

미래는 그렇게 지금의 시간을 앗아가고 나는 곧 다가올 환상의 봄을 봄 향기 나는 비누 거품으로 느끼며 다시 눈 덮인 다음 겨울을  기다림으로 간직하겠지.....


오랫만에 완벽한 눈을 만났다. 바로 사라지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그래도 잠시라는  시간의 간극에서 나를 온전하게 느꼈다.

갈수록 눈앞의 가까운 미래보다는 멀어져가는 지나간 시간에 마음이 더 설렌다. 앞에 놓여진 것이 아무리 아름답다고해도, 새롭고 모양새가 세련되었다고 해도, 인위적인 것처럼 이제는 지루하고 식상하다.

헐고 달아졌지만 비록 상처일지라도 꾸미지 않고 얻어진 지나간 흔적의 빈티지 스러움이 더 그립고 나를  편하게 한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도 유연해질수 있는 것일까.

사진기에 담겨진 사물 조차 반듯하고 화려한 것들 보다는 낡고 주름진 모습이 나를 미소짓게 하니 말이다.


눈속에 묻혀 있는 봄의 환상을 느끼기도 전에 놓쳐버리는 아쉬움처럼  내 마음의 눈밭에 묻혀 있던 거대한 욕망들이 나도모르는 사이에 녹아내릴 때면  아프고 불편했다.

하지만 눈이 녹은 땅 위에서 반드시 올라오는 따듯한 봄의 기운처럼  질퍽함에 성가시던 내 욕망이  습기를 벗어버릴 때마다  오히려 마음은   굳은 땅 처럼 견고 하고 부드러웠다.

눈이 녹은 땅은 볼품없고 불편하다. 하지만 눈은 다시 내린다. 그리고 다시 그 땅 위를 아름다움으로 새롭게 장식한다.

나의 눈도 또 다시 내려야 한다.  불멸의 봄은 반드시  찾아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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