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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 Park Apr 06. 2022

현대미술이여, 미친 X들이 날뛸 판을 깔아라  

현대미술서 <토크 아트> & 퀴어 아티스트 김소윤의 작업

퀴어아티스트 김소윤의 서울대 졸업작품 '최후의 만찬'


남성의 성기가 식탁에 올라있다. 미소 띤 여자들이 나이프를 든 채로 그 식탁을 빙 둘러 에워싼다. 작품명 ‘최후의 만찬’ . 솜을 넣어 천으로 제봉한 성기 모양의 인형을 가위로 자르는 퍼포먼스가 벌어진다. 관객 역시 참여가 가능하다. 남근이 상징하는 모든 종류의 폭력성을 파괴하는 행위다.


이것은 ‘이반지하’라는 활동명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는 퀴어 아티스트 김소윤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졸업작품(2005)이었다. 당시 재직 교수들은 ‘자격미달’이라는 이유로 김소윤의 졸업을 불허했다. 예술의 소재가 되기엔 저급하고 상스럽다는 것이 대외적 이유였겠으나, 젊은 여성의 되바라진 파격에 대한 ‘유례없이 적극적인’ 검열이었다는 게 사후적으로 내려진 결론이다.


그는 이 작업에 대해 <문학동네>와의 인터뷰(2021.10)에서 이렇게 밝혔다.


“세상에 대한 분노와 좌절감이 똘똘 뭉쳐 거칠지만 임팩트 있는 작품이 나왔다. 하지만 수년 동안 그 작업을 창피해하며 살았다. 학교에 갈 때마다 덜덜 떨면서 갔다. 교수 취향에 맞는 선배들이 분위기를 꽉 잡고 주도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모두가 나를 두고 수군거렸다. 돌아가며 충고를 하며 망신을 주기도 했다. 오래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최근 에세이집을 엮으며 당시의 일화를 쓰기 위해 오랜만에 다시 꺼내봤다. 웬걸, 너무 괜찮아서 놀랐다. 아니, 솔직히 말해 꽤 잘했더라. 그때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었다. 나는 꾸준히 잘해왔었다는걸.”


전방위적인 가스라이팅 속에 어찌어찌 살아남았으나, 16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간신히 그 시기와 화해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퀴어 예술가들은 스스로 의심을 많이 한다. 그때의 나 역시 그랬다. 단순히 내가 택한 주제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재능이 없는 거면 어떡하지 싶어서.”


16년이 지난 지금, 다행히 시대가 조금쯤 변했다. ‘국립’이나 ‘시립’이 붙는 공간이야 여전히 시종일관 점잖은 얼굴로 하고 있지만, 도시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후미진 공간에서는 꽤나 ‘전위적’인 판들이 벌어진다. 관람자이자 향유자로서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시대를 만났다는 생각에 문득문득 다행스럽다.


동시대 미술의 가장 뜨거운 현재를 다룬 책 [토크아트]에서 단연 인상깊었던 대목은 단연 예술이 페미니즘, 그리고 퀴어 정체성 투쟁과 만나는 지점이었다. 대한민국의 김소윤보다 앞서, 정체성 투쟁을 작품의 그릇으로 담았던 예술가들이 있었다. 성과 관련된 개인적 역사와 상처를 작품으로 다웠던 트레이시 에민은 작업을 세상에 내놓을 때마다 “또 낙태 얘기로 징징거린다”는 말을, “열세살 때의 강간을 들먹여 투덜거린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십대 여성이 겪는 몸과의 불화를 소재 삼아 작업해온 리사 유스케이바게는 예일대 재학 시절 “바로 그 소재를 버려야 한다”고 요구받았다. 이들의 대담하고 용감한 작업들은 수년이 흐른 지금 기념비적 사건으로 기록됐다.

 My bed (1998) 트레이시 에민은 성폭행, 임신, 낙태, 알코올 중독 등의 개인사적 경험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했다.


이들의 작업을 보며, ‘자기표현’이라는 형태로 예술에 정치가 한스푼 섞일 때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느낀다. 어젠다가 저널리즘의 얼굴을 할 땐 ‘차갑게 찌르는 형태’가 되지만, 예술의 그릇에 남길 땐 ‘뜨겁게 녹이는 형태’가 된다. 때로는 구구절절한 서술보다, 세련된 상징으로 응축된 이미지로 ‘멕일’ 때의 전압이 더 높은 법. 그래서 예술이 재밌고, 또 예술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캐서린 오피, 수닐 굽타, 리사 브라이스, 소마야 크리츨로우, 사라 쿠라크, 차발랄리 셀프,그리고 아모아코 보아포까지. 이 책이 소환한 동시대 아티스트들의 이름을 오래 기억하며 추적할 것이다.

젊은 흑인 여성 아티스트 차발랄라 셀프의 회화 작품. 그는 성별과 인종, 차별을 주제로 작업한다.


하지만 ‘이만큼 왔으니 된 것’은 아니다. 앞으로 펼쳐진 길이 지금까지 걸어온 것보다 아득하다. 다시 이반지하의 말로 돌아가보자.


“최근에 나를 좋아하게 된 사람들이 2004년에 만든 내 노래를 찾아본다. ‘동성동본도 결혼하고’ 같은 가사들을 보며 ‘현재적’이라며 좋아한다. 나는 이런 담론들이 당시에 충분히 회자되지 못했기 때문에 빚처럼 떠도는 게 아닌가 싶다. 한 세대의 소수자를 정의할 수 있는 표현이 나왔을 때 그게 제대로 소비되고 회자된다면 빚처럼 오랜 유통기한을 가질 필요없이 바로 소멸되고 새로운 표현이 등장할 수 있을 텐데, 주류 문화 밀려 더 회자가 안 되다 보니, 되게 이상한 의미에서 클래식이 됐고, 오랜 생명력을 갖게 된 거다. 나는 15년 간 한국 예술계의 대항문화의 예시로 호명되어왔다. 이건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 작가들의 작품이 오래오래 회자되는 것과는 또 의미가 다르다. 그들은 진짜 클래식으로 추앙되지만, 나는 진정한 클래식으로 여겨지지 못하고 여전히 주변문화의 하나의 예, 대명사로 남는다.”


소수자들이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는 때는 그들 자신이 특정 영역에서 ‘과잉 대표’되지 않을 때라고(-여전히 한국사회에서 홍석천은 게이의 대명사다-), 충분히 많은 소수자가 세상에 ‘보여져서' 마침내 그들의 소수자적 정체성이 그들 자신의 ‘유일한 개성’으로 여겨지지 않을 때라고, 예술학자 이라영은 말했다.


그래서 더 많은 여성, 퀴어, 유색인종 아티스트의 작품을 글로벌 예술 시장에서 보고 싶다. 이 시대의 여성과 성소수자 예술가들이 그들의 몸과 섹스에 대해, 그리고 그들 자신의 가장 내밀한 정체성에 대해 다루기를 두려워 하지 않았으면. 차곡차곡 쌓이는 시간들을 딛고 미래에 당도할 후세대의 소수자들이 정체성 정치의 알을 깨고 나와 비로소 자유로워졌을 때, 어떤 시각언어로 새롭게 말을 걸어올지 기대된다.


참고 자료)

이반지하, 임솔아, 오은교 <우리는 웃을 수 있을 만큼 강하다>, 문학동네 2021년 겨울호

김소윤,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

임근혜, <창조의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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