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보라 Aug 15. 2022

아이들과의 여행 팁 (제주 한달살기)

슬기로운 여름방학 제주 생활


제주에 한 달 살기로 결정하고 어떻게 여행할지 생각해보았다. 최근 제주도 여행은 주로 2박 3일, 3박 4일로 좋은 호텔에 묵으며 힐링하다 왔던 것 같다. 아이가 어릴 때는 숙소가 중요하다. 호텔에서 수영하고, 맛집에 찾아가고, 동선에 맞는 관광지 한두 곳 보고 올라왔다. 이제 아이들도 좀 컸고, 아빠가 없는 시간도 긴 데 어떤 여행을 하면 좋을까?





어디를 갈까?


우선 한 달간 머무를 숙소를 정하고 그 일대를 돌아보기로 했다. 평소 자주 가던 중문과 서귀포 쪽을 제외하고 잘 가지 않던 제주 북동쪽으로 정했다. 어디를 갈까 서칭 하다 보니 내가 모르던 좋은 곳이 많다. 여름방학을 통째로 제주에서 보낼 초등학교 고학년인 첫째에게도 리스트를 만들어보라고 했다. 우리 가족의 마인드맵을 그려 보았다. 각자 가장 가고 싶은 곳, 가장 하고 싶은 것, 가장 먹고 싶은 것의 리스트를 작성했다.

우리 가족 제주도 한달살기 위시리스트


일정은 무계획이다. 가고 싶은 곳을 몇 군데 정해놓고 상황에 따라 정하기로 했다. 짐 싸기 바빠 일정 짤 시간도 없거니와 그날 날씨를 보고 판단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지금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보다 자유로운 영혼이고 싶었다. 남편은 계획적인 사람이라 미리미리 디테일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 일정을 착착 소화하는 스타일이지만 나는 다르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걱정 없는 나이기에 제주에서의 한 달은 내 방식대로 즉흥적으로 살련다.




한 달 쉬는데 공부는 어찌하지?


한달살기가 결정되고 초등학교 5학년인 첫째의 학원에 한 달 동안 쉰다고 연락했다. 예체능 학원이야 큰 상관이 없지만, 영어 학원은 달랐다. 레벨업이 어쩌고 연속성이 어쩌고 걱정된다며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제주도에 같은 어학원 지점이 있어 한 달 동안 그 학원을 다니는 게 어떠냐는 것이다. 세상에나! 그렇게 하는 아이들이 있단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제주도에 와서 학원엘 다녀야 한다니.. 첫째에게 살짝 의견을 물어봤더니 역시나 표정이 좋지 않다. 학원은 수업도 과제도 그냥 쉬자. 공부할 건 미리 두 배로 해두고, 한 달 동안 그냥 놀기로 했다. 다녀와서 또 열심히 하면 되지. 매일 한 장씩 풀던 연산 문제집도 스톱! 모든 걸 멈추고 한 달간 온전히 놀고먹고 쉴 거다. 아, 그래도 읽고 싶은 책은 읽어야지. 도서관에만 가기로 하자.




오늘은 누구의 날?


집을 떠나 아이들과 온전히 보내는 한 달이란 시간. 많이 여유롭고 조금 특별했으면 싶다. 이번 기회에 TV 없는 생활을 해 볼까? 그냥 아무 계획 없이 놀기만 하는 건 어떨까? 어떤 테마를 정하고 평소와는 다른 생활을 해봐도 좋을 것 같다. 우리 가족은 어떤 테마로 한 달을 지내볼까나.


가고 싶은 곳의 리스트를 작성해 봤더니 아이들과 어른들의 온도 차가 크다. 아이들에게 양보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지. 우리는 모두 소중한 존재니까. 룰을 정했다. 우리 가족은 하루씩 번갈아 각자의 날로 지내기로 했다. 내가 주인공인 날에는 내가 원하는 곳에 가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한다. 다른 가족들은 양보하는 날이다. 순서는 나이가 어린 둘째부터 하기로 했다. 오늘은 둘째의 날, 내일은 첫째의 날, 모레는 나의 날. 아빠가 오는 날은 아빠도 순서에 참여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묻는다. "오늘은 누구의 날이지?"



우연히 만난 에메랄드빛 바다에서



아이들과의 여행 팁


나는 오름에 가고 싶은데 아이들은 자연에 아무 감흥이 없다. 아이들은 사탕 만들기를 하자는데 그런 건 꼭 제주도가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것이잖아.. 아이들도 좋아하고 나도 만족하려면 어떻게 여행하면 좋을까?


1. 내가 왕이다, 왕놀이

매 순간 하고 싶은 게 분명한 아이들은 왕놀이를 좋아한다. 우리는 각자의 날을 정했기 때문에 그날은 내가 왕이 된다. 내가 숲에 가자면 숲에 가고, 집에 있겠다 하면 집에서 논다. 유치원에 다니는 둘째의 날에는 언제나 바다에 갔다. 그동안 주로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해서 그런지 바다에서 파도 타는 걸 재밌어했다. 무엇보다 바다에는 살아있는 생명체들이 많다. 물고기도 잡고, 게와 새우도 잡고. 생생한 체험 시간이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바다에서 논다. 하고 싶은 것을 바로 그대로 할 수 있는 것, 그게 그토록 어려웠을까? 자신의 말을 바로 들어주니 너무나 행복해한다. 아이가 무얼 하고 싶다 하면 지금은 곤란한 순간이 많긴 하다. 그렇더라도 "안 돼"라는 말은 잠시 참자. 우리는 제주에 왔으니까.


2. 내버려 두기

성이시돌 목장에 갔을 때의 일이다. 푸른 들판에 말들이 유유자적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높은 하늘과 뭉게구름, 모든 것이 완벽한 그림 같은 풍경에 넋을 잃었다. 그런데 둘째는 나의 사정과는 다르다. 말들에 관심을 갖는 것도 잠시 뿐, 햇볕이 너무 뜨거워 이곳이 재미가 없나 보다. 툴툴거리길래 조용히 잠자리채를 집어주었다. 더운 여름인데 잠자리들이 꽤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와 딸은 사진 찍으며 산책하고, 둘째는 날아다니는 잠자리와 나비를 잡으려 신나게 뛰어다닌다. 같이 무얼 하자고 손 잡아끌지 않고 내버려 두니 평화가 찾아왔다.

한 달이라는 시간, 길다면 긴 시간이다. 무얼 하더라도 여유가 있어 좋다. 다음 일정이 있어도 안되면 내일 하면 되기에 마음껏 시간을 누리고 돌아올 수 있다. 아이들에게 자유를 주자 나에게도 자유가 왔다. 같은 공간에서 다른 기쁨을 찾는다.


3. 집에서 놀기

여행 가면 매일 주말을 보내는 기분이다. 하루하루가 특별하다. 제주에 가서 일주일 정도 매일 외출을 했더니 피로가 쌓인다. 정말 일요일다운 일요일을 보내고 싶어졌다. 아이들도 피곤했던지 하루 종일 집에서 논다고 한다. 보드게임을 좋아하는 아이들이라 많이도 챙겨 왔다. 체스, 브루마블, 사다리게임에 딱지치기도 가져왔고 나중에는 다이소에서 사 오기도 했다. 3천 원의 행복이다. 매일 게임판이 벌어진다. 내 이럴 줄 알고 독채를 빌렸다. 아파트에서는 아래층 배려하느라 시끄럽게 뛰지도 못하고 늘 미안하다. 놀러 와서는 집에서 마음껏 뛰고 놀렴. 신나게 놀이하다가, 심심하면 책도 읽고, 나가서 킥보드도 타고, 강아지에게 밥도 주고. 더울 땐 커다란 욕조에서 수영하면 되지. 일주일에 하루는 그냥 쉬자. 집에만 있어도 좋다. 창 밖 저 멀리 바다가 보이고 흘러가는 구름 또한 멋지다.


4. 도서관 가기

숙소 가까운 곳에 도서관이 있어 좋았다. 제주도는 도서관이 잘 되어있어 책이 많고 나와 같은 타지인들도 대출이 어렵지 않다. 오며 가며 잠깐 짬을 내어 도서관에 들러보면 어떨까. 우선 내가 읽을 책을 고른다. 여행에 관한 가벼운 에세이, 제주에 관한 책, 아니면 시집도 좋다. 박노해 시인의 <걷는 독서>라는 책을 제주에서 빌렸다. 우연히 눈에 띄어 빌려놓고 가끔 생각날 때 들춰보았다. 각 페이지마다 짧은 문장이 적혀 있는데 심쿵하는 순간이 많다. 내가 책을 읽으면 아이들도 책을 읽는다. 일주일에 한 번은 도서관에 가서 시원하게 책을 읽다가 몇 권 빌려서 집에 온다. 심심할 땐 책을 펼친다. 다행히 우리가 묵는 집에는 거실에 TV가 없어 책 읽는 시간을 꽤 가질 수 있었다.






아이들과 한 달 제주에서 살기. 코시국에 어려운 결정을 했다. 하지만 지금 아니면 언제 떠나리. 아이들이 크면 이렇게 함께 한 달을 여행할 수 있을까? 제주에 오니 마음껏 외출하는 것도 오랜만이다. 이런저런 체험들이 더 귀하게 다가온다. 그동안 많이 못 데리고 다녀서 미안하네.


엄마가 주도하기보다는 아이들이 스스로 찾아가는 여행. 원하는 것을 말하고 해결할 방법을 찾는 우당탕탕   앞을   없던 여행이라  기억에 남는다. 넓은 하늘과 바다와 오름을 배경으로 구석구석 살피고 마음껏 놀기.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누리기. 내가 하고 싶었고, 아이들에게 주고 싶었던 경험들이다. 아이들은 지금  순간 최선을 다해 재미를 찾는다. 모든 것의 본질은 현재를 온전히 사는 것이 아닐까. 아이들에게 배운다.




성 이시돌 목장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