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을 하기 위해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보통 아침에는 핸드폰 알람이 잘 울리지 않는데, 유독 밝게 핸드폰 알람이 보였다. 이상한 날이었다. 이른 아침에는 연락이 올데가 없는데라 생각하며 핸드폰을 열었다. 아는 언니의 연락이었다. 언니의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메시지였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언니와 통화를 했다. 훌쩍이면서 말을 하는 언니의 모습에 나도 마음이 아팠다. 나도 그런 때가 있었기에. 지금은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위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언니의 공허하고 헛헛하고 슬픈 마음을 헤아리는 길은 그냥 옆에 있어주는 수 밖엔 없다고 생각했다.
근무가 바쁘게 있을 예정이었지만, 최대한 휴가를 냈다. 내야만 했다. 이동시간이 길기 때문에 퇴근시간은 최대한 피해서 이동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4시에 2시간 연차를 냈다. 서울로 향하는 길은 사람도 많았고, 차도 많았다. 서울로 향하는 길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장례식장에 도착하여 언니를 보자마자 울음이 나왔다. 이상하게 꼭 안은 언니의 작은 품에서 슬픔이라는 감정이 나와 나에게 전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동안은 눈물이 계속 나왔다. 자리에 앉아 언니는 나에게 먼 길 와주어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보다는 언니를, 언니의 가족을 먼저 챙겼으면 좋겠는데. 언니는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성숙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가끔은 이런 성숙한 생각을 가진 존재가 어른인가 했다. 나보다는 타인을 먼저 살필 줄 아는 배려를 한 번쯤은 내려놓아도 좋을 것 같은데.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기보다는 타인을 더 생각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보다는 지금은 그냥 언니의 충분한 슬픔에 젖으셨으면 좋겠다 싶었다.
퉁퉁 부어있는 언니의 눈을 보니 그동안 얼마나 슬펐하셨을지 가늠이 되었다. 언니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했다. 그만큼 사람들이 언니의 슬픔을 나누어 가져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족이 하늘로 갔다는 것처럼 슬프고 원통한 게 있을까 싶다. 세상은 잔인하다. 우리가 뭐 그리 오래 산다고, 그 찬라의 시간도 허용하지 않는 건지 싶었다.
언니와 언니의 어머니, 그리고 가족분들이 더 열심히 행복하게 살아가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빈자리는 크게 느껴지겠지만, 앞으로 살아가실 날들에 배로 더 행복하셨으면 좋겠다고 염원했다. 따끈한 육개장을 먹고 언니와 짧은 이야기를 나누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깜깜해진 하늘에 땅에는 하나 둘 불빛이 켜졌다. 집에 가는 길에는 나도 나의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아버지도 그러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아버지라는 존재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사라졌다. 뭣도 몰랐는데, 맑았던 날 그때의 아침 식사가 마지막이었다. 기억 속에 아버지는 있지만 평생 그리워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건강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그때부터였나 보다. 나 자신을 위한 것도 있지만,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슬픔을 미래에서 현재로 당겨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는 존재의 사라짐을 슬퍼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존재의 부재는 생각보다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믿기에, 난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바랬다. 그리고 내 주위의 사람들 모두.
대학교 때 만난 언니와의 인연은 꽤나 깊은 것 같다. 대외활동에서 만나 함께 자취를 하고 지금까지도 연락을 하는 것을 보면. 어렸을 때에는 미처 몰랐었던 그런 사실을 갑자기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나이 듦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그냥 우리들의 이야기로만 한정됐던 이야기 주제들이, 우리들의 가족까지 넓혀져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으니. 이렇게 서로 힘들 때는 함께 슬퍼해주고 기쁠 때는 함께 기뻐해 주는 그런 것이 삶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를 어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나, 이제는 어른으로서의 면모를 하나 둘 느껴가는 중인 것 같다. 슬픔이라는 감정에 대해, 그리고 함께 살아간다라는 느낌에 대해 생각하게 된 하루였다. 짙은 어둠 사이에 핀 가로수 조명이 그날따라 유난히 밝다고 느껴졌다. 우리 모두의 길을 밝게 밝혀주기를 바라며 나는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향하는 길이 생각처럼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