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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라야 남자 Jun 28. 2021

인턴 후 정규채용? No! 경쟁채용!!

우리는 첫날부터 을이었다.

내 첫 직장은 국내 3위 안에 드는 생활용품 중견기업이다. 그룹사로는 20개 계열사를 거느렸고 당시 매출은 5조 정도였다.

누구든 그렇겠지만 회사를 골라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몇 안될 것이다. 얼마 전 대기업 20개를 동시에 서류 합격했다는 전설과 같은 이야기는 우리 같은 범인에게는 상상도 못 할 이야기이다. 당시 난 취업에 대한 자신감이 무척이나 부족했다. 그도 그럴 것이 준비가 너무 안되어 있었다. 해군 학사장교로 군대를 다녀왔는데 막판에 함정근무를 하며 여가시간에 취업준비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제대 후에는 한 달간 네팔, 인도 여행을 다녀와 귀국 후 그제야 토익공부를 시작했다. 3개월간 공부한 후 겨우 회사에 지원할 수 있는 커트라인 수준의 점수를 따냈고 그때부터 틈틈이 봄 전형 공고가 올라올 때마다 자기소개를 넣기 시작했다. 당시 50개 정도 서류를 넣은 것 같은데 대부분 다 낙방했기에 어디든 합격만 하면 가자는 절실함이 있었다.


그때 그런 내 손을 잡아준 회사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내 첫 직장 D사이다. 면접 때 잘 보이려고 모조 회사 배지까지 만들어 양복에 달고 갔다. 그런 정성이 갸륵했는지 최종 합격했고 발표를 결혼 전 지금의 아내와 같이 확인하고 뛸 듯이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부푼 꿈을 안고 첫 오리엔테이션 날에 회사로 출근했다. 나와 같은 동기인 12명 정도가 회의실 자리에 마주했고 곧 인사팀 담당자가 등장했다. 연봉계약서에 서명하고 08시 출근에 17시까지 근무, 1시간 연장근무로 18시 퇴근이라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근무환경이었지만 그런가 보다 했다. 그래도 행복하니까!

그런데 갑자기 인사팀 담당자의 입에서는 우리가 상상조차 하지 못한 말이 나왔다. 인턴 후 정규채용이 100%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턴 3개월 근무 후 평가에 따라 이중 오직 50%만이 정규채용이 된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분명 채용공고 안내사항에 인턴 후 정규채용이라는 문구가 있었기에 우리는 모두 당연히 인턴 근무기간만 잘 다니면 100% 정규직 전환이 된다고 생각했다. 50%만 채용된다는 이야기를 합격 후 오리엔테이션 당일에 전달하다니 정말 말도 안 된다며 우리끼리 웅성웅성거렸다. 그때에는 갑질 이런 단어도 지금처럼 잘 언급되던 때가 아니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갑의 횡포였다. 선택권을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갑’이 수동적인 선택권자인 ‘을’에게 애초에 사전 고지 없이 통보한 것과 다름없었다. 공채 동기로 첫 만남을 가진 우리 12명은 이제 생존을 위해 경쟁하고 누군가가 낙오하길 바라는 ‘베틀로얄’ 게임에 참전하게 된 것이다.


이 ‘베틀로얄’의 규칙은 이러했다. 3개월간 각 현업부서에 배치되어 근무기간 부서장에게 평가를 받고 마지막 날 임원들 앞에서 각자 자기 주제를 가지고 10분 동안 준비한 발표를 하는 것이다. 내가 속한 영업부서는 출근도 8시가 아닌 30분을 당긴 7시 반까지였다. 출근을 빨리 했다고 시간 외 수당을 지금처럼 더 챙겨주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30분 더 빨리 나와 그날 일과를 준비하라는 명령(?)이었다. 내가 속한 부서에는 총 3명의 동기가 배치되었고 나는 살아남기 위해 인턴이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어필인 출근을 빨리하는 전략을 취했다. 회사에 새벽 6시, 출발이 아닌 도착을 했다. 인턴이 와서 할게 뭐가 있겠는가, 그냥 앉아서 열심히 모니터만 저녁 6시까지 12시간을 그렇게 앉아 있다 갔다. 놀라운 건 내가 새벽 6시에 와도 이미 앉아 계시는 차장님이 있다는 것이다. 그분은 늘 새벽 5시 반에 앉아서 일을 시작하셨다. 당시 제일 잘 나가던 채널인 이마트 담당이셨는데 회사에서도 높이 인정받는 분이었다. 나는 살아남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옆에 동기들의 행동들 하나하나에 신경 쓰며 그들보다 좋은 인상과 평가를 받으려고 매사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나름의 사정이 있었는데 바로 결혼 때문이었다. 군대에서 만나 3년 연애한 지금의 아내는 나보다 한 살 연상인데 당시 장모님은 아내가 30살 되기 전에는 무조건 결혼해야 한다는 입장이셨다. 장교로 재직 중일 때도 나를 백수라고 생각하셔서 아내에게 선까지 보라고 닦달하셨던 터라 어떻게든 정규직이 되어 그토록 원하시는 대기업 당선권을 갖다 드려야 했다. 그래서 실제 인턴기간에 상견례까지 진행했고 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독기로 그 3개월을 그렇게 버텼다. 그런데 상황이 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12명 동기들이 하나 둘 중도 하차하더니 마지막에는 딱 6명만 남게 된 것이다. 중간에 다른 회사에 합격한 친구도 있었고, 7시 반 출근이라는 이야기에 아연실색하여 다음날부터 안 나온 동기도 있었다. 사실 군대를 제대한 직후 입사한 내가 보기에도 군대보다도 더 군대 같은 회사 분위기였기에 견디기 쉽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전국 영업사원들이 모여 워크숍 하는 날에 영업상무님이 오시면 전원 기립하여 인사하고 회식 후 전용차를 타고 가실 때에는 양복 입은 아저씨들 전원이 반원으로 둘러싸며 ‘안녕하 가십시오!’라고 크게 복창하는데 군대 때도 하지 않았던 누아르 영화의 한 장면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치열하게 보낸 3개월, 마지막 발표도 PPT 10페이지 분량을 아예  보고   있을 정도로 외워서 준비하며  마무리하였다. 사실상 최후 6명밖에 남지 않아 전원 정규직 전환이 결정된 터였기에 우리끼리의 축제 날이었다. 그렇게  정규직이 되었고  3년간  회사에 다녔다. 그토록 염원하던 결혼도 그해 무사히  치러 지금의  딸을  아빠가 되었다.  모든 시작은 당시의 D사로부터 시작됐다. 아무것도 없던  시절, 간절함만으로 견뎌냈기에 더없이 소중하고 뭉클한 시간들이었다. 그때 만난 동기들은 지금도 연락하고 만날 정도로 더없이 순수한 우정을 간직한 친구들이다. 현재  회사에 남아있는 친구도 있고 나처럼 이직을  친구들도 있지만 서로의 길을 축복하고 응원하는 전우들이다. 각자 사는 세상이 많이 달라졌지만 같은 추억을 공유한 우리를 묶는 끈은 여전하다. 다음 글에서는 지금 생각해봐도 파란만장했던  회사의 일들을 풀어내 보려 한다.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못할  같은 그때의 일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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