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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 Park Apr 06. 2022

끝난 사랑은 모두 실패한 사랑일까, 그렇지 않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리뷰

어른들은 대개 잔뜩 가물어 버석거리는 마음을 안고 살아간다. 한 때는 바다를 이뤘던 마음의 한가운데는 쩍쩍 갈라져 굳은 땅이 된 지 오래. 바다가 있던 풍경을 잊고 산지 한참이더라도, 가끔 추억의 바람을 타고 넘실거리며 밀려오는 그날들의 푸른 기억은 상처 위에 소금물이 스미듯 여전히 따끔따끔 아프다. 어쩌면 우리를 가장 먹먹하고 깊은 슬픔으로 몰아넣는 건, 우리 자신의 지나가버린 절정이 아닐까.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복원한 절정의 날들은, 사계절 중 가장 파랗고 아름다운 여름 바다가 있던 날들이다. 외로운 시절을 지나는 모든 이들의 마음에서 바짝 말라있는 곳을 예상 가능한 맛으로 적셔주고, 모두가 한번씩 지나온 그 시절, 가장 보편적으로 듣고 싶었던 말들을 전한다.


이진 "난 맨날 잃은 것에 대해 생각해. 근데 넌 얻을 것에 대해 생각하더라. 나도 이제 그러고 싶어."  (1화 中)

이진 "넌 좀 뻔해. 잘 할 게 보여. 넌 모르겠지만." (3화 中)


희도 "때로는 멀리서 보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심지어 네 꿈은 우주였잖아. 그러니까 우주에서 보는 것처럼 살자."

이진 "난 그냥 옆에서 볼래. 넌 옆에서 봐도 희극이거든."

희도 "그렇담 다행이네. 그래도 너랑 내 앞에 놓인 길엔 희극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4화 中)



기구한 시대가 삶의 곡선을 바닥을 향해 꺾어버린 최악의 순간에, 스물두살의 백이진은 같은 시대 앞에서도 도무지 작아지지도 초라해지지도 않는 소녀, 열여덟의 나희도를 만난다. 우린 이진의 눈으로 희도를 본다. 음습한 이진의 마음 한가운데에 함부로 들어온 희도는 창을 열고 빛을 들인다. 햇빛에 잘 말려낸 빨래처럼 구겨진 곳 없이 빳빳한 마음을 지닌, 막 씻어낸 토마토처럼 싱싱한 꿈을 품은 희도는 어쩌면 우리 모두의 '대안 과거'다. 구겨진 표정으로 구겨진 현실을 체념하며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환하고 늠름한 희도의 표정을 보며 우리는 떠올린다. 희도와 비슷했던 나이, 너무 쉽게 꺾여버렸던 무력했던 청소년기의 보통날들을. 그 시절, 우리가 되고 싶었던 모습을 희도에게서 본다. '그때의 나는 그랬어야 했는데' 라고 생각한다. 이 드라마 속의 희도는 그렇듯 있을법해서 더 눈부신 보편적인 판타지다. 


('희도'라는 웅장한 캐릭터를 배우 김태리는 자신만의 기세와 고집으로 완성한다. 처음엔 지나치게 쨍한 색의 연기에 흠칫하지만, 보면 볼수록 그 강렬함에 끌린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그러나 작위적이지 않은 디테일로 인물에 입체감을 불어넣는다.)



이진 "지는 게 두렵지 않고, 실패하는 걸 겁내지 않아하는 그 단단한 마음을 모두 갖고 싶어한다고. 뺏어오고 싶을 정도로 탐나. 그래서 나도 약해질 때면 네가 보고 싶은 거겠지." (4화 中)


희도 "백이진. 그 단단한 마음은 이미 우리의 편이야. 그러니 우리 힘들 때는 맘껏 좌절하자. 실컷 슬퍼하자. 그리고 함께 일어나자. 함께 있지 않더라도 함께 일어나자. 내가 너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이 될게. 꼭 그렇게 만들게." (5화 中)


이진 "네가 노력하면 나도 노력하고 싶어져. 네가 해내면 나도 해내고 싶어져. 너는 너 말고도 다른 사람을 잘 하게 해."

희도 "네 응원, 나 다 가질게. 그러니까 우리 같이 훌륭해지자." (5화 中)



이진의 눈에 비친 소녀 희도가 '보편적 판타지'라면, 펜싱 선수로서의 희도는 이 시대의 결핍을 반영한 '특별한 판타지'다.


어제보다 오늘 더 나아지고 싶은 안간힘이 '촌스럽게' 여겨지는 시대, 뒷짐 지고 짐짓 비웃고 보는 냉소가 '세련된 정서'로 여겨지는 이 시대에, '잘하고 싶은 마음'은 희소자원이다. 그 잘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솔직한 형태로 드러나는 장르인 스포츠가 희도의 주무대다. 경기에서 맨날 졌다는 소녀. 그렇다고 매일 비극이면 버틸 수 없다고, 웃고 넘겨야 다음이 있다고 말하는 소녀. 모두가 펜싱을 그만두라고 해도 그럴 수 없다고, 여전히 펜싱이 너무 좋다고 말하는 소녀. 지든 이기든 선수는 시합을 해야 성장한다고 말하는 이 소녀를 우리는 질시하는 유림의 눈으로도, 흠모하는 이진의 눈으로도 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한때 '잘하고 싶은 마음'으로 살았던 자신을. 그 절절한 마음 때문에 때로는 서로 질투하고 부끄러워하고 동경하고 사랑하며 우리를 성장시킨 모든 종류의 관계 역시 돌아본다. 휘어지지 않고 때로는 부러져도 보면서 우리의 손으로 청춘의 한 국면을 닫고, 다른 국면을 열게 만든 사람들을.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면, 아니 최소한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대개는 우리를 성장시킨 관계보다 좌절시킨 관계가 더 많았을 테다. 희도는 어른이 된 우리의 마음 속에 더 이상 '잘하고 싶은' 엔진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존재다. 그래서 희도는 과연 이 시대에 특화된 판타지다.


희도 "잃을까봐 두려워. 괜히 고백했나봐."

유림 "원래 고백은 도박이지 다 잃거나 다 가지거나."

희도 "가지는 것도 결국엔 잃게 되는 거 아닌가? 영원한 건 없잖아."

유림 "잃으면 아프고 힘들겠지. 그치만 가져봤잖아. 그게 중요한 거지." (13화 中)


성장기에도 전성기에도 반드시 끝은 있다. 반드시 사위어가고 반드시 저문다. 누구나 청춘의 절정만을 보고 싶어하지, 그것이 끝나는 모습을 목격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결말을 원망하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만으로 이 드라마는 청춘의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그려냈을 지도 모르겠다. 젊은이들은 그들 자신이  한때 가졌던 젊음이 얼마나 빛나는 것이었는지조차 제대로 알아차리기 전에, 그것을 빼앗긴다. 자신에게 젊음의 생기가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조차 천천히 알게 되고, 뒤늦게 애도한다. 어쩌면 그것이 청춘의 본질이다. 끝나는 줄도 모르고, 찰나에 끝나버기에 희소하고 덧없는 것.


희도 "어떤 순간엔 우리가 함께라는 이유만으로 세상이 가득 찼어."

이진 "완벽한 행복이 뭔지 알게 됐어."

희도 "너 때문에 사랑을 배웠고, 이제 이별을 알게 되네."

이진 "네가 가르쳐준 사랑이 내 인생을 얼마나 빛나게 했는지 넌 모를 거야. 고마워."

희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어. 안녕, 백이진."

이진 "안녕, 나희도."   (최종화 中)


하지만 이미 우린 대부분 잊었다. 지금은 덤덤하게 떠올리곤 하는 어느 시절의 인연이, 당시엔 내 인생의 간절하고 유일한 구원이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내심 깨닫는다. 사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건 아주 찰나고 시간의 마법이 다 하고 나면, 둘 사이를 지배했던 어떤 강렬한 마법 같은 힘들은 생명력을 다하게 된다는 사실을.



희도 "모든 걸 갖겠다고 덤비던 시절이었다. 갖고 싶은 게 많았다. 사랑도 우정도 잠시 가졌다고 착각했다. 지나고 보면 모든 게 연습이었던 날들. 함부로 영원을 이야기했던 순간들. 나는 그 착각이 참 좋았다. 그래도 가질 수 있었던 게 하나는 있었어. 그해 여름 바다. " (최종화 中)


끝이 있다는 게, 사랑이란 마법의 생명력이 끝내는 소멸한다는 게, 그래서 잊혀질 일만 남았다는 게, 그렇게 꼭 비극일까? 그렇지 않다. 때로는 나이 들어가는 희도와 우리의 기억 속의 빛났던 시절이 점점 희미해져서 다행이기도 하다. 그때의 희도가, 그리고 이진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때의 둘이 얼마나 반짝거리는 사랑을 했는지 너무 선명하게 기억난다면, 매일 느끼는 감정의 색깔마저 희미해지는 지금의 자신이 지나치게 초라하고 슬플 테니까.



모든 걸 다 갖겠다고 무턱대고 덤볐고, 그것을 다 가졌다고 함부로 착각했던 그 시절들은 과연 아무 의미가 없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의 인생에서 끝나 흘러간 사랑들 전부가 완벽한 실패가 아니었듯, 한때 내가 누군가의 구원일 수 있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분명히 아름다운 성공이었다고, 이 드라마는 말하고 있다. (물론 이 둘이 헤어지는 과정의 개연성이, 그 끈끈했던 과거의 서사가 무색했을 정도로 허무하게 부족했지만. 사랑의 시작은 고유하나, 끝은 비슷하게 별 볼일 없다는 게 지독한 현실이니, 그 역시 현실의 반영이었다고 나는 해석한다.)


"한번 다 가져봤잖아. 그게 중요한 거야. 인생에 한번은 다 가져봤다는 거."


그렇게 선명하게 살아봤던 시간들이 전부 기억나진 않더라도,  영광스런 순간을 기념하는 비석처럼 그때의 네가 지금까지 내 곁에 남지 않았더라도, 그 시절을 통과하며 자란 내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거니까. 당연히 그 사랑들은 실패가 아니다. 이것은 새드 엔딩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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